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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라이프 2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평점 :
나는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니다
새로 나온 책 목록에서 이 사진을 발견했다.
증명사진보다 작은 표지사진을 보고 끌리듯 제목을 검색했다.
이 고통스러워 보이는 남자의 사진은
흑백사진을 주로 찍는 ‘피터 후자’의 1987년 작품으로
원제가 <절정에 달한 남자Orgasmic Man>라고 한다.
보는 이에 따라 고통으로도 절정으로도 달리보이는 이 남자는
<리틀 라이프>에 있어 통칭 ‘우는 남자’이다.
작가 본인이 이 사진을 표지로 강력히 추천한 만큼
소설 속 인물 주드의 현신이 나타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그가 삽화를 견디는 표정이 저렇지 않았을까.
제이비가 주드 몰래 그린 사진 속 모습이지 않았을까.
나를 책으로 끌어들인 사진 속 남자.
그리고 사진 속 남자라고 생각되는 그 인물을 둘러싼 이야기에
나는 1권을 다 읽기도 전에
내 올해 최고의 책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1천 페이지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책장을 넘기는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도입부가 더디 읽히는 듯싶더니
읽는 동안 점점 이야기의 흐름을 끊기 힘들어졌다.
대학 1년 어린 시절 인생의 친구들을 만난 네 친구.
부유한 두 흑인친구와 빈곤한 두 백인친구의 조합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려깊음으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이룬다.
뛰어난 미적재능을 가졌지만 아직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제이비.
인종차별이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부를 소유한 부모의 자식으로 열등의식이 있는 맬컴.
장애가 있던 형이 죽고 부모와 소원한 알바하는 배우지망생 윌럼.
잘생기고 머리가 좋은 자의식과 비밀투성이 법학도 주드.
가족은 있는지, 왜 몸이 불편한지,
대학 이전의 삶이 어떠했는지 궁금하지만
친구들은 주드가 불편해하는 이야기는 피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다.
고아인 주드는 어린 시절 학대와 폭행을 당하던 수도원에서 탈출하지만
호의에 굶주려 있는 그의 선택은 번번히 끔찍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제는 그 어떤 작은 호의도 믿을 수 없는,
목적이 있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이고 언제 등을 돌릴지를 기다리는 그에게
대학 입학 이후 완전 다른 세상이 나타난다.
마치 작은 동물을 보호해주는 듯한 친구들과
그에게 한없는 호의를 가진 헤럴드 교수부부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의사친구와 그 외 다른 친구들.
하지만 자신의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가득한 걸 그는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추하다고 여기고
자신이 과거를 숨기고 모든 이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유리벽이 깨지는 불안이 더욱 커지면서
그의 팔뚝에는 날카로운 상처들이 늘어만 간다.
w.1-248:20 공정함은 행복한 사람들, 애매모호함보다는 정확함에 의해 정의되는 삶을 살 정도로 행운인 사람들을 위한 개념이야.
하지만 옳고 그름은-불행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성처 입은 사람들, 겁에 질린 사람들을 위한 개념이지.
서른 살에 헤럴드의 아들로 입양되어 가족이 생기고
우정 이상의 헌신으로 그 곁을 지켜주는 윌럼이 있지만
지나온 끔찍한 과거의 악몽들이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10년, 20년 세월이 흐를수록 그 어둠들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주드의 정신을 집어삼키고
그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사과하기를 반복하게 된다.
그럼에도 항상 주드의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어
그가 삶을 마감하지 않도록 다함께 노력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작은 행복에도 불안해지는,
미소지으려 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곳곳에 배치된 우울한 암시들에
소설을 읽는 내내 아슬아슬하고
가슴이 간질간질한 불안한 느낌이 든다.
w.2-422:10 주드가 내게 어떤 존재가 될지는 절대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만, 날 어떻게 떠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내 모든 희망과 애원과 암시와 위협과 마법 같은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난 알고 있었어.
어린 아들을 잃고 주드를 입양해 무한한 사랑을 베풀지만
주드의 어린시절 트라우마로 인해
원인도 모르고 늘 주드에게 상처입고 밀어내기만 당했던 불쌍한 성자아빠 헤럴드의 말처럼
우리 역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늦게 찾아온 그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힘겹고 경이로운 인생에 놀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