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천규석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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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유목주의’가 대세다. 광고에서도 유목민을 칭하며 그 사이에 동참하라고 하는가 하면 칭기스칸이 새로이 주목받으며 유목민의 힘이 언급되고 있다. 경영, 인문, 철학 분야를 막론하고 책들 사이에서도 유목민을 언급한 것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생활에서는 디지털과 맞물려, 사상에서는 가타리와 들뢰즈의 사상과 맞물려, 문자 그대로 유목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그 과정을 생각해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갑작스럽게 대세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즉, 비판의 과정도 없이 수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옹골진 농사꾼 천규석의 일침이 따끔하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목주의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인 천규석은 무비판적인 수용을 넘어서 비판을, 비판을 넘어서 거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목주의는 신자유주의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며 그것은 이 땅의 농사꾼들, 나아가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모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유목주의가 사람들을 길거리에 내몬다는 건 무슨 뜻인가? 천규석은 요즘 주목받는 가타리와 들뢰즈의 사상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 사상이 “특정한 삶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창조적인 삶과 자아를 탐구, 모색하게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이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유목복고주의에서 평화의 냄새가 아니라 칼과 피 냄새를 맡는다는 천규석은 “이동마인드가 본질인 그들의 유목주의는 오늘날의 초국적 자본의 세계시정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견은 일견 타당하다. 사상은 사상 그대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인간들 사이에서 쓰임새를 갖고 나타나는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가타리와 들뢰즈의 사상들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천규석은 유목주의가 욕망을 절대화하는 경향에 비해 다른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새로이 주목받는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에 시각이 대표적인 것일 게다. 천규석은 요즘 유목주의를 찬양하는 시각을 칭기스칸의 몽골제국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무슨 말인가?


유목민들은 농민의 것을 약탈한다.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고 칭기스칸도 예외는 아니다. 어찌 보면 칭기스칸은 사상 최고의 약탈자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칭기스칸이 아무리 동서양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을 했다 치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고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요인이다. 칭기스칸의 약탈에 혜택을 본 이는 소수의 유목민 세력일 뿐, 우리의 선조를 포함한 절대 다수의 정주민들, 특히 약탈당하고 살육당한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칭기스칸을 유목주의에 결부시켜 좋아하고 있다는 말이니 비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천규석은 나아가 이러한 일이 과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공공연하게, 아니 노골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오늘날에는 무엇이 있는가? 몽골제국을 대신하는 시장제국주의가 있고 신자유주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 채 유목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그것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천규석의 말은 날카롭다. 농민들의 쌀 개방을 반대하면서도 유목주의를 좋아하던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이들이 부끄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천규석은 유목주의를 낭만적으로 생각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농민들 죽어가고, 나라 죽어가니 정신 차리라고 말이다. 유목주의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경직화된 학생운동과 권력화 하는 시민운동 등 ‘꼴불견 세상’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 또한 경청해마지않을 것들이다. 더욱이 그것들은 ‘머릿속’이 아니라 농사꾼의 실제 경험담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견에 무게를 실어줄만하다.


그 동안 유목주의를 비판한 글은 드물었다. 하지만 천규석은 열불을 못 참아 쓴 글이라고 밝힌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서 과감하게 그것을 끄집어냈고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이 생활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인가? 어조가 격정적일수록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직면하게 되리라. 신자유주의로서의 유목주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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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64)

최근에 나온 책들이 부쩍 많아진 건 아니고, 그냥 몇 권의 평전 류들이 눈에 띄어서 정리해둔다. 당장에 구입하거나 읽을 책들이 아니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운 탓에 몇 마디 '신소리'를 해두는 것이다. 여우처럼.  

첫번째 책은 '자유로운 여자, 삶과 전설'이란 부제를 가진 <루 살로메>(해냄, 2006)이다(가운데 표지는 작년 가을에 나온 러시아본). 저자는 잡지 <엘르>의 편집장과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 등을 역임한 걸출한 여성 언론인 프랑수아즈 지루(1916-2003)이다(지루의 책으론 <나는 행복하다> 등이 소개돼 있다). 원저가 2002년에 나온 것으로 돼 있으니까 그녀의 유작이지 않을까 싶은 책인데, 루(1861-1937)나 지루나 모두 당대를 풍미했던 여성의 대명사로서 손색이 없다. 저자가 '루 살로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데, 230쪽 정도의 분량이니까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도'는 아니므로 단숨에 읽어볼 만하다.

책의 부록으로는 루가 자신의 '연인들'이었던 니체, 릴케, 프로이트와 교환한 편지들이 발췌돼 있는 듯한데, 이 또한 흥미로운 자료가 될 듯하다. '루 살로메'를 전설적인 여인으로 만들어준 이 세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권의 책들이 나와 있다. 지루의 책이 좋은 반응을 얻어낸다면, 마저 소개될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절판된 걸로 나오지만, 비교적 최근에 나온 루의 책으론 <선택된 자들의 소망>(투영, 2000)을 기본도서로 들어야겠다. 소개를 옮겨보면, "'한 남자가 루와 정열적으로 교제할 수 있다면 9개월 후쯤 그 남자는 한 권의 책을 저술할 수 있다'는 말의 주인공인 루 살로메. 그러나 스스로 훌륭한 작가이자 정신상담가이기도 했던 그녀의 중편소설과 산문들을 모은 책으로 광범위하고 신선한 살로메의 지적세계를 알게 한다." '선택된 자들의 소망'은 그 중편소설의 제목이다. 책에는 루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나와 니체', '나와 릴케', '나와 프로이트'가 실려 있으므로 유익한 참고자료도 겸한다. 릴케 사후에 그녀가 릴케에 관하여 쓴 책 <하얀 길 위의 릴케>(모티브, 2003)는 아직 구할 수 있는 책이다. 릴케의 <소유하지 않는 사랑>(고려대출판부, 2003)과 짝이 될 만한 책이므로 같이 읽으면 좋을 것이다. 루 살로메, 그리고 루와 릴케에 대한 짧은 설명은 '클라시커 50' 시리즈의 <여성>과 <커플>에서 읽어볼 수 있다.

두번째 책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시드니 셀던(1917- )의 자서전 <또 다른 나>(북앳북스, 2006)이다. 그의 책들은 "180여개국에서 5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2억 8천만부가 넘게 팔렸다"고 하니까 이 '대중문학의 거장'은 '직업작가'들의 우상이자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하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의 소설을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지만, 그의 작품들이 워낙에 많이 드라마화, 영화화되었기에 '친숙한' 작가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게다가 인상도 좋지 않은가?). 아래 사진은 1999년에 나온 시드니 셀던 기념 우표(시트).

소개에 따르면, "시드니 셀던은 약국 배달부로 일하던 열일곱의 나이에 자살을 결심하고, 이를 만류하던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생애에서 가장 지독하고 처절했던 바로 그 순간의 회고에서부터 시작되는 <또 다른 나>는, 그 누구보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았던 시드니 셀던의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취향이 다소 '고약한' 나는 그의 소설들보다 이런 자서전에 더 끌린다.

 

 

 

 

내게 이름이 친숙한 셀던의 책들은 <천사의 분노>, <악마의 유혹> 등인데, 요즘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책은 <텔미 유어 드림>(북앳북스, 2000)인 모양이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이지만, 셀던의 책들은 자서전을 낸 '북앳북스'와 '문학수첩리틀북스'(셀던의 독자층이 주로 청소년인 모양)에서 거의 전담하고 있는 듯하다. 전담하는 만큼 고른 수준을 갖춘 양질의 번역서들이 계속 나올 것으로 기대해본다(청소년 권장 도서인지는 의문이지만).

 

 

 

 

세번째 책은 미국의 철학자이자 초인격심리학자 켄 윌버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한언출판사, 2006). 지난 주 언론의 북리뷰란을 보고 알게 된 책인데, 켄 윌버와 그의 아내 트레야의 사랑과 아내의 (5년 동안의) 유방암 투병기,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 등이 담겨 있는 책이다.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로도 읽히지만(줄거리만으로도 딱 '우리 드라마'이다) 실화이며, 영성(靈性)학자 켄 윌버 입문서로도 적합해 보인다. 아래는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

책에서 두 사람은 "특유의 방대한 지식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질병에 대한 일반적 접근과 뉴에이지적인 접근 모두에 의문을 던지며 철학, 심리학, 종교적 해석을 더하고 있다"고. 개인적으론 윌버를 '뉴에이지 사상가' 정도로 분류하고 있었는데, 혹 편협한 선입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이 맞다면, '켄 윌버'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김상일 교수의 책에서였다(김교수는 켈 윌버를 최고의 현역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았다). <수운과 화이트헤드>(지식산업사, 2001)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풀어본 원효의 판비량론>(지식산업사, 2003), <한의학과 러셀역설 해의>(지식산업사, 2005) 등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이지만, <러셀 역설과 과학 혁명 구조>(솔출판사, 1997)는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카오스와 문명>(동아출판사, 1994)은 좀 '허한' 책이었고.

 

 

 

 

네번째 책은 '영성'과는 다소 무관한 철학자 네그리의 대담집 <귀환>(이학사, 2006)이다. 지난 2001년에 출간된 <제국>으로 전세계 사상가에 한 차례 태풍을 몰고 왔던 이 이탈리아의 골수 좌파 철학자의 책들은 꾸준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다. <혁명의 시간>, <혁명의 만회>, <전복적 스피노자> 등의 제목들만으로도 그의 철학적 주제가 자나깨나 '혁명'에 놓여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바, 이 '혁명'은 맑스주의의 캐치프레이즈이면서 (이론으로서의 혁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대담 형식의 자서전에서 "네그리는 자신의 삶과 사상을 요약하는 핵심어들을 A부터 Z까지 알파벳순으로 따라가며 자신의 가족사와 성장 배경에 대해, 그에게 지적으로나 인간적으로 큰 영향을 준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그의 사상과 실천의 자양분이 되었던 정치 격변기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네그리 입문서로 적합해 보인다.

국내 필자들의 네그리 입문서로는 조정환의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와 윤수종의 <안토니오 네그리>(살림, 2005)가 있다. 전자는 무겁고, 후자는 가볍다(책의 무게가). 편한 쪽으로 구해잡으면 되겠다. 국외서로는 보론(Atilio A. Boron)의 <제국과 제국주의>(Zed Books Ltd, 2005) 정도가 신간이다. 160쪽 분량인데, 국내에 네그리주의자들이 많은(?) 만큼 벌써 번역중인 책인지도 모르겠다. 네그리/하트의 <제국>에 대한 비판적인 리뷰를 포함하고 있는 지젝의 책도 조만간 출간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네그리의 시간'을 따로 내보려 한다면 참고하시길.

 

 

 

 

끝으로 따로 소개가 필요없는 책이지만,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이자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1947-1990) 변호사의 일생을 다룬 안경환 교수의 <조영래 평전>(강, 2006). "조영래 변호사의 대학 1년 후배인 서울법대 안정환 교수가 5년여의 준비 끝에 펴낸 이 책은 고인의 사후에 나온 최초의 평전이다."(청소년을 위한 현대인물사 시리즈의 <조영래>가 있긴 했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의 특징은 "첫째, 조영래를 통해 격동기 한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 있"고, "둘째, 조영래의 삶에서 서울대 법대가 차지하는 자리에 특별한 관심과 무게를 두고 있"으며, "셋째, '인권변호사, '공익변호사'로서 조영래의 활동을 가장 높게 평가"하고 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망원동 수재 사건', '여성 조기 정년제 사건' 등을 변론하는 과정에서 조영래가 보여준 열정과 치밀함을 감동적인 필치로 옮기고 있다"니까 우리가 살아온 '현대사'의 증언자료로서도 의미가 있겠다. 

한편, 그가 쓴 <전태일 평전>(돌베개, 1983/2001)은 전태일의 누이 전순옥 박사에 의해 영역되기도 했다. 'A Single Spark'(돌베개, 2003)가 그것인데,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을 바로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다(영화의 영어제목이기도 하고). 그 영화에 나오는 교내 시위 장면 촬영 현장을 바로 옆에서 보던 기억이 새롭다. 박광수 감독의 이 영화에서 아마도 가장 공을 들였을 법한 장면은 60-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현장이다. "전태일은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비인간적 노동환경에서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노동운동에 눈떠간다. 노동법에는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으나 법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 앞에 분신자살로 경종을 울린다. 1970년의 일이다."



엊그제 잠시 읽은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2>에서 저자는 전태일의 분신과 3년전 자살한 한 대학강사의 죽음을 비교하면서(그는 내 친구였다) '지식산업 사회'의 역군이라는 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30여년전 '시다'들의 열악한 삶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굳이 그렇게 일러주지 않아도 다 아는 바이거늘, 꼭 그런 식으로 대놓고 얘기할 건 뭐란 말인가? 박노자는 한국인으로서의 '교양'이 아직 좀 부족하다. '너도 시다지?'라고 몰상식하게 묻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오늘도 헐값의 '박음질'을 해놓고 보니까 괜히 부아가 나는군(이렇게 투덜거리면 그 친구도 웃어주곤 했는데).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06. 0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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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귀환:네그리의 삶-정치에 대한 자생적 대담
귀환 - 네그리가 말하는 네그리, 안느 뒤푸르망텔과의 대화
안토니오 네그리.안느 뒤푸르망텔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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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상화에 대하여:얼굴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선, 책의 겉표지에 실린 네그리의 초상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그동안 국내에 네그리에 관련된 저서들이 많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우리는 그의 얼굴이 직접적으로 제시된 서적을 살펴볼 수 가 없었다.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작년 말에 출간된 그의 스피노자에 대한 저서, {전복적 스피노자}에 실린 스피노자와 묘하게 중첩되어 전혀 새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의 케리커쳐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초상화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카락, 날카롭지만 서글서글함을 간직한 눈매, 그리고 굳게 담고 있어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신비한 삶의 미소를 담고 있는 듣한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안경. 이것은 이 시대 가장 위대한 맑스주의 이론가-실천가인 '네그리'의 초상이다. 이렇듯, 사람의 얼굴이 들뢰즈/가타리가 말한것처럼 하나의 의미화와 주체화의 이중적인 작용으로 얽힌 하나의 표현기계라고 한다면, 네그리의 얼굴성 또한 어떤 특이성들을 분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들뢰즈/가타리는 얼굴성을 권력, 자본주의의 문제와 연관시켜 사유하지만, 나는 조금 소심하게 네그리의 얼굴에서 어떤 삶에 대한 기록들을 읽어내려한다. 그것은 삶에 대한 수많은 의미들이 층층히 쌓여 나타난 어떤 평면과도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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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지점: 초기 근대 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2
미란 보조비치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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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라깡학파 철학자인 미란 보조비치의『암흑지점: 초기 근대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를 읽으면서 머리 속에 맨 먼저 떠올린 단어는 단연코 프로이트의‘섬뜩함uncanny’이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철학사와 철학자들을 읽어내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보조비치의 필치 아래에 놓인 철학자들-데카르트, 스피노자, 흄, 라이프니쯔, 말브랑슈, 벤섬-의 근엄하고도 경건한 초상은,『암흑지점』의 중요한 철학자인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적 명상의 대상인 아담과 같은 허구적 창조물처럼, 왜 저리도 기괴하면서 또 낯설게 보이는가? 물론 나는 지젝을 통해서 칸트와 헤겔이 어떻게 다시 멋진 창조물로 태어나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정말 그랬던가? 그 익숙함과 친근함은 또다시 섬뜩한 불길함으로 바뀌고 있다. 갑자기 내가 바라보는(looking) 저 경건한 기독교 철학자들의 초상이 이제 음산한 이교도의 형상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gazing). 나는 이 응시의 포획에서, 덫에 걸려 절망을 재촉하는 짐승처럼,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보조비치가 서술한 저 철학자들의 섬뜩한 응시의 암흑지점(an utterly dark spot) 앞에서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누가 당신에게 후근대적 사유에서 철학사와 철학자들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읽어냈던 철학자들 중 단 한 사람만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당신의 검지손가락은 질 들뢰즈를 가리킬 것이다. 그는 칸트의 등에 업혀 계간(鷄姦)하는 방식으로 칸트로부터 전혀 괴물스러운 철학적 창조물들을 만들어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 말은 들뢰즈 자신이 애호했던 철학자들-흄,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니체-에게도 그대로 해당하는 사항일 것이다. 이제 슬로베니아 라깡 학파의 철학자들은 들뢰즈와 또 다른, 하지만 더 섬뜩한 방식으로 고전 철학자들의 비밀스러운 사생아를 만들고 있다.

만일 당신이『에티카』를 읽었다면, 그리고 알튀세르, 들뢰즈나 네그리를 따라서 스피노자를 읽고 좋아한다고 말하면, 당신은 혹시 이 구절도 기억하고 있는가.“만일 어떤 자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상상하며, 더욱이 자기는 사랑받을 아무런 원인도 부여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는 응답으로 그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스피노자,『에티카』3부, 정리 41)『암흑지점』의 제 3장,「첫 눈에 앞서」는 바로 스피노자의 이 구절에 기초하여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불일치를 통해 역설적으로 발생하는 사랑의 숭고한 순간을 말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는 라캉의 사랑론의 선구자로 등록한다. 라캉에게 사랑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주체로의 자리바꿈을 통해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되돌려주는 행위가 아니었던가. 아마도 스피노자는 이 점에서 라캉에게 필시 동의했으리라. 그리고 보조비치의 가르침을 따라 당신은『에티카』의 제 3부를‘사랑과 증오의 도착(판본)=(per)version’으로 다시 읽을 수 있으리라.

지젝이『암흑지점』의 서문에서 보조비치의 책이 후근대성의 사회정치적 교착들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읽힐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때, 당신은 보조비치의 철학적 서술이 근대 초창기의 철학자들에게 맞춰져 있으면서도 후근대적 사회의 여러 문제의 틀들을 넌지시 암시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암흑지점’은 바로 근대의 신체가 투명한 연장된 사물로 환원되면서 필수 불가결하게 남겨졌던 잔여(remainder)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근대의 신체를 앎과 권력의 대상으로 환원하는 기제는 물론 특권화된 시선(look)이며, 보조비치는 서구의 초기 근대철학사에 흩어져있는 세부적인 응시(gaze)의 장면들을 곳곳에 펼쳐놓으면서 근대적 시선(신체를 데카르트적 연장된 사물로 환원시키는 권력기제)이 그 한계를 드러내는 맹점, 암흑지점을 탐사한다. 이 잔여, 혹은 암흑지점은『암흑지점』에서‘숭고한 신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무엇이다.『암흑지점』에서 기술되는 모더니티는 보조비치의 서술 아래에서 우리가 포스트모더니티라고 말할 수 있는 증후(symptom)를 분출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프로이트의‘섬뜩함uncanny’(혹은 라깡의‘외밀함extimate’)에 대한 슬로베니아 라깡학파의 또 다른 인물인 믈라덴 돌라르의 논문을 읽다가 나는 벤섬에 관한 보조비치의 서술 속에서 벤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어떤 사람에 대한 그 어떤 유사물, 그 어떤 그림, 그 어떤 조상이라 한들, 그가 자기-아이콘이라는 자격에서 그 자신에게 그러한 것만큼 그를 닮을 수 있겠는가. 동일성이 유사성보다 더 낫지 않은가?”이 구절은 사물 그 자체야말로 그것 자체의 가장 적합한 외양, 재현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아마도 당신은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폭파사건을 경악과 동시에 불길하고도 섬뜩한 응시로 그 자리에서 붙박인 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을 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마치 영화같아”라고 반응한 적이 있다. 바로 여기에서 당신과 나는 사물이 그것 자체의 가장 적합한 외양을 제공해주는 놀라운 사례를 본 것은 아닌가. 어떤 서구의 예술가가 불경스러운 어조로 세계무역센터폭파사건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간주한 것은 바로 벤섬의 위 구절이 아니고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뮐라크르의 시대, 증식하는 외양(시뮐라크르, 유사물)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대중화되는 시점에서, 또한 분신(double)이라는 유사물의 섬뜩함에만 놀라워하는 바로 지금에 와서야 나는 하나의 사물(인간)이야말로 그 자체로 가장 섬뜩하다는 진실에 접하게 되었다. 나는 필시 저 어리석고 무능한 바보 연인, 사랑하는 X를 마음에 둔 채 X를 가장 잘 닮은 여자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었던 히치콕의 <현기증Vertigo>의 주인공인 스코티‘같은’남자는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를 가장 잘 재현할 수 있는 남자는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조비치의『암흑지점』으로 돌아가 말하면, 이 책의 주제에 해당하는 철학자들의 섬뜩한 초상, 그야말로 나에게는 악마적인 분신으로만 보였던 이 철학자들의 초상은, 본래 그 자신들의 사상의 가장‘외밀한’지점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모더니티는 그것의 가장‘외밀한’지점에서 포스트모던하다는 강렬한 역설. 보조비치의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은 이처럼 무수하다.

이제 당신이 보조비치의『암흑지점』을 가장‘외밀한’지점에서 읽어야할 차례가 왔다. 바로 보조비치(스피노자, 말브랑슈, 벤섬 등등) 안에 있는 보조비치(스피노자, 말브랑슈, 벤섬 등등)보다 더한 어떤 것과 대면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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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담유 > 숭고한 로망, 격렬한 소유
소유 -상
앤토니어 수잔 바이어트 지음, 윤희기 옮김 / 미래사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캐나다 출신의 문학이론가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는 《비평의 해부》라는 책에서 ‘로망스(Romance)’란 “경험적 세계를 문제 삼는 소설과 대립되는 개념”, 혹은 “인간 심리의 원형을 다루는 산문 픽션의 한 유형” 등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때 ‘경험적 세계를 문제 삼는 소설’이란 르네상스를 거쳐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양산되기 시작한 서양의 ‘Novel’, 더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리얼리즘 소설을 가리키는 것이라 이해해도 무방하다. 지금 여기서 장르론을 논할 생각은 아니지만, A. S. 바이어트의《소유》를 읽는 데 이 간단한 ‘정의’를 되새기는 작업은 간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과거와 현재 혹은 두 겹의 문학적·지적 사랑 이야기’ 정도로 요약될 가능성이 큰 이 소설을 덮기 전에 적어도 작가가 왜 서두에 호손과 브라우닝을 인용하고 있는지, 그 의도만이라도 짚어봐야 할 것 같다.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로망스라 부른다면, 그는 그 작품의 형식이나 소재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취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일 그가 단순히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그는 그런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그리고 있을 법한 평범한 인간 경험사를 작은 부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충실히 묘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에 로망스라고 하는 것은 ― 그것이 예술 작품인 이상 그런 소설의 법칙을 엄격히 따라야 하고, 또 그것이 인간성의 진실에서 벗어난다면 도저히 용서할 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긴 하지만 ― 어느 정도는, 작가 자신의 선택이나 창조의 범위 안에서 인간 감정의 진실을 충분히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로망스의 범주에 드는 이 이야기의 관점은 지나간 과거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갈 현재를 한데 엮어 보려는 시도에 놓여 있다. ― 나다니엘 호손의 《칠박공의 집》 서문 중에서


바이어트가 인용하고 있는 호손의 글 전문은 위와 같다. 호손의 ‘시도’를 인용, 강조함으로써 ‘로망스’에 주목케 하는 그녀의 의도는 어떤 보편성마저 획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그녀는 호손까지 끌어와 자본주의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세기말 변혁기에 로망스를 이야기하려 했던 것일까.


모두가 사물의 법칙과 사실성과 얼굴을 얘기합니다/ 마치 그것을 소유라도 한 듯이, 자신들의 생각에 적합한 것만을 찾아내고,/ 어울리지 않는 것에는 눈감아버리고, 자신들의 주장만을 기록하고,/ 나머지 것들은 무시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역사입니다. 도마뱀 시대./ ― 로버트 브라우닝의 〈‘거간꾼’ 거짓말 씨〉 일부


부분 인용한 브라우닝의 시 구절이 미약하게나마 길안내를 돕고 있다. 바이어트라는 작가는 진보와 발전, 역사라는 이름에 밀려난, 혹은 저항하는 어떤 정신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 ‘여성’이라는 외피를 두르거나 ‘시적 언어’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그녀가 오로지 이것들만이 옳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렇게나 다성적인 소설을 기획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프라이의 논의로 돌아오자. 12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주류 언어였던 라틴어가 아니라 ‘노만스’라는 방언으로 씌어진 기사들의 황당무계한 무용담이나 연애담을 서사학자들은 ‘로망스’라고 부른다.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기이하고 가공적이면서 모험적인’ 성격을 지니는데, 프라이는 과학의 눈으로 봤을 때 어설퍼서 촌스럽기 짝이 없는(혹은 숭고하기 짝이 없는) 이 이야기 양식을 ‘인간 심리의 어떤 원형을 대변하는 양식’으로까지 승격시키고 있다. 서사 문학의 발전 경로에서 한때 승했다 만 양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필연적인 하나의 공시적 특성이자 상상적 삶의 무한한 공간으로서 로망스를 위치 짓고 있는 것이다. 바이어트는 이 같은 프라이의 논점을 그대로 계승할 뿐만 아니라 여성적 관점에서 특유하게 로망스를 규정하고 있다.


그녀는 역사적 진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시적, 상상적 본질에 바탕을 둔 요정에 관한 서사시를 쓰고 싶다고 하였다. ―마치 스펜스의 《페어리 퀸》이나 아리오스트의 작품처럼 역사와 현실의 모든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로망스가 여성에게는 가장 적절한 문학 양식인 것 같다고 했다. 여성이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가장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로망스라는 얘기였다. 비록 이 세상의 영역은 아니지만 마치 셍 섬이나 시드처럼 말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하길, 여성이 지닌 두 가지 본성이 조화롭게 화해될 수 있는 형식이 로망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두 가지 본성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녀는 남성들이 여성을 이중적 존재로 본다고 하면서 그것은 마녀나 악녀로서의 본성과 순진무구한 소녀로서의 본성이라고 하였다. ― 《소유》(하), 277~278.


인용문에서 언급되는 ‘그녀’는 시인으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당대의 인정을 받지 못한 ‘크리스타벨 라모트’를 가리킨다. 그녀의 입을 통해 바이어트는 ‘로망스는 여성의 장르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성차별적’ 선언을 곧이곧대로 읽어 들인다면 《소유》라는 소설의 많은 미덕들을 놓치고 말 것이다. 작가가 로망스를 진실이 되어버린 역사적 사실의 대척점에 세워두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염두에 둔다면, 시적·상상적 본질이 제거된 현대의 궁핍한 이야기 양식에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나아가 마녀와 소녀라는, 여자의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본성처럼 모순과 역설로 점철된 인간 세계의 실재를 선형적 역사는 결코 담아낼 수 없다는 좀더 확장된 인식까지 포함하고 있다.


로망스란, 서사시란, 과거로의 회귀를 선호하는 저자의 개인적 취향이 담긴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역사 서술과 역사 서술을 닮아가는 서사 문학의 반성적 척도로 기능한다. 또한 그녀에게 로망스는 “서로 상충하는 신념과 욕망과 언어와 분자의 체계로 이루어진 일관성 없는 자아”(하, 466)의 처소이며, “고독”이라는 “보물”, 그 자신이 소유한 것 가운데 “최고의 것”(상, 286)이 숨쉬고 있는 내성(內城)이다. 혼란 그 자체라 할 만한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들인 라모트와 애쉬 간의 연서(戀書)는 그 처소에서 씌어진 일종의 ‘경계선’이다. “성채”나 “요새”로 상징되는 “두 세계의 경계”(하, 529)는 방해나 침입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의 소통, 하나의 대화가 된다. 이 “로망스의 플롯”이 “천박한 현실에 거주하는 동시에 고귀한 로망스 안에 있”는 존재들을 통제한다(하, 376).


마법이 속임수로 둔갑하고 종교가 역사로 대체되며 신비가 과학에 자리를 내준 시대,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존재들의 끊임없는 형태 전환의 생명력”(하, 44) ― 즉 일종의 ‘로망’ ― 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작가는 빅토리아 시대가 내장하고 있었던 “사물들을 홀로 내버려둘 수가 없”(상, 371)는 ‘시적 언어’ 혹은 ‘상상적 언어’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말도 빼놓지 않는다. “세상엔 단일한 에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우리는 서로 얽혀 있는 갈등의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하, 62)! 분별 있는 독자라 할 만한 20세기 문학 연구자 모드와 롤랜드는 라모트와 애쉬가 애지중지했던 ‘사랑’을 “의심스러운 이념적 구성 개념”으로 정의하며, (낭만적) 사랑에 대한 욕망마저 지운 “빈방에 깨끗이 비어 있는 침대 하나의 이미지”(하, 66)를 역설적으로 욕망한다. 이를테면 무소유를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변형된 또 하나의 로망이라는 사실을 작가도 알고 독자도 알고 신도(!) 안다. 단, “편지들은 함께 있어야 해요……그것들은 서로서로의 부분들이에요”(하, 478)라는 구절이 암시하는 바처럼, 이 변형된 로망은 충분히 숭고하다. 평정과 무(無)가 가장 극심한 운동인 것처럼, 바이어트의 이 숭고한 로망은 그래서 가장 격렬하다.



* “종교에 대한 충동은 믿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 경이로움을 받아들이는 수용력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상, 338)와 같은 구절은 한 번쯤 꼭 인용해보고 싶었는데 끼워 넣을 자리가 마땅치 않다. 바이어트라는 작가의 널찍한 시야를 확신시켜준 대목. ** 로망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 리뷰는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갱지 한 장만큼이나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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