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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빙허각 ㅣ 창비아동문고 340
채은하 지음, 박재인 그림 / 창비 / 2024년 11월
평점 :
#도서협찬✨️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와 가난한 양반의 딸 덕주의 만남을 중심으로, 두 여성이 함께 최초의 한글 실용 백과사전인 『규합총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역사 동화에요.
덕주는 아버지로부터 "여인은 자신을 낮추고 없는 듯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지식을 향한 열망이 가득하죠.
(내 이야기는 아니지만, 분명 나의 어머니대까지는 그렇게 듣고 살았을거에요.)
어느 날, 이웃집에 사는 '빙허각'이라는 호를 가진 신기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면서, 덕주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돼요.
빙허각은 덕주에게 글을 쓰고 공부하는 여성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주었고, 덕주의 눈 속에 있는 '불'을 알아봐주죠.
덕주와 빙허각의 모습을 통해 조선 시대 여성들의 어려웠던 삶과 그들이 겪었던 제약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어요.
덕주와 빙허각이 고난을 뚫고 『규합총서』를 집필하는 과정은 여성의 자아실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깊은 감동을 줍니다.
아동문학이긴 하지만 청소년이나 어른들도 꼭 한번 읽어보면 좋을 책이에요.
그 시대, 여성의 몸으로 『규합총서』, 『청규박물지』등 을 남겼던 조선 유일의 여성 실학자 빙허각. 감사합니다.
스승님이 있어 지금, 우리 여성들이 설 수 있었어요.
26.
"계녀서와 소학언해라, 그 책에서 무엇을 배웠느냐?"
"그게, 저는....."
할머니가 흐뭇하게 물었지만, 덕주는 글씨를 익혔다고 답하기가 난감해서 우물거렸다. 할머니는 덕주를 지긋이 한번 보더니 점쟁이처럼 말했다.
"혹시 그걸 옮겨 쓰면서부터 새벽에 언덕을 올라오는 건 아니냐? 어럼풋하던 생각이 한결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 생각을 쫓다 보면 낯선 기분이 들지?"
덕주는 깜짝 놀라 할머니를 바라봤다. 글을 옮겨 적다 보면 머릿속을 스치는 짧은 생각도 책에 적힌 문장처럼 또렷하게 떠올라서 우습다고 여기던 중이었다. 돌이켜보니 그러면서부터 마음이 뒤숭숭해진 것도 같았다
"맞아요. 그걸 어떻게 아셔요?"
"꿈꾸지 말라는 책을 봐도 마음은 자라니, 참으로 곤란한
노릇이지."
할머니는 알쏭달쏭한 말을 하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눈가에 열은 미소가 스친 듯했다. 덕주는 할머니가 내준 떡을 쥐고 은행나무 아래에 한참 서 있었다. 다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54.
덕주는 하는 수 없이 책을 들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마당에 둘러앉은 아주머니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덕주는 목을 가다듬고는 소리내어 책을 읽었다.
"홀로 남은 소녀는 좋은 계책을 떠올렸다. 남자의 옷으로 같아입고 밤이면 병서를 읽고 낮이면 말달리기와 창 쓰기를 익혔다. 그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 세상에 겨룰 사람이 없었다."
이야기가 이어 나가면서 덕주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아주머니들은 숨죽인 채 귀 기울였다. 고아가 된 소녀가 안타까 워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누구 못지 않은 재주에 감탄하며 웃기도 했다. 소녀는 과거에 급제했고 전쟁에 나가 두려움 없이 적을 무찔렀다 덕주도 어느새 장군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듯이 벅차올랐다. 덕주는 웃으며 책을 덮었다.
62.
"규합에 어찌 인재가 없으리오."
덕주는 그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규합은 여성이 거처하는 방이나 안채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여인 중에도 뛰어난 이가 있으리라는 뜻이다. 되새길수록 마음에 드는 말이다.
80.
"그런데요."
덕주는 입을 열었다. 바다에서 강으로 물이 밀려들 듯 말이 마구 차올라서, 쏟아내지 않을 수가 없다. 고요하던 강도 밀물이 들 때는 더없이 소란한 것처럼, 할 말이 차오를 때 좀 방정맞고 시끄러워지는 건 하는 수 없다.
"먹고 사는 데 도입이 되는 책이라면서, 먹고 사느라 바쁜 사람들은 읽을 수 없는 글자로 쓴 게 이상하지 않나요? 그 진짜 글자라는 걸 아무나 배율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말씀하신대로 글자 공부부터 하려면 밥벌이도 하지 못할 테고, 그러면 글을 배우기도 전에 꼴딱 굶어 죽어 버리고 말 텐데, 잘 먹고 잘사는 법을 연구하는 게 대체 뭔 소용이래요."
85.
"그렇지만요.
덕주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디듬으며 주먹을 쥐었다. 기왕
이리 만났으니. 한 번쯤 말은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까 오래 남는 책을 쓰고 싶다고 하셨지요. 더 쉬운 글자로 쓰면 더 많은 사람이 볼 텐데요. 더 많은 사람이 읽고 아끼는 책이 더 오래 남지 않을까요?"
"호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88.
"저처럼 반기는 이들이 무지 많을 거에요. 언문으로 귀한 지식을 담은 책을 쓰는 건, 둑을 터서 고인 물을 흐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아주 대단한 일이죠."
...
.
"아이고. 누가 들으면 난이라도 일으키는 줄 알겠구나. 나는 그저 그동안 공부한 책에서 유용한 내용을 찾아 정리하는 것 뿐이야."
할머니는 짐짓 엄하게 꾸짖었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간 진서로 써 오던 글을 뒤로 하고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인데도, 할머니는 오히려 가뿐해 보였다.
"기왕 언문으로 쓰기로 했으니, 그간 공부한 내용에다가 내가 아는 살림법을 보태서 새로운 책을 써 보자꾸나. 이 책은 건강을 지키고 집안을 다스리는 법, 그러니까 살림에 관한 모든 지식을 담은 총서가 될 거다."
할머니는 책의 목차도 다시 세웠다. 음식과 술을 만드는 법도, 옷을 짓는 법칙, 농사짓는 즐거움, 몸을 건강히 하는 비결, 길흉을 다스리는 비법이라는 제목으로 다섯 편의 글을 써서 하나의 책으로 묶을 것이라고 했다.
112.
"그 두사람이 별난 거잖아."
덕주는 밤새 잠을 설쳤다. 가슴이 울렁거리다 못해 부대꼈다. 덕주는 벌떡 일어나 계녀서와 소학언해를 옮겨 적은 공책을 펼쳤다. 어둠 속이라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 글자들은 선연하게 떠올랐다. 덕주가 평생 해야 할 일과 행동과 생각은 이미 다 정해져 있다. 그대로만 하면서 살면 된다는데,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할까.?
116.
덕주는 바위에서 벌떡 일어나 품숲을 걸어 다녔다. 진흙에 젖은 짚신이 질질 끌렸다. 아버지가 보시면 야단치실 거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아무래도 저 강물 때문에 그런가 봐요. 멀리까지 뻗은 강 을 보면 나도 모르게 생각이 따라 흘러요.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고 그중의 절반은 여인일 텐데. 정말 그 많은 여인이 이리 똑같이 사나. 정말 모두가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사나 궁금해져요.'
173.
"그동안 잘 지냈느냐. 얼굴이 수척해졌구나."
할머니는 덕주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덕주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입을 꼭 다물었다. 그때 선돌댁이 다가와 할머니의 팔짱을 끼고는 신명나게 외쳤다.
"자아, 우리도 책거리 잔치라는 걸 한번 해 봅시다."
그제야 덕주는 할머니의 손에 들린 작은 보따리가 책이라는 걸 깨달았다. 할머니는 덕주에게 보따리를 내밀었고, 덕주는 얼른 받아 풀어 보았다. 제일 위에 놓인 책의 겉장에 '규합총서'라는 제목이 보였다.
"책을 다 쓰고 나서 좋은 이름이 없을까 고민이 깊었는데, 바깥양반이 이 이름을 지어 주었구나. 그동안 그사람도 날 돕느라 고생이 많았거든. 규합은 안주인이 거처하는 방을 말하고, 총서는 온갖 지식을 찾아 모은 책을 말하니, 제법 잘 어울리는 이름인 듯 하구나."
187.
"어디 보자. 그러고 보니 우리 딸 눈에도 불이 담겼구나. 네 마음을 밝히고 다른 이들에게 온기를 전해 줄 불이란다."
"'그러면 아버지 눈에도 불이 있겠네요."
아이는 맹랑하게 종알거렸다. 윤보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는 자기와 눈이 닮은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해 들었던 세찬 강물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듯했다. 윤보는 그리움에 젖어 미소를 지었다.
"그 불을 끝끝내 지켜낸 사람들이 있단다. 너도 그럴 수 있을거다."
191.
규합총서는 여성이 직접, 여성이 하는 일에 관해 한글로
쓴 책입니다. 당시 여성도, 살림도, 한글도 그리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한 걸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죠. 빙허각은 '규합총서'와 '청규박물지'뿐 아니라 산문과 시도 쓰고, 한문 소설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대요. 이를 엮어 빙허각전서를 내었는데, 아쉽게도 한국 전쟁 중에 사라졌다고 해요. 널리 퍼졌던 규합총서만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전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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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에서 책을 보내주셔서 기쁘게 읽고, 진심을 다하여 #서평 을 남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