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분 후의 삶
권기태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보면서 떠오른 사진이다.  

저기 눈보라가 지나간 황량한 산맥이 구불구불 엎드려있다. 그 능선을 다 오르지 못하고 넋을 잃은 사람들, 그 계곡에 쌓인 눈더미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뼛속을 에는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들......우리는 한번 태어나 한번 죽는다. 그 여로는 즐거운 소풍일 때도, 머나먼 여행일 때도, 깨달음을 주는 수업일 때도 있다. 

 

 이 책은 열두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를 방생해준 자연>에서 나오는 건 상선의 뒷갑판. 인도양 벵갈만의 캄캄한 새벽 바다를 떠가던 상선의 뒷갑판. 거기서 어느 순간 치솟아 오른 너울파도에 휩쓸려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 가운데 바다에 추락해버린 젊은 선원. 배는 하염 없이 멀어져만 가고,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살아날 수 있는가.

 그리고 <라라야, 안녕>에서 나오는 건 천지를 흔드는 천둥. '천상의 소리란 소리가 주사위만한 공간에 응축돼있다가 어느 한순간 폭발해버린 듯한, 강원도 상공의 천둥.' 그 충격에 무너져 내린 산사태에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은 덮혀버리고. '해일처럼 가혹한 흙더미에 매몰되고 나면' 사람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나. 

 그리고 <내 마음의 발가락>에 나오는 건 눈보라가 치는 높이 7000미터의 눈밭. 영하 32도의 천산산맥 포베다산. 정상 못미쳐 설원에서, 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아가며 하룻밤 노숙할 눈구덩이를 파낸 산악인. 잠시 눈 붙인 그 눈구덩이가 무너져 몸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날 수 있나. 
그리고 내 가슴을 친 이야기는 <저기 캔버스가 있다>. 학교에서 정학을 맞고 아파트 15층 높이의 한강 다리에서 떨어져 죽어버리려고 몸을 내던진 중학생. 떨어지면서 그 1초 동안 평생의 삶을 다 영화처럼 보고 생긴 후회, <아, 나는 조금도 특별하지 않구나. 내 스스로 삶을 이렇게 갉아먹고 죽어버리는구나.> 그 우라늄처럼 농축된 깨달음을, 도로 살아나서 실천하려면 이 한강물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내장은 다 파열된 상태에서.


기가 막힌 이야기들을 넋을 잃고 읽다가, 이 사람들이 다 <강변의 새나 들판의 들꽃처럼>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에 나 자신 완전히 책 속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잠시만이라도 도와주었으면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세상은 비정하다. 그래도 여기 나온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가 선한 마음을 다하면 하늘과 바다가 온갖 힘을 다해 도와준다'고. 바로 인도양에서 바다거북을 만난 청년 선원의 이야기 <나를 방생해준 자연>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우주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아무도 어쩔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우리네 삶에 벌어지곤 한다. 그럴 때마저 흐트러지지 않고 정신을 세우면, 반드시 도와주는 어떤 손길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창공에는 우리의 혹한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눈동자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눈동자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금 저 사진 속의 풍경을 내려다 보는 눈동자처럼. 우주의 섭리를 대신한 눈동자가 우리 하나 하나를, 우리 마음속의 용기와 비굴과 양심과 비열함과 희망과 좌절을 하나하나 내려다보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말로 다 못할 저 극적이고, 감동적인 일들이 어떻게 지상에서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거대한 눈동자가 우리를 그냥 봐줄까? 아무렇게나 낙점해서 도와주는 걸까? 인간들이 하는 복권이나 경마처럼? 그렇지 않다. 그건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방금 전만 해도 눈송이떼를 몰고 가는 고산 폭풍에 얼굴이 얼음에 새긴 초상화처럼 동결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부드럽고 아늑하고 편안하게 되다니. 이렇게 바람 한점 안부는 곳으로 바뀔 수 있다니. 천상에서 내려온 투명하고 따스한 방풍막이 내 주위에 에스키모의 이글루처럼 세워진 것 같았다.

‘아, 참, 좋구나. 그래, 이게 바로 사후 세계로 가는 길이구나. 이대로 가만있으면 나는 사망하고 말겠지. 그래도 여긴 정말 편하다. 참 좋아. 아까 있던 대로는 돌아가기가 싫은걸. 얼마나 추웠는데.’ 

그렇게 편안한 시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내 신경의 예민한 촉수 하나가 일어서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아주 나중에 발견됐을 것이다. 희미하게 웃음이 남아있는 편안한 얼굴로. 죽음의 진통제를 맞고 눈밭에서 동사한 채로. 얼어죽는 사람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늑하게 누운 와중에 머릿속으로 내 목소리 하나가 뜨거운 물처럼 흘러 들어왔다. 
 ‘그래도 동상 걸리면 안되는데.’ 

나는 각성제 주사를 맞은 듯이 이 말 한마디에 깨어났다. 세상과 단절된, 지옥의 북극과 같은 곳에서 편히 죽어가던 사람이 왜 동상 걱정을 했을까. 이제 곧 이승에 두고 떠날 육신인데 동상에 걸리던 화상을 입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아마 포기 못한 어떤 꿈 같은 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꿈이라기 보다는 책임감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 이대로 쓰러지면 저기 동료들이 돌아가서 내 가족을 어떻게 마주볼까. 살아, 살아나야 한다. 살아, 살아나야 한다.>

 (<내 마음의 발가락> 중에서)

저기 진정한 나 자신으로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한 인간의 초상이 담겨 있다.

 

나는 이 책 뒷표지에 나온 문장들을 내 방식대로 써본다. 

 “우주의 고요한 격려를 느껴라” “희망은 매순간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고자 할 때 우리는 그러한 격려를, 그러한 초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자정이다. 내 휴가는 정확히 하루가 남았을 뿐이다. 그 동안 책만 쎄게 읽었다. 하지만 이 책으로 내 휴가는 완성됐다. 나는 사진 한장을 찾게 되었다. 내게 무언가를 알려준 사진 한장을. 창공에는 우리의 혹한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눈동자가 있음을 알려준 사진 한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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