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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천규석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요즘은 ‘유목주의’가 대세다. 광고에서도 유목민을 칭하며 그 사이에 동참하라고 하는가 하면 칭기스칸이 새로이 주목받으며 유목민의 힘이 언급되고 있다. 경영, 인문, 철학 분야를 막론하고 책들 사이에서도 유목민을 언급한 것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생활에서는 디지털과 맞물려, 사상에서는 가타리와 들뢰즈의 사상과 맞물려, 문자 그대로 유목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그 과정을 생각해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갑작스럽게 대세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즉, 비판의 과정도 없이 수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옹골진 농사꾼 천규석의 일침이 따끔하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목주의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인 천규석은 무비판적인 수용을 넘어서 비판을, 비판을 넘어서 거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목주의는 신자유주의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며 그것은 이 땅의 농사꾼들, 나아가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모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유목주의가 사람들을 길거리에 내몬다는 건 무슨 뜻인가? 천규석은 요즘 주목받는 가타리와 들뢰즈의 사상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 사상이 “특정한 삶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창조적인 삶과 자아를 탐구, 모색하게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이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유목복고주의에서 평화의 냄새가 아니라 칼과 피 냄새를 맡는다는 천규석은 “이동마인드가 본질인 그들의 유목주의는 오늘날의 초국적 자본의 세계시정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견은 일견 타당하다. 사상은 사상 그대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인간들 사이에서 쓰임새를 갖고 나타나는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가타리와 들뢰즈의 사상들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천규석은 유목주의가 욕망을 절대화하는 경향에 비해 다른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에도 사람들이 그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새로이 주목받는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에 시각이 대표적인 것일 게다. 천규석은 요즘 유목주의를 찬양하는 시각을 칭기스칸의 몽골제국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무슨 말인가?
유목민들은 농민의 것을 약탈한다.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고 칭기스칸도 예외는 아니다. 어찌 보면 칭기스칸은 사상 최고의 약탈자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칭기스칸이 아무리 동서양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을 했다 치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고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요인이다. 칭기스칸의 약탈에 혜택을 본 이는 소수의 유목민 세력일 뿐, 우리의 선조를 포함한 절대 다수의 정주민들, 특히 약탈당하고 살육당한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칭기스칸을 유목주의에 결부시켜 좋아하고 있다는 말이니 비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천규석은 나아가 이러한 일이 과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공공연하게, 아니 노골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오늘날에는 무엇이 있는가? 몽골제국을 대신하는 시장제국주의가 있고 신자유주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 채 유목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그것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천규석의 말은 날카롭다. 농민들의 쌀 개방을 반대하면서도 유목주의를 좋아하던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이들이 부끄럽게 만드는 대목이다.
천규석은 유목주의를 낭만적으로 생각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농민들 죽어가고, 나라 죽어가니 정신 차리라고 말이다. 유목주의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경직화된 학생운동과 권력화 하는 시민운동 등 ‘꼴불견 세상’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 또한 경청해마지않을 것들이다. 더욱이 그것들은 ‘머릿속’이 아니라 농사꾼의 실제 경험담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견에 무게를 실어줄만하다.
그 동안 유목주의를 비판한 글은 드물었다. 하지만 천규석은 열불을 못 참아 쓴 글이라고 밝힌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서 과감하게 그것을 끄집어냈고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이 생활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인가? 어조가 격정적일수록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직면하게 되리라. 신자유주의로서의 유목주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