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는 시간관리와 인생관리를 위한 10가지 자연법칙
하이럼 스미스 지음, 김경섭.이경재 옮김 / 김영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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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랭클린 플래너를 통해 시간을 관리하고 계획하려는 열풍이 지나자 <3P 바인더>라는 또 다른 플래너가  그 자리를 메꾸었다. 스마트 폰, 클라우드 서비스, 스케줄링 매니지먼트,  TO-DO List, 마인드 맵, GTD 과 같은 관리도구들도 계속 생겨난다. 위 언급된것들은 기술과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개인들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도구이자 방법론들인데 모두가 다 관리 즉, 매니지먼트9(Management)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J형의 타고난 기질과 사회에서 훈련된 직무 덕분에 이런 계획성 관리 프로그램들은 나와 잘 맞았고 이를 통해 직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일어나는 스케줄들을 잘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시간관리에 입문하긴 했지만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 방법론들을 접할 때마다 숨이 탁탁 막혀온다는 느낌을 지울 수없다. 이를테면 배우면 배울수록 더 빨리 챗바퀴를 돌려야 할 것만 같은 무의식적 불안감이랄까...


나의 선생님께서는 인생을 풍요롭게 해 줄 3가지 기술로 리더십과 글쓰기 그리고 시간관리를 뽑으셨다. 도대체 시간관리가 말하는 그 실체는 무엇을 정의하는 것인가? 바쁜 현대 사회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배워야 하는 관리 기술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매니지먼트를 넘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이면의 인생 원칙을 말하는 것인지가 점점 궁금해 지는 요즘이다.


저자는 책 앞머리에 <우리가 왜 시간관리의 세미나를 듣고 책을 읽으려 하는가?>에 대한 인식 제시로 시작한다. 나 자신과 내 인생에 대해 좀 더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컨트롤 하면 인생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자 하이럼은 그 한계를 지적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을 제시한다.


진정한 해결책이란 시간관리를 통한 통제가 아닌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하이럼의 핵심키워드인 <마음의 평화>는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 키워드인데 이 단어는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시간관리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정의되곤 한다.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플래너류의 사용, IT 기기에서 사용되는 프로그램들은 삶의 각종 사건들을 효율적으로 컨트롤 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과 도구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그 한계의 지적을 곁들인다.


저자가 말하는 <마음의 평화>는 인생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이해하는데 달려 있다고 이야기 하면서 우리가 아무리 시간관리를 잘 한다해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위해 쓰고 있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에서 말하는 중요성의 원칙을, 저자 하이럼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속도로 상징되는 시계가 아니라 방향성을 상징하는 나침반의 중요성을. 단순한 시간관리를 넘어 우리의 인생을 컨트롤 함으로써 그 충만감 즉, 마음의 평화를 찾아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시간관리에 대한 다양한 자기계발식의 프로그램에 질린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관점으로 제시될 수 있겠다. (물론 속도가 아닌 방향성에 대한 중요성이 새롭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힘은 크다 하겠다)


인생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삶을 더 잘 컨트롤 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주요 자연법칙을 잘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데 1부에서는 개인생산성과 업무수행능력을 지배하는 법칙을 중요하게 다루며 2부부터 시작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2장: 진실로 제일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 3장: 마음의 평화

  - 4장: 높이 도달하려면 현재의 편안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 5장: 계획수립과 실행의 중요성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1부에 해당되는 내용이고 2부에서는 인생법칙을 이야기하는데 이 부분은 매우 아쉽다. 1부는 매우 짜임새 있게 나간 반면에 2부는 자신의 사례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 핵심 메시지조차 뚜렷하지 않아서. 하지만 어쨌거나 그 한계에 불구하고 1부의 내용은 시간관리의 명저로 꼽힐 만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명서라고 지칭되는) 시간관리에 대한 책들은  도구를 통한 시간관리가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 지적을 시작으로 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예로부터 전해져 온 인류의 지혜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속도의 경쟁이 아닌 방향의 중요성을. 그 방향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가에 대한 비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런 측면에서보자면 시간관리란 인생의 삶의 변화를 위한 한 가지 시작점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비전과 소명에 대한 인식이 서 있지 않으면 시간을 관리해야 할 동기부여가 수립이 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강한 열정이 없으니 삶이 경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인 리더십과도 연결되며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인생경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뭘 잘 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밭에 잡초 하나가 보여 그냥 뽑았을 뿐인데 그 줄기 밑에는 수많은 덩굴 뿌리들이 당겨지는 느낌이랄까. 이 책을 읽는 내는 나는 강의 준비에 초점을 맞추어 읽었다. 어떤 부분을 인식과 지식으로 쓸 것인지 어떤 부분을 PBL로 담을 것인지를 고민하며 말이다. 그러면서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와도 비교해 보지만 만만치 않아 보인다.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라는 의미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어 시간관리를 해결책으로 선택했는데 명저들은 모두 고전적 지혜를 말하고 있다. 고전적 지혜는 핵심을 담고 있지만 대중들에게 덜 자극적이고 진부하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내용들이고 어디서 한 번쯤은 들어본 내용들이다.

이것을 어떻게 현대적 감각으로 포장해 그들에게 전달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떠올랐다. 강사라고 하면 시간관리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왜곡된 프레임이 벗겨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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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을 먼저하라 - 스티븐 코비의 제4세대 시간경영
스티븐 코비 외 지음, 김경섭 옮김 / 김영사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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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래빗의 상사인 김부장은 균형있는 식습관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얼큰한 감자탕과 부대찌게를 좋아하고, 퇴근 후 삼겹살과 소주를 좋아하지요. 김부장은 회사에서의 회식과 모임이 잦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도 넓어 활동하고 있는 동호회도 많아  일주일 내내 술자리가 없는 적이 없을 정도니까요. 공자와 맹자를 연상케할 정도로 배와 턱살이 두툼하게 나와 풍만한 인상을 주는 상사입니다.


아침에는 항상 눈은 충혈되어 있고 오후에는 가끔 졸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저녁이 되면 다시 쌩쌩해져 또 다시 모임으로 향합니다. 어느 날 한 번은 점심시간에 지난번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간암이 발견되었다네요. 초기라서 다행이었다고 합니다. 수술 때문에 다음 주에 연차를 써야 할 것 같다고 말해왔습니다. 김부장님은 수술로 2주 휴가를 받아 수술을 위해 병원을 입원했고, 이후 수술이 잘 되었다는 통화를 했습니다. 2주후에 회사에 복귀했으나 일주일 뿐 부장님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술 이전의 생활싸이클로 다시 들어간 것이지요.


부장님은 인기가 많아 부장님을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나 많아 보이긴 해요. 가끔은 그게 부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러다 다시 큰 병으로 재발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나도 규칙적인 운동을 못하지만 저렇게 살아가는 김부장을 볼 때면 '정말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야겠다'라는 결심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은 퇴근 길에 건너편에 있는 헬스클럽에 등록해야겠어요.'


타임래빗은 이 분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만성적인 문제에 접근하려면 다른 종류의 두 사고가 필요하다. 치료는 고통스러운 수준의 병을 다루고 예방은 생활 습관과 건강 유지의 문제를 다룬다. 예방과 치료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이다. 예방과 치료, 우리는 어느 패러다임을 따를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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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스토리는 각색된 이야기지만 이 책의 저자 스티븐 코비 박사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패러다임) 강조하고 있다. 더 열심히, 더 영리하게, 더 빨리 일해도 안된다면 무슨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가? 시간과 관련한 통제를 위해 온갖 갖가지 방법, 기술, 도구들을 배우지만 삶의 질은 향상되기는 커녕 오히려 자책감에 더 빠져버렸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서부터 해결책을 찾아야 할까?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를 읽기 전과 읽고 나서 시간관리에 대한 다음의 책들을 읽었다. <타임전략>, <10가지 자연법칙> 그리고 <잠들어 있는 시간을 깨워라> 이 중에서 이 책은 4권의 책중에서 가장 탁월하다. 


이 책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스티븐 코비 박사가 이야기한 전통적인 시간관리 기법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시간매트릭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제2상한면의 의미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10가지 자연법칙>이 그나마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와 견줄만 하지만, 6장부터는 내용이 급격히 무너지는 아쉬움을 남긴다.


만약 당신이 조직에서의 목표달성과 성취 그리고 효율의 극대화를 얻기 위해 이 책을 골랐다면 잘못 골랐다. 오히려 <잠들어 있는 시간을 깨워라>라는 책을 고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책은 효율보다는 효과를 강조하고 속도보다는 균형을 추구하며 독립적성취 보다는 상호의존적 관계를 더 중요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더 영리하게, 더 빨리 일하고 싶음에 대해 긴급성 중독이 걸린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우리가 아무리 스마트폰, 차트, 오거나이저, 플래너와 같은 시간관리 도구를 갖는다 해도 우리의 삶의 질은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스티븐 박사는 '살며 사랑하며 배우고 유산을 남기는 것'이라는 고전의 지혜로 양심에 따라 살것을 제안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잘못 고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살고자 하는 욕구는 신체적 욕구를 말하고 사랑하고자하는 욕구는 사회적 욕구를 말하며 배우고자하는 욕구는 정신적 욕구를 말한다. 유산을 남기고자하는 욕구는 영적 욕구를 말한다. 


이 욕구들을 우리 양심 속에서 항상 옳음을 가르키는 정북향의 원칙을 따르게 된다면 시간관리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며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의 결과물은 달라지지 않는다. 스티븐 박사는 이 생각을 패러다임이라 부른다.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 이상, 항상 문제에 부딪히게 될 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관리 차원을 넘어 삶에 대한 리더십으로 나가야 한다.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



이 책에서는 세 가지 중요한 패러다임을 말하고 있다. 긴급한 것보다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는 중요성 패러다임 자기혼자 성취하는 독립적 성취가 아니라 관계를 맺으며 상호 윈윈을 지향하는 상호 의존 패러다임 그리고 서로의 비전을 공유하며 임파워먼트를 창출하는 상호 관련 패러다임이다.


스티븐 박사는 이 책을 통해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유익과 통찰을 준다. 인간이 가진 네가지 근본적인 욕구가 충족되고 자아실현을 도모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역할들에서 균형을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비전과 열정의 중요성까지.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은 시간관리라는 테마라기 보다는 개인 리더십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을 너무 앞서서 읽어 다른 책과 비교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너무 일찍 만난 끝판왕 덕분에 다른 보스들이 시시해졌다고나 할까) 너무나 다른 가치를 지향하고 있어 그런 부분에서 다른 책들과 유독 비교가 됐다. 너무나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인식을 심어주게 되면 실제적 측면에서의 유용성에 대해 자칫 약해질 수 있는데 이 책은 그런 부분에서도 충실하게 내용을 담고 있다. (역시 석학은 석학인 모양이다)


전반부부터 중반부까지는 어느 문장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 연이어 나와 계속 밑줄을 그어야 했고, 덕분에 책은 아주 너덜너덜해졌다. 그렇게 흐름으로 가다보니 책의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흐름의 연속적인 진행이라 할까. 그래서 책을 1차 완독한 후에는 목차만 따로 필사하여 프린트 했다. 프린트한 목차와 비교하면서 다시 발췌독을 해보니 책에 대한 이해도를 좀 더 높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내용은 깊고 방대하다. 한 두번 만으로는 내것으로 체화시킬 수가 없을 정도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이 책을 왜 이전에는 읽지못했을까에 대한 아쉬움이 일었을 정도로

책에 대한 만족감은 상당했다. 최근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훌륭도가 높은 책이다. 하지만 책의 메시지가 너무나도 정직하고 보편적이라 이 책의 내용을 청중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나라는 고민이 들었다. 


스마트폰과 클라우드 서비스에 대한 교육이 시간관리라는 이름으로 팔려나가는 강의가 너무나 많다. 이 시대는 여전히 속도와 효율을 지향한다. 그리고 성취를 개인에게 요구한다. 이런 사회의 흐름에서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가 주는 메시지를 어떻게 매력있게 전달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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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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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끝난 맨 뒤에 실려있는 작품해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해설 내용 중에는 플로베르가 이 책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였는가에 대한 기술이 있었다. 글의 미적 아름다움을 주기 위해 글자 하나하나에 고심한 플로베르의 노력에 대해서. 

'플로베르가 이런 작가였구나...'


플로베르가 가진 작가정신을 보여주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문학에 있어서 예술적으로 훌륭한 주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인 이브토를 그리건 유명한 대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그리건 결국은 마찬가지다'

라고 한 플로베르의 말은 결국 무엇을 그리느냐보다는 어떻게 그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가치를 가진 플로베르에게 갑자기 호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의 가치 역시도 그와 동일하니까.



2.

<마담 보바리>에는 보바리 부부을 둘러싼 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플로베르는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현실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군상들을 작품에 잘 담아내고 있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이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읽었고 내가 리뷰를 쓰기 위해 나의사고를 분석적 모드로 전향시킨 후에야 난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이 가진 강점 중의 하나를...


(사랑에 빠진 이들의) 마음 심리를 플로베르는 참으로 잘 묘사했다. 외향적인 묘사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포플러 나무 밑에서 키스를 하는 보바리 부인과 로돌프가 사랑에 빠져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감정을 표현한 부분이라든지 레옹과 마담 보바리가 탄 마차 안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는걸까?라는 미친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 등은 플로베르가 가진 힘을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대목들이다.



3.

책을 읽는 처음에는 한 사람이 욕망의 유혹에 빠지는 흐름이 읽혀졌다. 유혹에 거리감을 두었다가 그 유혹이 다가왔을 때 저항하고, 그 유혹에 빠진 후에는 후회하고 각성을 통해 단절하려고 하나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게 됨에 따라 결국 유혹의 늪에 깊게 빠져 버리게 되는 그 이야기의 흐름. 욕망의 덫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은 플로베르가 살던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저속적인 소설, 된장녀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현대판 사랑과 전쟁으로 소개되는 <마담 보바리>가 통속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19세기 문학의 온갖 관습에 도전했던 플로베르의 용기에 시선이 간다.



4.

여기까지 리뷰를 쓰고 나자 더 많은 내용을 담기에는 어렵고 힘에 부쳤다. 어렵다는 말은 책을 읽는 내내 이야기에 빠졌을 뿐, 이 소설의 가진 매력 포인트나 위대함으로 일컫어지는 요인들을 하나하나 꼽아내는 안목이 전혀 없음을 내 스스로 알게 되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냥 이대로 후기를 마치기에는 아쉽다. 다른 이들은 마담 보바리를 어떻게 읽었을까? 그들의 눈에는 마담 보바리의 어떤 대목들이 인상적이었을까를 검색해 본다. 잘 써진 블로그의 리뷰를 읽고 난 후에야 <마담 보바리>가 가진 힘 하나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이 소설의 위대함을 가로막던 안개들이 걷히기 시작한다.


5.

마담 보바리라는 호칭을 갖기 이전 그녀의 이름은 엠마였는데, 엠마는 처녀시절부터 일종의 허식을 갖고 있었다. 책도 읽을만큼 읽고, 피아노도 칠 줄 알며, 수도원에서의 교육도 받았기에 자신에 대한 자부심 혹은 자존감이 넘쳤다. 그래서 시골마을의 진부함은 그녀가 모든 것을 시시하게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남편까지도. 그녀를 둘러싼 욕망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S극이 N극을 당기듯이. 이 소설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불륜은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결정타는 불륜이 아니라 고리대금이니까.


이 소설의 핵심은 연애소설을 읽으며 자란 한 여자가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살기 위해 욕망을 좇다가 파멸해 가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보바리즘이라는 말이 유래된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기능. 그것을 <쥘 고티>에는 보바리즘이라고 명명했다.


<마담 보바리>는 사람 사는 곳이면 흔히 일어나는 실제 불륜사건을 소재로 한 가장 통속적인 소설이자 욕망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가장 현대적인 작품으로 너무나 평범한 줄거리 자체가 우리를 문제의 핵심으로 인도해주고 있다. 문제의 핵심이란 이 소설이 탄생하기까지의 방대한 창조의 드라마와 그 드라마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 즉 내용과 형식, 혹은 주제와 '스타일'이라는 문제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 소설이 주는 위대함은 기다림과 환멸이 반복되던 주인공의 삶을 재현하는 소설의 구조, 도덕적이고 교화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시대의 어리석음과 문제점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다고 설명한다. (출처 : http://blog.naver.com/ace/60192538782)


소설을 읽을 때는 몰랐는데, 보바리즘이 장착된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몰고가는 리뷰어들의 탁월한 해석을 접했을때는 사실 겁이 났다. 나 역시 <모바리즘>을 갖고 있는 듯 했고, 그렇기에 그녀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에. '바람녀가 마지막에는 음독자살을 했다'라고 정리되는 소설 하나에서 '나는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혹은 '내가 혹시 지적허영의 보바리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하게 해 보게 할 줄은 몰랐다. 새삼 이 소설이 위대하게 느껴진다. 혹시 이런 사유를 갖게 하는 것이 고전문학이 가진 힘 중에 하나라고 해석해도 되는걸까?



6.

고전문학을 읽는 기회가 많아졌다. 심지어 학창시절때 보다도. <고도를 기다리며>, <아내들의 학교>,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등등. 몇 권의 책을 읽으며 얻은 유익으로는 의외로 고전문학이 딱딱하기보다는 나름 읽히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수백년을 내려온 고전문학이 갖고 있는 그 위대함에 탄복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점차 고전문학이라는 신대륙을 탐사해 나가는 과정임엔 틀림없다.


소설이 가진 위대함은 해석을 곁들일 때야 비로써 알게 되는데 이런 역량부족에 대한 아쉬움보다 '고전문학 까막눈을 탈패했다'라는 만족감이 더 크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우 한 명이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뽑았다고 했다. 그녀가 무슨 연유로 올해의 책을 뽑았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이 책이 강력한 올해의 책 후보가 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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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2014-08-2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서 스포를; 이미 책은 있기에 괜히 들어왔다는 생각이군요.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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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를 읽기에 앞서 '이번에는 어떤 책을 읽어볼까?'를 잠깐 고민했습니다. 마침 <마담 보바리>를 읽었던 탓인지 세계문학의 힘에 감명/감화되어 이 흥분을 멈추고 싶지 않아<달과 6펜스>를 바로 집어드는 객기를 부렸습니다. 다행히도 이 객기는 실패가 아닌 성공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저의 독력이라기 보다 서머싯 몸이 흥미로운 도입부를 시작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전개한 덕택이지만.


<마담 보바리>와 <달과 6펜스>라는 두 권의 세계문학을 읽고 나니 불혹의 나이에 문학소년이 된 듯한 미친 차아도취가 일더군요. 미쳤지요. 그것도 확실하게 미쳤지요. 2주 동안 읽은 이 두 권의 책은 유흥과 저속한 쾌락에 빠져있는 평범한 한 샐러리맨을 자기도취에 빠지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과장스러움이 조금 느껴지지만 어쨌든 글을 이어보겠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왜 제목이 '달과 6펜스인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그 궁금증은  책이 주는 스토리에 묻혀 어느샌가 사라져버립니다. 증권회사에서 일하는 40대 평범한 가장이 수많은 루머에 쌓인채 돌연히 그의 아내와 가족들을 버리고 떠난다는 강력한 호기심을 들게 만드는 이야기로 책은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평소 그에게는 화가가 되겠다는 꿈에 대한 동경도 없었을뿐더러(사실 밝히지 않은 셈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서 그림에 대한 재능을 발견할 수도 없었지만 그는 처자식들을 버려두고 떠납니다. 그가 가진 재산들을 소유하지 않은 채...


그는 강력한 대답으로 떠난 이유를 말합니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대형서점에 깔려 있는 수많은 자기계발서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동기부여의 멘트가 있단 말인가?'

샐러리맨의 생활을 벗어나 1인 기업가를 꿈꾸고 있는 제게 이 대사가 주는 무게감은 상당했습니다.

그 페이지의 책장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소설이지만 자신이 추구하려는 그 한 가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몰입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삶을 대하는 의식에 대한 일침을 해왔습니다.


<달과 6펜스>는 자신이 가진 예술에 관한 열정을 추구하기 위한 한 남자의 삶을 제3자의 인물을 빌어 추적하듯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소설입니다.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그림을 남에게 보여주지도 않을 뿐더러 화가로써의 명성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작가는 철저하게 예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술에 관한 열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은 화가 고갱의 삶을 모티브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고갱은 소설과 똑같이 말년에 타이티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 했지요. 이 소설이 출간된 이후, 타이티는 인기있는 여행장소로 주목을 받기도 했고.


시종일관 중반부까지 책은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철저한 이기주의적 행동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처자식을 내팽겨치고 갑자기 떠난 점이라든지 다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간호해 치유시킨 부부의 가정을 파괴하고도 모자라 그 부인을 음독자살로 몰아간 점이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적인 꿈을 쫒기 위해 제도화 된 규율과 일상에서의 관습에 지나칠 정도로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술을 추구하려는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얽매인 관습과 사회화 된 시선으로 그의 인간됨을 비난한다는 것이 다수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대목은 이 책에 대한 수많은 리뷰 중에서 가장 많은 이슈와 논란을 불러오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예술을 위해서라면 일상의 책임과 관계들을 모두 희생할 수 있는가? '

'또 그것이 정당한 것인가?'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들 말입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써의 역할이라는 페르소나를 쓰며 살아가는 우리로써는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행동이 달갑지 않게 느껴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가진 기질과 비슷한 점이 많았는지 주인공의 입장에 많은 것이 동화되어 책을 읽었습니다. 사실 <마담 보바리>를 읽을 때도 주인공 엠마가 가진 욕망과 쾌락에 대한 동경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느낀 것처럼 말이지요. 


네이버 캐스트에서 소개하는 <달과 6펜스>에서는 또 한가지 의미있는 해석을 곁들입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가 극점에 이르는 과정에서 주변의 인물들이 다 미학적인 희생양이 된다는 점입니다. 20년 이상을 같이 살았던 전처는 속물의 전형으로 비춰지고, 같이 그림을 그렸던 동료화가는 사람은 좋았지만 화가로써 열정과 재능이 없는 한심한 화가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릭랜드 본인도 문둥병이 걸려 마지막에는 눈이 멀면서까지 대작을 그린 후, 자신과 그림을 불태우게 합니다. 극단적인 예술의 모습이 경이로움을 넘어 소름이 끼칠 정도 처절한 열정에 내 감정이 동화되지요..



마지막으로 제목에 대해 이야기 하며 마치겠습니다. 달은 추구하는 꿈을 상징하고 6펜스는 현실을 상징합니다. 

'예술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는 과연 양립할 수 없는가? '

'예술가는 도덕과 관습으로부터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가 서머싯 몸이 <달과 6펜스>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마담 보바리>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쾌락에 탐닉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달과 6펜스>에서는 '예술(내게는 꿈)을 추구하는 삶과 일상에서의 균형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고민하게 해 주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생의 화두를 소설 2편에서 진하게 배운 셈이지요.


책을 덮고 고갱의 그림을 감상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아쉬움이 가득했습니다. 그의 열정이 가득담긴 그림을 전시관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니터로 볼 수 밖에 없었음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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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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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민들이 가득한 동북지역에서 소위 부르주아의 자식으로 태어나 살아야했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부끄러워했고, 타인의 만족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유년기시절부터 다섯번의 자살을 시도한 끝에 성공(?)했던 삶을 마감한 그의 인생 이야기가 내가 읽었던 <인간실격>의 줄거리였습니다. 


작가의 삶과 작가의 상상력이 뒤범벅 되어 어디까지가 그의 삶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대체적으로 이 소설은 자신의 수기가 담긴 것으로 해석됩니다. 소설은 참으로 지독하게 우울하고 음침하며 기분 나쁜 느낌을 주는 책입니다. 밝은 로맨스를 좋아하는 영화광이 팀 버튼의 영화를 처음 본 느낌이랄까요. 


대부분의 경우에는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이 처한 상황의 이해와 연민의 감정이 드는데, 이 소설만큼은 징글 맞을 정도로 자기 환멸과 패배의식이 서술되어 있어 얼마 있지도 않은 내 안의 감수성을 끌어오기가 벅찼습니다. 이런 점이 위에서 언급한 느낌을 받게 한 주된 요인이겠지요. 


슬픔에 마주 칠때도, 분노에 마주칠때도 주인공은 절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사랑하는지도의심스럽지만) 여자가 능욕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순간까지도 그는 제3자처럼 행동하고 반응했으니까요. 심지어 그걸 의식하는 자신의 사유조차도 허무로 종결짓는 그 대목에서는 기가 찰 정도로 자신의 감정묘사 하고 있습니다.  


<인간실격>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때는, '어떤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제목이 붙었나?'를 생각했었지만 그걸 떠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목숨을 이렇게 헛되이 허무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측면에서 보자면 이 제목은 적절하다 싶습니다. 오히려 범죄적인 형량차원에서 이런 제목을 지었다면 오히려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지만, 자신이 태어난 것은 결정할 수 없었다'라는 문구처럼 일본 문화에서는 죽음, 특히 자살에 대해서는 약간 미화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이런 일본인들의 독특한 사고와 문화에 대해 옮긴이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자살을 종교적인 렌즈로 비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그것을 식자층들의 특유한 논리로 합리화가 있는 것은 그리 좋게 보지는 않습니다. 


'이토록 자기 환멸이 처절하게 기술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 다자이 오사무는 왜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몰 수 밖에 없었을까?'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소설은 또 다른 세상의 그저 그런 찝찝한 이야기일지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시대의 배경을 이해하고 작품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생각나 리뷰를 좀 더 붙잡아 보았습니다.


다지이 오사무가 살던 시기에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의 패망국으로써 윤리적 기반을 잃은 일본 사회의 무력함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이런 특징을 보이는 그룹(?)들이 있는데 이를 <무뢰파>라고 부릅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대표주자이긴 하지만 이외에도 몇몇의 문인들이 더 있습니다. 시대적 환경도 환경이지만 주인공이자 저자는 천성적으로 유약한 성격을 타고 난 것도 있는지라, 이 두 조건의 결합이 있었기에 이런 이야기 혹은 이런 삶이 창조될 수 있지 않았나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자기계발류가 던지는 자기긍정성, 주도적인 성취성향의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어 그 반대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겪고 있는 그 힘겨움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가정과 직장, 공동체에 대해 사유하고 비판하는 생각들을 반대 성향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책의 리뷰에는 의외로 많은 긍정적 덧글이 달려 있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공감대를 느끼게 했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에 대한 찬사가. 그 만큼 그가 처한 힘겨움과 우울한 감정들이 많은 공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그에게 쏟아지는 찬사가 다소 불편하지만 내가 감정을 필터링 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문학을 읽어내는 힘이 딸리는 것인지는 제가 좀 더 수련을 쌓다보면 알게 되겠지요.


삶이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항상 고통스러운 것도 아닐 겁니다. '인생은 순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라는 자기계발적 메시지를 쓰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를 한없이 환멸과 패배의식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이유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전후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해 모든 것이 희망 없음을 작가가 자신의 인생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말하고 싶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삶에 시대적 상황이 투영되었을 뿐이고 이를 후세 사람들이 의미를 붙였을 뿐이니까.


최근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느끼는 새로운 사실이 있는데, 

그건 바로 읽었던 책에 대한 느낌이 두 번 든다는 점입니다.

한 번은 책을 읽을 때,

또 한 번은 그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글을 쓸 때..

이런 유익이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런 지적 즐거움은 계속 붙잡고 싶은 생각이 있답니다.


한편으로는 다른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내게 이 책을 제게 권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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