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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동정탑 - 2024년 제17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구단 리에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평점 :
📖 『도쿄도 동정탑』 / 구단 리에 / 문학동네
🏆 2024년 제 170호 아쿠타가와상 수상적
🏆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역대 최단 시간 심사, 심사위원 대호평
"많은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만한, 최근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중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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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제170회 아쿠타가와상이 AI를 활용해 집필한 작품인 『도쿄도 동정탑』에 주어졌다.
작가 구단 리에는 수상 기자회견에서 ‘작품 일부에 생성형 AI로 만든 문장을 사용’했다고 밝혔고, 이후 일본은 물론 한국의 언론과 독자들도 관심을 보였다.
작품에서 해당 문장이 사용된 곳은 작중 인물들의 질문에 AI가 답변하는 부분이고, 이는 전체 분량의 약 2% 미만을 차지한다.
심사위원단은 ‘심사 당시 AI 사용 여부는 문제되지 않았다’ ‘작품을 읽어보면 누구나 납득할 것’ ‘완성도가 높고 단점을 찾기 어려웠다’ ‘최근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중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작품’이라고 심사평을 밝혔다.
『도쿄도 동정탑』은 소외와 차별을 당하는 사람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며 범죄자를 동정받아야 할 존재로 정의하고, 도심 한가운데에 최첨단 교도소를 건립해 수감자들에게 안락한 생활을 제공하고자 하는 근미래 도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회는 동정받아야 할 범죄자를 ‘호모 미세라빌리스’, 죄를 짓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살아온 비범죄자를 ‘호모 펠릭스’로 칭한다.
더불어 세워질 교도소의 명칭은 ‘심퍼시 타워 도쿄’이고, 이를 직역한 ‘도쿄도 동정탑’으로 불린다.
소설은 타워의 설계를 맡게 된 건축가 마키나 사라, 그녀의 어린 연인 도조 다쿠토, 범죄자 동정론을 주도하는 사회학자 마사키 세토, 새 교도소를 취재하러 온 미국인 기자 맥스 클라인 각각의 시선을 통해 이 논쟁적 주제를 다각도로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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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AI 시대에서의 언어와 인간성, 그리고 사회적 규범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AI가 생성한 문장이 포함된 점에서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과 동시에 그 한계를 보여주며, 작품 전체에 걸쳐 언어와 건축물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탐구합니다.
매우 독특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언어의 사용과 건축의 비유를 통해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으며, AI의 도입이 문학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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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 바벨탑의 재현. 심퍼시 타워 도쿄의 건설은 머지않아 우리의 말을 어지럽히고 세계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다만 이 혼란은 건축기술의 발전으로 오만해진 인간이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려다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 아니다. 저마다 이기적인 감성으로 말을 남용하고 날조하여 확대하고 배제한, 그 당연한 귀결로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은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독백이 된다. 독백이 세상을 장악한다. 대 독백의 시대가 도래했다.
p.13. 나는 미래가 보인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실제로 보는 것 같은 환시 현상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재능이라느니, 초능력이라느니, 예술적 영감이라고 말하려 하지만 물론 단순한 직업병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거대한 건축물을 설계해본 경험이 있는 건축가라면 누구나 같은 병에 걸린다. 다루는 건물의 규모가 클수록, 도시 경관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수록 병이 진행된다. 한 번 지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을 구상하면서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느긋하게 잠꼬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다.
p.17. 데생은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해낼 자신이 있었고, 한자를 암기하는 것도 반에서 가장 빨랐다. 하지만 가타카나를 쓰는 건 아무리 연습해도 소용없었다. 초등학생이나 외국인도 나보다 훨씬 잘 쓴다. 심지어 한 사무실 직원에게는 "정신 이상이 있는 엽기적인 연쇄 살인범이 쓸 법한 글씨"라는 평을 들은 적도 있다. 가타카나를 만든 이는 상종 못할 인간이다. 아름다움도 자부심도 느낄 수 없는 따분한 직선인데다 알멩이는 허접하다. 그런 주제에 어느 나라의 언어도 다 포섭하겠다는 뻔뻔함이 있으면서, 어디 한 획이라도 빠지면 그 즉시 막대기로 변해버리는 구조물에 애착이 생길 리 없다. 어떻게 해도 생리적 혐오감이 나의 가타카나를 왜곡시킨다.
p.22. "가엾고, 동정받아 마땅한, 호모 미세라빌리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음해본 그 말은 어감만 보면 결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적어도 내 언어 감각은 그 단어를 발음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문맥을 무시하고 그냥 왠지 말해보고 싶은 단어가 있는데, 호모 미세라빌리스도 아마 그런 단어에 가까울 것이다. '범죄자'라는 호칭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면 물론 그보다 더 나은 건 없다. 하지만 세상이 완전히 '호모 미세라빌리스'로 이행한다 하더라도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다. 남들 앞에서도 실수하지 않고 말할 수 있고, 나는 모든 일에 빨리 적응하니까. 가엾고, 동정받아 마땅한, 호모 미세라빌리스 여러분.
p.24. 묻지도 않은 것을 멋대로 설명하기 시작하는 맨스플레인 기질이 AI-built의 싫은 점이다. 똑똑하고 공손한 양식을 잘 꾸미는 건 실제로는 치명적인 문맹이라는 결점을 감추기 위함이다. 아무리 학습 능력이 뛰어나도 AI는 자신의 약점을 직시할 힘이 없다. 언어를 무상으로 훔치는 것에 익숙해져 그 무지를 의심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차별'이라는 단어를 구사하기까지 어디에 사는 누가 어떤 종류의 고통을 겪어왔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호기심을 가질 수 없다. '알고 싶다'라는 욕망을 품지 않는다.
p.42. 석양이 완전히 침식되자 경기장 전체가 환상적인 보랏빛으로 물들어 도쿄의 풍경을 한순간에 수십 년이나 가속시켰다. 그때까지 분명 그곳에 존재했을, 황혼에 물들어가는 향수어린 도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과거가 되어 사라졌다. 처음에는 그저 한 여자의 머릿속에만 있던 아이디어가 현실화되고, 저마다 현실의 삶이나 감정을 품은 사람들이 그곳을 물리적으로 왕래한다. 오직 기적이라 할 그런 광경을 나는 언제까지 질리지도 ㅇ낳고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 생명력을 띤 구조물은 주변 빌딩 숲과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불빛을 양분으로 삼아 독자적인 진화를 이룬 거대 생명체처럼 보인다. 도쿄가 만들어낸 참으로 아름다운 생명체. 그 생명체가 반투명한 개폐식 지붕을 지느러미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여 도시를 이동하는 SF 영화 같은 영상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녀에게는 의지가 있고, 그녀의 의지가 이 잡다한 도시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건축이란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 한번 확인한다. 건축은 도시를 이끌고 미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p.43. ...이어야 한다. ...해야 한다. 강한 의지와 의무를 나타내는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고 비정서적인 말들이 내 안에서 뽀글뽀글하며 계속 기포를 일으킨다. ...이어야 한다. ...해야 한다. 이 말들은 나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준비해두는 견고한 기둥이자 대들보였다. 늘 이런 화법으로 타인에게나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압박감을 주는 경향은 내가 사는 집에서 조금이라도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 모호한 요소를 뿌리째 배제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일지도 모른다, ...가 더 낫다 등 시멘트로 굳히기 전의 모래처럼 부서지기 쉬운 재료로는 수명까지 남은 수십 년을 지탱할 수 없다. 설령 형태가 없는 말일지라도 집 내부에서 완전히 쫓아내지 않으면 발판이 불안정해 서 있을 수도 없다. 단 일초도.
p.51. 저나 여러분이 지금까지 '범죄자'가 되지 않았떤 건 훌륭한 인격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이 태어난 곳이 마침 훌륭한 인격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범죄와 엮이지 않고도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게 해준 어른이 주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좋은 일을 하거나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을 어른들이 칭찬해주고 장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다음에도 좋은 일을 해야겠다"라는 동기를 부여해줬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을 반복하는 동안 눈앞에 험난한 벽이 가로놓여도, 형편없는 실수를 해도, 앞을 바라보고 미래에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길러졌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미래에 대한 의식이 작동하면 죄를 저지를 때 어떻게 되는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도에 어긋난 행위를 저지를 것 같은 순간에 강력한 자제력으로 이어집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당신의 행복한 특권 덕분입니다.
p.57. 범죄자가 되는 이유를 개인의 인격과 의지박약 등에서 찾는 건 이제 전혀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말과 현실이 크게 괴리되어 있는 것이죠. 저는 스스로를 우수한 인간이라고 자만하며 범죄자를 한 묶음으로 배척하는 사람이 훨씬 더 죄가 깊고 냉정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자제력 있고 지능이 높고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면 자신과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이를 존중하고 진정으로 동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을 동정하는 일이야말로 행복한 특권을 갖고 태어난 호모 펠릭스의 의무 아닐까요. 이것이 삼십 년에 걸쳐 인간의 행복에 대해 계속 고민해온 제가 확신을 갖고 제시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
p.76 “질문하면 뭐든 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게 AI의 싫은 점이야. 나는 AI가 아니야. 우선 스스로 추측하거나 해석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겠어. (…) 나는 중간식이 적혀 있지 않은 해답에는 동그라미를 치지 않아. 치는 사람도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는 안쳐, 절대로. 우연일지도 모르는, 재현성 없는 성공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야.”
p.84. 이름은 물질이 아니지만, 이름은 언어이고 현실은 언제나 언어로부터 시작돼. 정말이야. 이 육상 세계를 움직이는 건 수학이나 물리를 잘하는 인간이 아니라 말을 잘하는 인간이라고. 그래서 나도 꽤 쓰라린 경험을 해왔고. 너는 안 그래? 이건 말이지, 보기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야.
p.97 “나는 나약해. 나의 나약함을 알고 있어. 그 나약함 때문에 이 세상 도처에서 아름다운 형태와 질감을 지닌 견고한 건축물을 눈 밝게 찾아내는 거야. (…) 이건 입 밖으로 내뱉어선 안 되는 말이지만, 아름답지 않은 형태와 질감을 지닌 물체는 단 하나도 시야에 넣고 싶지 않아. 그래서 추한 형상이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을 가끔은 견디기 힘들 때가 있어.
p.109. 그녀가 쌓아올리는 말이 무언가를 닮은 듯해 기억을 더듬어보니 AI가 구축하는 문장 같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세상 사람들의 평균적인 소망을 집약시킨, 또한 비판의 여지를 최소화한 모범적인 답변. 평화. 평등. 존엄. 존중. 공감. 공생. 질문을 입력하자마자 스크롤을 재촉하는 성급한 글자들이 뇌리에 떠오른다. 그것들이 긍정적이고 빈곤한 말을 쏟아내는 모습을 일단 상상하자, 아무리 그녀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어도 모든 것이 AI-built의 언어로만 들려왔다.
p.156. 나는 내가 그저 우연으로 태어난, 아무 필연성도 목적도 의지도 없는 나약한 생명체임을 알고 있다. 나는 나의 나약함을 안다. 원래라면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불만을 들을 이유가 없다. 나는 인간에게 쓸모 있기 위해 개발된 기계가 아니다. 그곳에서 열심히 걷고, 말을 배우고, 돈을 벌어야 할 의무 따위는 없다. 행복해지는 것도 불행해지는 것도 내 마음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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