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고 싶은 엄마에게
한시영 지음 / 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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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정말 장난아니다.

너무 심각해서, 첫 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집어들고 한 자리에서 단 숨에 읽어낼 수 있었다. “죽이고 싶다”는 극단적 표현은 분노의 감정이겠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은 어쩌면 외로움이고, 슬픔이고, 결국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천천히, 그리고 정직하게 드러낸다.

30년 가까이 알코올중독자인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저자가 써 내려간 자전적 에세이다.

어린 시절, 빨간 크레파스로 다이어리에 “이영숙 죽어라”라고 쓸 만큼 엄마를 미워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사랑했고, 사랑받고 싶었던 딸.

저자는 본인이 엄마가 되어가며, 자신의 엄마에 대한 사랑과 미움, 그 아래 있던 감정들의 결을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글을 쓰는 것은 한시영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엄마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솔직하게 풀어내면서 저자에게도 많은 치유가 일어났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에, 엄마의 관점에서 쓴 글을 읽으면서는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버렸다.

알코올중독자의 딸로 살면서 고되고 힘들었을 시간을 가감없이 풀어놓는 한시영의 글빨이 장난아니다.

늘 술에 취해 있던 엄마를 향한 원망과 분노 속에서도, 자신의 머리를 땋아주던 손길, 퇴근길에 엄마가 들고 온 치킨 한 봉지, 전교 부회장 선거에 나갔을 때 엄마가 써준 출마의 변 같은 순간들이 떠오르며, 엄마를 향한 모순되고 복잡한 감정들이 모두 '사랑'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단순히 누군가의 아픈 가정사를 드러내기만 책이 아니고, ‘엄마’라는 이름 아래 숨겨놓은 감정의 진실을 마주하게 하고, “그래도 결국, 우리는 사랑받았고 사랑했다”는 진심을 내놓게 되는 책이다.

자극적인 제목보다 정말 훨씬 더 훌륭한 책

엄마를 미워한 적 있는 모든 딸들에게, 그리고 지금 엄마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그리고 중독자의 가족으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15.
사실 별게 없어요. 제 의지로 수도꼭지를 틀고서 쓰는 글도 아니에요. 그저 동파되어 터진 수도처럼 줄줄 새는 거죠. 벽을 타고 흐르는 물들. 담기지 않는 이야기.
그래서 쓰는 거죠 줄줄.
망할 애비
취한 엄마
이영숙 죽어라
빨간 크레파스
주황색 가로등
피 묻은 시멘트 벽
고소한 참기름 냄새
오버나이트 생리대
그게 다 일지 몰라요.

21.
나를 낳고 나의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내며 나와 밥을 먹던 사람. 본인 스스로도 잘 돌보지 못했던, 어딘가 서툴렀던 사람. 늘 불안해 보이고 흔들렸던 사람.
'엄마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이전의 물음은 이제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엄마라는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까'로 전환된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산다는 것이 때론 두렵고 불안해서 술로 도피했을 그 마음. 이젠 이해하려 애쓰거나 일부러 밀어내려 애쓰지 않는다. 전해져오는 그 마음을 그대로 느껴볼 뿐이다.

223.
내 손으로 밥을 차려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고부터 내게는 엄마를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과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엄마가 날 버리지 않고 혼자서 기른 것처럼 나도 끝까지 엄마를 책임져야 했다.
...
빨리 엄마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왜 나는 엄마가 나를 홀로 키운 것처럼 정성을 다하지 않느냐는 마음, 이 두 마음은 늘 동시에 찾아왔다.

300.
네 생각만큼 내 죽음이 쓸쓸하고 괴롭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자유로워졌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으니까. 더 좋은 사람, 인자한 엄마와 멋진 장모, 든든한 할머니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생에 대한 욕심과 집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미련 때문에 잘 해내지 못하는 게 더 괴로웠기에 오히려 나는 편해졌다. 정말이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나는 모순덩어리의 삶을 나의 방식대로 거침없이 살아왔어. 그 가운데 너를 괴롭게 한 것이 미안하다. 잘못했다. 다시 너의 엄마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그러지 않을 텐데. 지금 와서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니.






#죽이고싶은엄마에게 #한시영 #달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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