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담유 > 숭고한 로망, 격렬한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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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상
앤토니어 수잔 바이어트 지음, 윤희기 옮김 / 미래사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캐나다 출신의 문학이론가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는 《비평의 해부》라는 책에서 ‘로망스(Romance)’란 “경험적 세계를 문제 삼는 소설과 대립되는 개념”, 혹은 “인간 심리의 원형을 다루는 산문 픽션의 한 유형” 등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때 ‘경험적 세계를 문제 삼는 소설’이란 르네상스를 거쳐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양산되기 시작한 서양의 ‘Novel’, 더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리얼리즘 소설을 가리키는 것이라 이해해도 무방하다. 지금 여기서 장르론을 논할 생각은 아니지만, A. S. 바이어트의《소유》를 읽는 데 이 간단한 ‘정의’를 되새기는 작업은 간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과거와 현재 혹은 두 겹의 문학적·지적 사랑 이야기’ 정도로 요약될 가능성이 큰 이 소설을 덮기 전에 적어도 작가가 왜 서두에 호손과 브라우닝을 인용하고 있는지, 그 의도만이라도 짚어봐야 할 것 같다.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로망스라 부른다면, 그는 그 작품의 형식이나 소재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취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일 그가 단순히 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그는 그런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그리고 있을 법한 평범한 인간 경험사를 작은 부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충실히 묘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에 로망스라고 하는 것은 ― 그것이 예술 작품인 이상 그런 소설의 법칙을 엄격히 따라야 하고, 또 그것이 인간성의 진실에서 벗어난다면 도저히 용서할 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긴 하지만 ― 어느 정도는, 작가 자신의 선택이나 창조의 범위 안에서 인간 감정의 진실을 충분히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로망스의 범주에 드는 이 이야기의 관점은 지나간 과거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갈 현재를 한데 엮어 보려는 시도에 놓여 있다. ― 나다니엘 호손의 《칠박공의 집》 서문 중에서
바이어트가 인용하고 있는 호손의 글 전문은 위와 같다. 호손의 ‘시도’를 인용, 강조함으로써 ‘로망스’에 주목케 하는 그녀의 의도는 어떤 보편성마저 획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그녀는 호손까지 끌어와 자본주의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세기말 변혁기에 로망스를 이야기하려 했던 것일까.
모두가 사물의 법칙과 사실성과 얼굴을 얘기합니다/ 마치 그것을 소유라도 한 듯이, 자신들의 생각에 적합한 것만을 찾아내고,/ 어울리지 않는 것에는 눈감아버리고, 자신들의 주장만을 기록하고,/ 나머지 것들은 무시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역사입니다. 도마뱀 시대./ ― 로버트 브라우닝의 〈‘거간꾼’ 거짓말 씨〉 일부
부분 인용한 브라우닝의 시 구절이 미약하게나마 길안내를 돕고 있다. 바이어트라는 작가는 진보와 발전, 역사라는 이름에 밀려난, 혹은 저항하는 어떤 정신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 ‘여성’이라는 외피를 두르거나 ‘시적 언어’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그녀가 오로지 이것들만이 옳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렇게나 다성적인 소설을 기획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프라이의 논의로 돌아오자. 12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주류 언어였던 라틴어가 아니라 ‘노만스’라는 방언으로 씌어진 기사들의 황당무계한 무용담이나 연애담을 서사학자들은 ‘로망스’라고 부른다.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기이하고 가공적이면서 모험적인’ 성격을 지니는데, 프라이는 과학의 눈으로 봤을 때 어설퍼서 촌스럽기 짝이 없는(혹은 숭고하기 짝이 없는) 이 이야기 양식을 ‘인간 심리의 어떤 원형을 대변하는 양식’으로까지 승격시키고 있다. 서사 문학의 발전 경로에서 한때 승했다 만 양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필연적인 하나의 공시적 특성이자 상상적 삶의 무한한 공간으로서 로망스를 위치 짓고 있는 것이다. 바이어트는 이 같은 프라이의 논점을 그대로 계승할 뿐만 아니라 여성적 관점에서 특유하게 로망스를 규정하고 있다.
그녀는 역사적 진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시적, 상상적 본질에 바탕을 둔 요정에 관한 서사시를 쓰고 싶다고 하였다. ―마치 스펜스의 《페어리 퀸》이나 아리오스트의 작품처럼 역사와 현실의 모든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로망스가 여성에게는 가장 적절한 문학 양식인 것 같다고 했다. 여성이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가장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로망스라는 얘기였다. 비록 이 세상의 영역은 아니지만 마치 셍 섬이나 시드처럼 말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하길, 여성이 지닌 두 가지 본성이 조화롭게 화해될 수 있는 형식이 로망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두 가지 본성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녀는 남성들이 여성을 이중적 존재로 본다고 하면서 그것은 마녀나 악녀로서의 본성과 순진무구한 소녀로서의 본성이라고 하였다. ― 《소유》(하), 277~278.
인용문에서 언급되는 ‘그녀’는 시인으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당대의 인정을 받지 못한 ‘크리스타벨 라모트’를 가리킨다. 그녀의 입을 통해 바이어트는 ‘로망스는 여성의 장르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성차별적’ 선언을 곧이곧대로 읽어 들인다면 《소유》라는 소설의 많은 미덕들을 놓치고 말 것이다. 작가가 로망스를 진실이 되어버린 역사적 사실의 대척점에 세워두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염두에 둔다면, 시적·상상적 본질이 제거된 현대의 궁핍한 이야기 양식에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나아가 마녀와 소녀라는, 여자의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본성처럼 모순과 역설로 점철된 인간 세계의 실재를 선형적 역사는 결코 담아낼 수 없다는 좀더 확장된 인식까지 포함하고 있다.
로망스란, 서사시란, 과거로의 회귀를 선호하는 저자의 개인적 취향이 담긴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역사 서술과 역사 서술을 닮아가는 서사 문학의 반성적 척도로 기능한다. 또한 그녀에게 로망스는 “서로 상충하는 신념과 욕망과 언어와 분자의 체계로 이루어진 일관성 없는 자아”(하, 466)의 처소이며, “고독”이라는 “보물”, 그 자신이 소유한 것 가운데 “최고의 것”(상, 286)이 숨쉬고 있는 내성(內城)이다. 혼란 그 자체라 할 만한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들인 라모트와 애쉬 간의 연서(戀書)는 그 처소에서 씌어진 일종의 ‘경계선’이다. “성채”나 “요새”로 상징되는 “두 세계의 경계”(하, 529)는 방해나 침입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의 소통, 하나의 대화가 된다. 이 “로망스의 플롯”이 “천박한 현실에 거주하는 동시에 고귀한 로망스 안에 있”는 존재들을 통제한다(하, 376).
마법이 속임수로 둔갑하고 종교가 역사로 대체되며 신비가 과학에 자리를 내준 시대,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존재들의 끊임없는 형태 전환의 생명력”(하, 44) ― 즉 일종의 ‘로망’ ― 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작가는 빅토리아 시대가 내장하고 있었던 “사물들을 홀로 내버려둘 수가 없”(상, 371)는 ‘시적 언어’ 혹은 ‘상상적 언어’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말도 빼놓지 않는다. “세상엔 단일한 에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우리는 서로 얽혀 있는 갈등의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하, 62)! 분별 있는 독자라 할 만한 20세기 문학 연구자 모드와 롤랜드는 라모트와 애쉬가 애지중지했던 ‘사랑’을 “의심스러운 이념적 구성 개념”으로 정의하며, (낭만적) 사랑에 대한 욕망마저 지운 “빈방에 깨끗이 비어 있는 침대 하나의 이미지”(하, 66)를 역설적으로 욕망한다. 이를테면 무소유를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변형된 또 하나의 로망이라는 사실을 작가도 알고 독자도 알고 신도(!) 안다. 단, “편지들은 함께 있어야 해요……그것들은 서로서로의 부분들이에요”(하, 478)라는 구절이 암시하는 바처럼, 이 변형된 로망은 충분히 숭고하다. 평정과 무(無)가 가장 극심한 운동인 것처럼, 바이어트의 이 숭고한 로망은 그래서 가장 격렬하다.
* “종교에 대한 충동은 믿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 경이로움을 받아들이는 수용력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상, 338)와 같은 구절은 한 번쯤 꼭 인용해보고 싶었는데 끼워 넣을 자리가 마땅치 않다. 바이어트라는 작가의 널찍한 시야를 확신시켜준 대목. ** 로망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 리뷰는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갱지 한 장만큼이나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