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 마르케스 자서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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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볼륨이라면 시기나 소재별로 나누어 제목을 붙일 법도 한데 무려 700 페이지가 쉼 없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그리고 또 이 정도 볼륨이라면 지루할 만도 한데 손에서 놓을 수 없을 만큼 재미있다. 무턱대고 처음부터 이 자서전으로 시작하기보단 그의 소설들을 어느 정도 끝낸 후에 읽어야만 이 책의 진가를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마르케스의 작품들에 관한 생생한 해설서이다.


사춘기가 될 때까지는 과거를 회고하기보다는 미래를 더 많이 생각하는지라, 내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그 마을은 향수로 인해 이상적으로 미화된 곳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담담하게 그 마을을 기억하고 있었다 (...) 버나드 쇼의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학교 가기 위한 공부 같은 건 중단해야 했다.”라는 구절에 용기를 얻은 나는 언론과 문학에 대해 배우겠다는 필요성은 느끼지 않으면서도 언론인으로, 작가로 살겠다는 무모한 환상을 지닌 채 그 전해에 대학을 자퇴해 버렸다. 그 문제로 다른 사람과 토론할 능력은 없었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내 생각은 단지 내게만 유효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을 관두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있던 마르케스가 어머니에게 이끌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담담하게 기억한다고 했지만 상당히 아름답게 묘사한 ‘아라카타카’와 그런 곳에서 유년을 보낸 그는 아마도 많은 이미지와 이야기를 무의식적으로 수집했을 테고 그것이 문학으로 변형되었을 것이다.


줄담배를 피워대며, 윌리엄 포크너의 <팔월의 빛>을 읽고 있었다. 윌리엄 포크너는 당시 나의 문학적 스승들 가운데 믿음이 가장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


윌리엄 포크너는 마르케스가 가장 존경했던 작가였던 만큼 그에게 많은 문학적 영감을 주었다. ‘요크나파토파(물이 평지에서 천천히 흐른다는 뜻의 인디언 언어)’는 포크너의 소설에 나오는 허구의 마을이다. 마르께스 역시 자신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마을을 만들고 싶어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간 자체보다는 지명에서 오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원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실재 지명인 '아라카타카'를 사용하려 했으나 '바랑키아'(<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배경이 된 곳) 만큼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신화적인 분위기가 나면서 마술적 특성이 있다고 여긴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다. 그것이 바로 ‘마콘도’였다. 마콘도는 마르께스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여 '마술적 사실주의'의 모태를 이루는 문학적 공간이자 기억과 상상의 오묘한 조합으로 탄생한 매력적인 공간이다. <백년의 고독>은 마콘도가 아니었다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작품 아닌가.


마콘도라는 이 농장의 이름은 외할아버지를 따라 처음 여행을 다녔을 때부터 줄곧 내 관심을 끌었다. 이제 어른이 되고 보니 그 이름의 시적 울림을 좋아했던 것이다. 나는 누가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고, 나에게 그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문해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 책 세 권에 등장하는 상상의 마을에 그 이름을 붙였다. 우연히 어느 백과사전에서 그것이 나무의 이름이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꽃도 피지 않고 열매도 맺지 않으며 가볍고 스펀지 같아 카누나 부엌 세간들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세이바 나무와 유사한 열대나무. 나중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통해 탕가니카에 마콘도라 불리는 유목 부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부족 이름에서 나무 이름이 유래했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 하지만 그 문제에 관해 확인해 보지도 않았고 나무를 직접 본 적도 없었다. 사실, 바나나 재배 지역에서 여러 차례 그 나무에 관해 물었으나 내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그런 이름의 나무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다시 읽으며 비교하며 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이러다가는 이 자서전을 결코 끝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저 이야기를 즐기기로 했다. 독자의 기쁨을 한없이 누리게 해주는 그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그 자질을 문학 안에서 가장 잘 구현했다. 그는 오래 사는 법을 일찍부터 알았던 것이다. 문학이라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살았던 마르케스. 그는 항상 이야기하며 삶을 기억했지만 생의 마지막 무렵에는 치매로 인해 점점 기억을 잃어갔다. 그는 동생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기억이 안 난다고 울먹였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한다. 그의 뇌에 무리가 온 것은 평생 동안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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