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범우문고 302
헤르만 헤세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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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헤세를 처음 알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국어시간을 통해서다. 원제는 '공작나방'인데 교과서에는 '나비'로 소개되었다. 이 작품은 나비 채집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던 어린 헤세의 경험담에서 비롯 되었다. 성인이 된 주인공이 자신의 친구에게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형식으로 소설이 전개된다. 

끼니를 거를 정도로 나비수집에 빠져 있던 그 시절, '나'는 나비를 채집하며 지상의 모든 행복과 희열을 느낀다. 그런 '나'의 옆집엔 나무랄 데가 없다는 것이 흠인 에밀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에밀이 공작나방을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이 진귀한 곤충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난다. 


'나'는 공작나방을 보기 위해 에밀을 찾아갔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에밀의 방에는 아무도 없없고 깔끔하게 정리된 에밀의 수집함을 열어 본 후 '나'는 그만 인생 최초의 도둑질을 하고 만다. 그러나 잘못을 깨달았을 땐 이미 주머니에 넣었던 공작나방이 모두 바스러진 후였다. '나'는 수집한 나비 전부를 주겠다며 에밀에게 용서를 빌었지만 에밀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대신 경멸에 찬 눈초리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소설의 결말은 어린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한번 결딴 난 일은 다시 손을 써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집으로 돌아가니 다행히 어머니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내게 키스를 해주셨지. 시간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지만, 잠들기 전에 몰래 식당에서 커다란 그 갈색 상자를 가져와 침대에 올려놓고는 어둠 속에서 그걸 열였지. 그러고는 나비들을 꺼내어 차례로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루를 만들어 버렸다네.”


그건 그렇고, 당시 나는 이 소설의 발단이 된 공작나방의 생김새가 무척 궁금했었다. '커다란 네 개의 신기한 눈'을 가진 공작나방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이 작품에서 나비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생생한지 이 작품을 계기로 나도 나비에 대한 관심이 크게 생겨 당시 내가 보던 사전이나 책에서 나비가 눈에 띄기만 하면 죄다 오려서 모으곤 했었다. 그러나 끝내 공작나방을 찾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 선물 받은 이 책을 펼쳐 보고 나서 공작나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주인공이 왜 그토록 보고 싶어했는지알 수 있었다. 결코 다른 나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그 신비로움 때문에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공작나방이 그려진 페이지를 펼쳐보면서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이 책에는 공작나방 뿐만 아니라 신기한 나비(심지어 애벌레까지) 그림이 다양하게 삽입되 있어 도감으로도 손색이 없다. 1989년 범우사에서 출판된 이 책은 나비에 관한 헤세의 단편과 시들은 물론 동판화로 인쇄된 어여쁜 나비들을 볼 수 있는 보물같은 책이다. 희귀함때문에 한편으로는 나 혼자만 알고 싶은 책이기도 했지만 이 책이 재출간되어 더없이 기쁘다.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은 시간이 증명해 주는 것일까.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소중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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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5
빅토르 위고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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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주인공 그윈플레인이 자기보다 훨씬 어린 데아를 발견하는 장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아마 눈 오는 풍경을 묘사한 문학 작품 중에서 이보다 슬프고 아름다운 장면은 없을 것이다.

콤프라치코스(어린이 매매단)에 납치되었다가 버려진 아이 그윈플레인. 앞으로 살아갈 길이 험난할 것을 예고하듯 그 어린아이가 자신을 구해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던 그날은 유난히도 눈이 매섭게 날렸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그웬플레인이 눈밭에서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했을 때 반가움이 더 컸을 것이다. 발자국을 따라가던 그웬플레인은 새끼 양이 우는 듯한 소리를 듣게 된다. 위고는 이보다 ‘폐부를 찌르고 비통하며 약한 것’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발자국이 사라진 곳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려와 하얀 무덤 같은 눈더미가 있었다. 그 속에서 그윈플레인은 입에 눈이 가득한 죽은 여인과 풀어 헤친 그녀의 가슴팍에서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그윈플레인은 아린 손으로 그 아이를 품에 안고 다시 길을 떠난다.

계속해서 문전박대를 당하던 이 불쌍한 두 영혼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늑대와 함께 마차에 살고 있는 우르수스라는 사내였다. 그래서 나는 이 장면이 가장 애틋하게 다가온다. 사회적으로 약자인 그들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모습은 책을 읽는 내내 애잔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알고 보니 데아는 앞을 못 보는 아이였다.)

참고로 이들의 이름은 굉장히 상징적이다. 그윈플레인(Gwynplaine)은 '하얀 평원'(흰색을 뜻하는 gwyn과 평원을 뜻하는 plaine)이란 뜻으로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평원을 가로질러 생환한 사람임을 가리킨다. 데아(Dea)는 '여신'을 뜻하는 라틴어이다. 우르수스는 '곰'이라는 뜻이며 그와 함께 사는 늑대의 이름은 호모, 즉 '인간'을 의미한다.


그윈플레인의 기형적인 얼굴이 조커 캐릭터의 모태가 되면서 유명해졌지만 한동안 <웃는 남자>는 <레미제라블의>의 그늘 아래 있었다. 하지만 출간 삼 개월 전, 위고가 "<웃는 남자>보다 더 나은 작품은 아직 쓰지 못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위대한 작품이고, 귀족사회와 하층민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레미제라블>과도 비견될 만하다. 심지어 상당한 분량의 장편 소설이지만 인내심을 필요로 할 만큼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다. 위고는 역시 대단한 작가!


눈(雪)은 죽은 여인을 비춰 주고 있었다. 겨울과 무덤은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시신이란 인간으로 만든 작은 얼음덩이이다. 벌거숭이 젖가슴은 비장했다. 그 젖가슴은 이미 충실히 봉사했다. 그리고 숨이 끊어진 존재가 준 생명의 숭고한 낙인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위에는 처녀의 순결함 대신 모성의 위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쪽 젖꼭지 끝에 하얀 하나가 얹혀 있었다. 언 젖 한 방울이었다.

우르수스는 어떠한 패거리에도 속하지 않았다. 우르수스는 오직 우르수스와 함께 살았다. 자신과 마주해, 자신을 벗 삼아 살아가는데, 늑대 한 마리가 그곳으로 다정하게 주둥이를 쑤셔 넣었을 뿐이다. 우르수스의 열망은 카리브 지역의 인디언이 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가능해 그는 홀로 사는 사람이 되었다. 홀로 사는 사람은 문명 세계가 용인한 야만인의 축소형이다. 사람이란 떠돌면 떠돌수록 그만큼 더 외롭다. 그것에서 그의 끊임없는 이동이 비롯된다. 어디에 정착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길들여짐으로 여겨졌다. 그는 자신의 길을 계속 가며 생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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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무늬
오정희 지음 / 황금부엉이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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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단편집을 읽은 후에도 나는 오래도록 그녀의 작품을 기다렸다. 어느 날인가, 신간이 나왔다고 해서 찾아보니 소설이 아닌 에세이였지만 오랜 시간 글을 쓰며 살아왔던 작가의 생각이 역시나 정제된 언어로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문학이라는 연결 고리 외에는 그동안 내가 전혀 알 수 없었던 살림하는 여성으로서 겪는 일상의 고단함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가 오정희가 아닌 인간 오정희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해주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오정희 작가처럼 밥하기 싫어서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면서, 그렇게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글을 쓸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을 오랫동안 갖지 못한 채 조리대 옆에 나란히 놓인 책상에서 글을 썼던 작가는 이제 밥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의 소설들은 어떻게 쓰이고 있을까. 워낙 과작(寡作) 하는 작가라 언제 새로운 작품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 식탁 머리맡에서 방금 지은 엄마의 밥을 바랄 때의 심정으로 기쁘게 기다려 봐야지.

"책이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가 되어야 한다"라는 카프카의 글은 제 기억에도 남아있던 것입니다. 그것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직업을 가진 우리 모두의 꿈이겠지요. 거짓 위안과 거짓 희망이 아닌, 진정으로 우리를 비탄에 빠지게 하고 슬퍼하며 그것을 통해 일으켜 세우게 하는 힘을 문학을 통해 구현하고 싶다는 것은, 아무리 세월과 함께 타협하고 자신의 꿈을 낮춰가는 중에도 날카로운 가시처럼 불씨처럼 아프게 남아 있는 초발심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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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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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언제나 일 순위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이었다. 환상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 역시 반복적으로 읽으며 ‘서글픈 언덕’ 할아버지의 인생사에 빠져들곤 했다. 그런데 마르케스가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이 바로 이런 것이다!'라 했을 만큼 이 책의 모티프가 된 중요한 작품이 따로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

절벽 위에 자리한 비밀의 집에 노쇠한 늙은이들이 찾아와 젊은 아가씨와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나 절대 만져서도 안되고 깨워서도 안되며 오직 잠에 취한 젊은 미녀를 바라보는 것만 허락된다. 에구치 역시 밤바다 조심스레 이곳을 찾아와 지난 삶을 회상하며 다섯 번의 밤을 보낸다. 한 쪽에는 삶이 채 피어나지도 않은 아가씨가 잠들어 있고 또 한 쪽에는 삶을 정리하고 있는 노인이 허망하게 누워있다. 함께 존재하지만 그 어떤 관계도 성립되지 않는 참으로 오묘한 만남. 추하다고 생각했던 그 욕망 위에 알 수 없는 연민이 스며든다.

+ 마르케스의 소설에서는 '잠자는 미녀의 집'이라고 했지만 국내에는 '잠자는 미녀'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시적 방종에 불과하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날 오후, 그녀도 고양이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가능한 일일뿐만 아니라, 늙고 외로운 나 자신이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의 것도 사실임을 깨달았다. 즉, 내 고통의 달콤함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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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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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 본명 프랑수아즈 콰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공작부인의 이름을 필명으로 삼았던 그녀는 소설보다 강렬하고 극적인 삶을 살았다.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유명한 일화를 비롯해서, 도박을 즐겨 했고 그로 인해 일확천금을 벌기도 했으며 스포츠카로 스피드를 즐겼지만 대형 교통사고 이후 약물과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 등등.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작품보다 더 부각되기도 하면서 그녀는 프랑스 문단의 악동으로 불리기도 했다.프랑수아즈 사강, 본명 프랑수아즈 콰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공작부인의 이름을 필명으로 삼았던 그녀는 소설보다 강렬하고 극적인 삶을 살았다.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유명한 일화를 비롯해서, 도박을 즐겨 했고 그로 인해 일확천금을 벌기도 했으며 스포츠카로 스피드를 즐겼지만 대형 교통사고 이후 약물과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 등등.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작품보다 더 부각되기도 하면서 그녀는 프랑스 문단의 악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프랑수아 모리악이 ‘사랑스러운 괴물’이라고 묘사한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앙드레 지드, 마르셀 프루스트, 랭보를 좋아하는 그녀의 문학적 성향에 공감하고 나서부터다. <슬픔이여 안녕> 보다 이 에세이가 훨씬 나은 것 같다. (번역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지만.)

프랑수아 모리악이 ‘사랑스러운 괴물’이라고 묘사한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앙드레 지드, 마르셀 프루스트, 랭보를 좋아하는 그녀의 문학적 성향에 공감하고 나서부터다. <슬픔이여 안녕> 보다 이 에세이가 훨씬 나은 것 같다. (번역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은 진정 지상의 아름다움이었다.
문학이야말로 전부인 것이다.
가장 위대한, 가장 비도한, 운명적인 것
그리고 그러함을 안 이상 달리해야 할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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