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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 끝내야 내가 사는 독성관계 심리학
권순재 지음 / 생각의길 / 2021년 6월
평점 :

여준: "우리 엄마는 내가 싫대요. 교활하고 위선적이라고"
남수현: "너는, 너도 그렇게 생각해?"
여준: "선배도 그래서 나 싫어한 거 아니에요?"
남수현: "너 교활하고 위선적인 애 아니야. 엄마가 말한 너, 그거 너 아니라고. 그분 마음속의 너지.
누군가 너에게 지옥 같은 말을 했다면 그 사람 마음이 지옥인 거야.
그걸 그대로 믿을 필요 없어. 그게 부모님 말이라도."
며칠 전, 시청하던 드라마 '멀리서 보면 푸른 봄'에서의 두 남자 주인공의 대사가 마음에 와닿아 재방송을 챙겨보며 기록해두었습니다. 가족 내에서 '부족한 아이'로 낙인찍히고 어머니로부터 '교활하고 위선적'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자란 남자 주인공 여준과 그가 친해지고 싶어 하는 다른 남자 주인공 수현이 나눈 이 대화는 마침 읽고 있었던 책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의 상황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보니 이 짧은 대화 안에 독성관계 주도자의 말, 그것이 희생자에게 미친 영향, 그리고 희생자가 생존자가 되기 위한 핵심을 담고 있는 듯했고요.
'독성관계'는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상사와 부하 등 압도적인 힘의 차이나 사회적, 심리적 서열이 명확한 관계에서, 다른 통상적인 관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고립되고 폭력적인 관계가 발생하며, 그 폭력의 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다양해지는 상황을 말합니다(p.40). 독성관계는 생활을 같이 하는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동료에 의해 일어나며, 이런 관계를 주도하며 상대를 조종하려는 개인인 '주도자', 독성관계에 종속되며 조종당하고 피해를 보는 '희생자', 그리고 주도자의 폭력을 용인하거나 묵인하고 때로는 주도자 역할에 가담하기까지 하는 이들을 둘러싼 '주변인'으로 구성됩니다. 사랑을 가장한 가혹한 폭력과 갈취, 공동체 의식으로 포장된 광적인 비난과 모욕. 독성관계의 주도자와 협력자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행동을 '정상적'이라 주장하며 도리어 이에 반발하는 이들을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몰고 갑니다(p.12). 그 결과 이 관계의 희생자는 자신의 마음과 욕구를 제대로 볼 수 없고, 무기력, 분노, 의심, 수치심, 불안 등과 같은 감정 속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결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의 부당성을 인정한 후에도 좀처럼 독성 관계와 그 관계가 준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하지요. 저자는 이러한 관계가 마치 독극물이나 세균처럼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는 독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독성 관계'라 명합니다. 그리고 저자가 이 개념을 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환자 K씨와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독성관계 주도자와 희생자의 말과 행동, 의도나 심리상태, 그리고 협력자를 비롯한 환경적인 요인과 같은 구성 요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독성관계가 한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 독성관계의 희생자가 '독성관계의 생존자'가 되기 위한 방법, 그 과정에서 겪게 될 일들과 심리적 고충, 그리고 그 과정을 잘 지나가기 위한 조언과 더불어 독성관계가 당연했던 삶을 사는 이들은 알지 못하는 '일반적인 관계'의 여러 모습들도 알려줍니다.


독성관계가 '개인의 불행한 체험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분명한 병적 현상의 하나'라는 것을 대중이 인식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독성관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고 이에 대해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저자의 말처럼, 독성관계 구성원들의 심리상태, 행동, 그들이 하는 말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알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예리하고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족관계를 중심축으로 내용이 전개된 것도 좋았습니다. 연인, 학교, 직장 등의 부분은 기사로 접하거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인데 비해, 다른 관계보다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독성관계는 잘 드러나지 않아 희생자 자신도 잘 모르는 경우가 있을뿐더러, 알게 된 후에도 여러 면에서 드러내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인 것 같거든요. 함께 실어준 내용인 고부 간, 연인 간, 직장에서의 독성관계 사례와 솔루션, 독성관계 점검표 역시 어떤 독성관계든 그 특징을 알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책 뒷부분 K의 변화는 매우 반갑고 희망적이었습니다. 독성관계에 있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하지만 독성관계 속에 있었던 사람은 누리지 못한 삶, 누군가는 나를 사랑하고 누군가는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몇 번의 다툼이나 갈등 자체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흔들리지 않으며, 심각한 수치심이나 필요 이상의 죄책감을 느끼는 않는, 자신의 선택이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믿기 시작한 K의 모습이요.
저자는 독성관계의 희생자인 이들에게 '누구의 목소리를 당신의 마음에 닿게 할지를 항상 선택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말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라고요. 저자의 바람처럼 저 역시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많은 이들이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어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되찾는 '독성관계의 생존자'가 되고,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기쁨을 누리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더욱 꽃피우며 살 수 있기를요.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 받았으며, 내용에 대한 요구 없이 저의 견해가 담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