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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내게 말해다오. 공중의 달이 뿜어내는 빛과 땅 위의 깨진 유릿조각 위에서 반짝이는 한줄기 빛은 어떻게 다른가? 내 인생의 빛나던 달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한때 빛나던 것 은 그 자취 흐릿하고 빛 잃은 꿈은 깨진 유릿조각마냥 함부로 나뒹군다. 지상에 술집들이 늘어나는 것은 삶의 덧없음에 실망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부, 굴뚝청소부, 신기료, 문선공, 밀주업자, 신앙촌 간장이니 빨간 내복을 팔던 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새 많은 직업들이 없어졌구나. 나는 더 이상 자살을 꿈꾸지도 않고, 기성 질서를 바꾸고자 무모하게 저항하지도 않는다.” p.50

 

그런 어느 오후 나는 혼자 웃고 있었다.

 

한 문장을 덧붙여 본다. 삶의 덧없음은 일찍이 무수한 작가들과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던 주제 중에 하나이다. 내세를 믿던, 사후세계를 믿던, 소멸을 하리라 생각하던, 결과적으로 우리는 지금의 삶 말고 어떤 기억도 가질 수 없고, 가진 적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허망한 결말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한다.

 

일찍이 두 편의 긴 에세이를 남긴 전혜린은 죽음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 했다. 어째서 아무도 그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고 함께 나누지 않는지 한탄했다. 그녀의 산문에는 우울과 죽음이 내리깔린 독일의 풍경이 담겨 있었고, 이는 음습하고 퇴폐적인 어떤 동경을 낳았다. 궁극의 두려움이란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공포에 떠느니 목숨을 끊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이 전혜린의 답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숲에서 이야기했다. 죽음은 삶의 한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언제나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당장 오늘밤 잠을 자다가 죽을수도, 내일 아침 길을 나서서 죽을 수도 있다. 죽음이란 삶의 끝에 예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 다가오는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그림자다.

 

또한 죽음이란 절대적인 허무라는 점에서 무엇인가를 영원히 앗아가는 것이다. 기즈키를 잃어버린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기즈키가 영원히 가져가버린 무엇이 남긴 상실에 허덕인다. 결국 나오코는 그 상실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와타나베는 그 둘의 이야기를 홀로 지키는 아무도 오지 않는 박물관을 지키는 관리인이 되어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다. 와타나베는 새로운 연인 미도리를 통해서 살아가기로 한다.

 

장석주의 에세이는 어딘지 허무의 냄새가 난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삶의 오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아마 삶의 밤이란 심연을 일 터이니 달빛마저 꺼지는 순간이 바로 죽음이 아닐까. 해가 져가고 끝나지 않을 밤이 다가오는 오후에 장석주는 담담히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 많은 작가들이 했던 이야기들과 썼던 문장들을 조금쯤 기대어 오후의 감회를 말한다. 우리는 이 산문이 인생의 오후에 쓰였음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읽어야 한다. 이 산문에 내리쬐는 빛은 시작의 빛이 아니라 끝에 다가가는 빛이기 때문에.



"오, 누가 내게 말해다오. 공중의 달이 뿜어내는 빛과 땅 위의 깨진 유릿조각 위에서 반짝이는 한줄기 빛은 어떻게 다른가? 내 인생의 빛나던 달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한때 빛나던 것 은 그 자취 흐릿하고 빛 잃은 꿈은 깨진 유릿조각마냥 함부로 나뒹군다. 지상에 술집들이 늘어나는 것은 삶의 덧없음에 실망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부, 굴뚝청소부, 신기료, 문선공, 밀주업자, 신앙촌 간장이니 빨간 내복을 팔던 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새 많은 직업들이 없어졌구나. 나는 더 이상 자살을 꿈꾸지도 않고, 기성 질서를 바꾸고자 무모하게 저항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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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서 가능한 날들이었다
정기린 지음 / 달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사랑은 세계를 바꾼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나의 세상은 그 사람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지나쳐갔던 일상의 순간들 속에 사랑하는 사람이 담긴다. 쉬이 지나치던 일들도 의미를 갖고 새롭게 다가온다. 어제와 같은 예사로운 햇빛에도 오늘은 마음이 설레고, 마음을 울적하게 만드는 차가운 비에 오히려 가슴이 따듯하게 젖는다. 세상은 이전까지의 의미를 잃어버려 우리는 사랑에 빠지기 전의 삶을 잊어버린다.

 

그러다보면 마음속에는 남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우리는 그 사랑에 빠지기 이전에는 상상해하지 못할 마음들을 말로 하지 못한다. 말은 사랑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우리는 언제나 마음에 비하면 초라한 말들로 사랑을 이야기한다. 말은 언제나 사랑을 잡지 못한다.

 

정기린은 4년간의 사랑을 글로 풀어내기 위해 애쓴다. 그는 작가가 아니다. 그의 문장은 매끄럽지 못하고, 끊어져야할 순간에 이어지며, 닿지 못할 감정을 향해 부자연스럽게 뻗어있다. 거칠고 날것의 문장은 세련되고 다듬어진 작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정기린의 문장은 어딘가 닿아있지만, 어디로 닿아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그게 사랑이다. 사랑에 대해 고민한 시간보다 문장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 많은 작가들은 사랑과 문장의 괴리를 가장 좁혀온 사람들이지만, 정기린은 그 괴리를 누구보다 잘 보여주는 사람이다. 누가 이렇게 간결하지 않은 문장으로, 차마 이야기하기 어려운 솔직한 문장으로 사랑을 책으로 엮어냈을까.

 

사랑이 언제나 말과 멀리 떨어진 감정이라면, 우리는 당신이라서 가능한 날들이었다를 통해서 사랑에 다가가는 우리의 말들을 볼 수 있다. 정기린은 사랑을 하는 시간 속에서 느끼는 새로운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은 세상을 뒤집기에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는 삶의 모든 순간들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사랑이 뒤바꿔놓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렇게 정기린의 이야기는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넓어진다.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그 모든 문장들은 사랑이라서, 당신이라서 가능한 말들이었다. 그의 사랑이기 때문에 가능한 순간들이었으며, 우리는 자신 역시 누군가로 인해 가질 수 있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의 조금 낯뜨거울 정도로 솔직한 이야기에 수줍게 공감한다. 우리 역시 모두 다른 당신들에게서 받은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에 거리감을 느낀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말을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우리에 가장 가까운 문장들을 낯설게 여기는지.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한 말들을 아직 제대로 적어보지 않은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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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 / 달 / 2017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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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무엇보다 이야기를 보지만 에세이는 사람을 보게 된다. 은희경의 소설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나 주인공들이 있지만, 은희경의 수필이라고 하면 은희경이라는 사람이 떠오른다. 은희경 작가의 책을 십여 권을 읽고도 정작 생각의 일요일들을 읽으며 낯설어 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시인의 에세이는 보다 특별하다. 시 한편은 자신의 향기를 오롯이 갖고 있다면, 시인을 보여주는 에세이는 어떤 시든 될 수 있는 풍부한 향을 지니고 있다. 시인에게서 아직 그가 쓰지 않은 시를 읽은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시인의 말은 시인이라는 이유로 운율과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김소연 시인의 시집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마음사전을 끼고 몇 번이고 읽었다. 마음사전에서 시의 향기가 보다 짙게 났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구구절절한 애정을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에서는 단 한 문장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곧 봄이 오는데, 나는 앞을 볼 수 없습니다.

 

나는 앞을 볼 수 없습니다.’라고 적힌 걸인의 팻말을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짧은 시 한 구절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곧 봄이 온다는 사실과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시인의 문장을 만드는 시선을 갖기란 어렵다.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르게 엮어낸다.

 

시인의 문장은 손끝이 아니라 눈에서, 가슴에서 나오기 때문에 나는 시보다도 시인이 좋다. 시인은 세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우리와 같으면서도 얼마나 다를까. 그 상상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시인의 에세이이다.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는 제목처럼 겸손하고 따뜻한 나희덕 시인의 눈을 보여준다. 부딪치는 사건이나 지나가는 일상들에서 뻗어나가는 아름다운 상상, 조금 아련한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눈에 대한 반성. 나희덕 시인은 조심스레 발을 내딛어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 시인 노릇 헛했구나. 새에 대해 그렇게 많은 시를 써왔지만, 정작 문명화된 내 몸은 새의 부리나 발톱의 이물감을 감당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더운 피가 도는 짐승의 등을 만져본 지도, 나무를 꼭 끌어안아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87, 새들아, 이리오렴

 

시인은 즐거운 허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떤 물웅덩이를 만드는 것 같다. 아주 짧은 글 만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생생한 감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 보기만 해도 괜찮은 것을 안아보고, 만지기 두려운 것에 손을 데고, 느낄 수 없는 감정에 마음의 창을 낸다.

 

새의 발톱에 놀란 시인은 새에 대해 쓴 자신의 시들에 조금 부끄러워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다시 새로운 시를 쓸 수 있는 마음을 얻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들이 결국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진다. 시란 결국 시인의 눈과 마음을 통해서 손끝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결국 시인의 눈으로 본 세상은 아직 손끝으로 옮겨지지 않은 한편의 시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산문이 주는 잔잔함이 언젠가 시인의 손끝에서 깊은 파문을 주는 몇 줄의 시가 되길 기대하게 된다.

 

표지에 담긴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은은하게 내려드는 숲길을 걷는 상상을 한다. 나희덕 시인이 한 걸음씩 걸어서 시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 길 위에서 쓴 산문들이 여기에 적혀있다고, 분명하게 느껴진다.

 

아, 시인 노릇 헛했구나. 새에 대해 그렇게 많은 시를 써왔지만, 정작 문명화된 내 몸은 새의 부리나 발톱의 이물감을 감당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더운 피가 도는 짐승의 등을 만져본 지도, 나무를 꼭 끌어안아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87쪽, 「새들아, 이리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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