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방 동문선 문예신서 326
롤랑 바르트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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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A Portrait of Louise Fain by Alexander Gardner(1821-1882, USA, Photographer)


그는 죽었다. 그리고 죽을 것이다. 1865년, 젊은이 패인은 미국의 국무장관 시워드의 암살을 기도했다. 알렉산더 가드너가 독방 감옥에서 그의 사진을 찍었다. 패인은 교수형을 기다리고 있다. 그 사진은 아름답고 청년도 역시 아름답다. 그의 죽음은 곧 실현될 것이고, 또 실현되었다라는 사실을 동시에 읽는다. 나는, 공포를 느끼면서 죽음이 걸려 있는 전미래(前未來, futuranterieur)를 바라본다. 사진은 나에게 그 포즈의 절대 과거(부정과 거)를 보여줌으로써 미래의 죽음을 말해준다. 나를 찌르는 것, 그것은 이 과거와 미래의 등가 관계의 발견이다.


구스타프 말러는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음악이 미래라는 시간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진에는 분명히 시간이 있다. 루이스 패인(Louise Fain)의 초상이 그렇다. 이제 곧 죽음을 앞둔 한 청년의 초상 사진을 두고 롤랑 바르트는 '전미래'라는 시제로 설명한다. 그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없으므로. (어떤 푼크툼으로 다가올지 실제로 보면 어떨까 궁금했었는데 델피르 전시장에서 그와 마주치자 기분이 이상했다. 허공을 향한 불안한 눈빛, 마지막 삶이 떨리고 있다. 이제 곧 사형대에 오를 그의 나이는 스물두 살. 우연히 예술의 길로 들어섰던 로베르 델피르의 나이도 스물두 살이었다. 두 청춘의 극과 극인 인생을 한 공간에서 느낀 날.)

'사진에 관한 노트'라는 부제가 붙는 이 책은 1998년 열화당에서 <카메라 루시다>라는 제목으로, 2006년 동문선에서 <밝은 방>으로 출판되었다. 틀에 박힌 현학적인 비평이라기보다는 사진에 관해 새롭게 눈 뜨게 해주는, 그런 글이다. 시간, 언어, 의식, 기억, 죽음에 관한 수사학적인 관점도 흥미롭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끄럽지 못한 번역은 여전히 아쉽기만 하다.


나는 울지 않는다. 그뿐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내가 잃어버린 것은(‘어머니’라는) 하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의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특질, 하나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무엇이다. 나는 ‘어머니’ 없이 살게 되었지만(우리는 조만간에 모두 그렇게 된다), 그 후 내게 남겨진 삶은 확실하게 그리고 끝끝내, 규정지을 수 없는 것(특질 없는 것)으로 남아야 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내게 큰 의미로 다가왔던 것은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대한 진혼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사별한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단절... 사진은 순간을 재현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과거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영속성이 존재하기도 한다. 죽음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는지.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영원히 사라지려 하는 것은 바로 보물과도 같은 사랑이라고. 왜냐하면 내가 죽은 뒤 그 누구도 그 사랑을 증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무심한 ‘자연’만 남을 것이다. 그것은 그다지도 날카롭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에 미슐레는 홀로 자신의 세기에 맞서서, ‘역사’라는 것을 사랑의 ‘항의’라고 생각했다-생명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유행에 뒤떨어진 말이지만, 그 자신의 어휘로는 ‘선’, ‘정의’, ‘화합’이라고 불렀던 것을 영속화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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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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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스탄불을 순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잡하고, 불완전하며 폐허가 된 건물들의 더미이기 때문에 좋아한다.


이러한 이유로 로맹 가리도 이스탄불에 매력을 느꼈다. '류트'였나, 그의 단편 어딘가에서 오르한 파묵과 비슷하게 이야기한다. 나 또한 그토록 번영을 누리던 한 도시가 과거에 묻힌 채 잊히고 있다는 것에 아쉬움과 매력을 동시에 느낀다. 파묵은 이러한 내 마음을 달래 주기라도 하듯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놓으면서 이스탄불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이스탄불의 과거가 개인의 추억과 맞물리면서 다시 찬란하게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파묵의 내밀한 기억을 따라다니면서 이 도시에 만연하다는 '비애'라는 감정에 젖은 채 내가 상상하던 콘스탄티노플 아니, 이스탄불의 이미지를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파묵이 소설가가 아니라 어렸을 적부터 열망하던 화가가 되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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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 마르케스 자서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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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볼륨이라면 시기나 소재별로 나누어 제목을 붙일 법도 한데 무려 700 페이지가 쉼 없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그리고 또 이 정도 볼륨이라면 지루할 만도 한데 손에서 놓을 수 없을 만큼 재미있다. 무턱대고 처음부터 이 자서전으로 시작하기보단 그의 소설들을 어느 정도 끝낸 후에 읽어야만 이 책의 진가를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마르케스의 작품들에 관한 생생한 해설서이다.


사춘기가 될 때까지는 과거를 회고하기보다는 미래를 더 많이 생각하는지라, 내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그 마을은 향수로 인해 이상적으로 미화된 곳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담담하게 그 마을을 기억하고 있었다 (...) 버나드 쇼의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학교 가기 위한 공부 같은 건 중단해야 했다.”라는 구절에 용기를 얻은 나는 언론과 문학에 대해 배우겠다는 필요성은 느끼지 않으면서도 언론인으로, 작가로 살겠다는 무모한 환상을 지닌 채 그 전해에 대학을 자퇴해 버렸다. 그 문제로 다른 사람과 토론할 능력은 없었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내 생각은 단지 내게만 유효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을 관두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있던 마르케스가 어머니에게 이끌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담담하게 기억한다고 했지만 상당히 아름답게 묘사한 ‘아라카타카’와 그런 곳에서 유년을 보낸 그는 아마도 많은 이미지와 이야기를 무의식적으로 수집했을 테고 그것이 문학으로 변형되었을 것이다.


줄담배를 피워대며, 윌리엄 포크너의 <팔월의 빛>을 읽고 있었다. 윌리엄 포크너는 당시 나의 문학적 스승들 가운데 믿음이 가장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


윌리엄 포크너는 마르케스가 가장 존경했던 작가였던 만큼 그에게 많은 문학적 영감을 주었다. ‘요크나파토파(물이 평지에서 천천히 흐른다는 뜻의 인디언 언어)’는 포크너의 소설에 나오는 허구의 마을이다. 마르께스 역시 자신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마을을 만들고 싶어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간 자체보다는 지명에서 오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원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실재 지명인 '아라카타카'를 사용하려 했으나 '바랑키아'(<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배경이 된 곳) 만큼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신화적인 분위기가 나면서 마술적 특성이 있다고 여긴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다. 그것이 바로 ‘마콘도’였다. 마콘도는 마르께스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여 '마술적 사실주의'의 모태를 이루는 문학적 공간이자 기억과 상상의 오묘한 조합으로 탄생한 매력적인 공간이다. <백년의 고독>은 마콘도가 아니었다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작품 아닌가.


마콘도라는 이 농장의 이름은 외할아버지를 따라 처음 여행을 다녔을 때부터 줄곧 내 관심을 끌었다. 이제 어른이 되고 보니 그 이름의 시적 울림을 좋아했던 것이다. 나는 누가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고, 나에게 그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문해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 책 세 권에 등장하는 상상의 마을에 그 이름을 붙였다. 우연히 어느 백과사전에서 그것이 나무의 이름이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꽃도 피지 않고 열매도 맺지 않으며 가볍고 스펀지 같아 카누나 부엌 세간들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세이바 나무와 유사한 열대나무. 나중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통해 탕가니카에 마콘도라 불리는 유목 부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부족 이름에서 나무 이름이 유래했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 하지만 그 문제에 관해 확인해 보지도 않았고 나무를 직접 본 적도 없었다. 사실, 바나나 재배 지역에서 여러 차례 그 나무에 관해 물었으나 내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그런 이름의 나무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다시 읽으며 비교하며 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이러다가는 이 자서전을 결코 끝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저 이야기를 즐기기로 했다. 독자의 기쁨을 한없이 누리게 해주는 그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그 자질을 문학 안에서 가장 잘 구현했다. 그는 오래 사는 법을 일찍부터 알았던 것이다. 문학이라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살았던 마르케스. 그는 항상 이야기하며 삶을 기억했지만 생의 마지막 무렵에는 치매로 인해 점점 기억을 잃어갔다. 그는 동생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기억이 안 난다고 울먹였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한다. 그의 뇌에 무리가 온 것은 평생 동안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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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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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할 수 없는 악동, 모모를 떠올려 본다.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의 출신도, 부모도, 나이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아이. 그런 모모가 들려주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따뜻하고 감동적이다. 우리 사회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쩌면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모아 한 권으로 엮는다면 모모가 원하던 ‘진짜 책'이 되지 않을까. ‘모든 얘기들이 다 담겨 있는 책’을 쓰고자 했던 모모, 그것은 아마도 로맹 가리, 어쩌면 에밀 아자르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준 것은 양탄자 장사로 유명한 하밀 할아버지예요. 그분이 다 가르쳐주셨어요. 지금은 장님이 되었지만요.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의 책을 들고 다녀요. 나도 크면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를 쓰려고 해요.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쓸 때면 늘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를 쓰잖아요. 내가 불쌍한 사람들 얘기를 쓸 때는 누굴 죽이지 않고도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다 쓸 거예요. 그건 누굴 죽이는 것과 같은 힘이 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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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산을 찾아서 - 불멸의 산 생트빅투아르 기행
페터 한트케 지음, 이중수 옮김 / 아트북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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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비평과 밀도 있는 글쓰기로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페터 한트케. 그는 세잔의 작품을 깊이 연구할 정도로 일찍이 ‘아름다움’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세잔이 죽을 때까지 그리고 또 그렸던 그 유명한 산, 생트 빅투아르를 직접 보기 위해 그는 프로방스로 떠났고 그곳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실험한 화가의 뒤를 좇으며 예술을, 그리고 인생을 배운다. 프루스트가 이전의 예술가들을 통해 작가의 소명을 깨달았듯이 페터 한트케 역시 세잔의 산을 통해 문학의 길에 더욱 의미를 두게 되었을 것이다. 세잔과 페터 한트케, 그들이 추구한 것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리기’와 ‘글쓰기’라는 행위의 차이일 뿐.

톨로네 마을보다 산이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그것은 벌거벗은 듯, 모노크롬에 가깝게 묘사되었다. 색채라기보다는 오히려 눈부신 빛에 가깝다. 때때로 구름의 선과 하늘 높이 솟은 산을 혼동할 수도 있다. 그것은 다른 길이다. 첫눈에, 가물거리는 산은 하늘에서 나타난 듯 보이는 데 이 효과는 바위 산자락의 수직으로 떨어진 면으로 강조된다. 바위산은 정지된 순간인 듯하고 수평선을 통해 산의 아랫부분의 지층을 따라 펼쳐진다. 산은 거의 획일적으로 채색된 하늘로부터 공간 속에서 견고한 작은 구조물로 통합되어 흘러나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세잔이 그린 산과 실제 생트 빅투아르 산의 모습은 오로지 서로 다른 형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실제 내 앞에 우뚝 선 생트 빅투아르 산을 보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세잔은 실제 산을 달리 그린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 상상이야말로 훨씬 더 논리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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