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사극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접했던 세종대왕의 모습은 백성을 가엽게 여기고 눈물을 흘리는 어진 성군의 이미지로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화면 속에 비친 모습은 늘 단편적이었기에 그가 이룩한 수많은 업적들이 과연 어떤 치열한 고민과 현실적인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는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박제해 놓은 자비로운 성군의 가면을 벗겨내고 철저한 실용주의자이자 국가 시스템 설계자였던 세종의 진짜 얼굴을 똑똑히 보여준다. 백성을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감정에 머물지 않고 문자와 제도와 과학 기구라는 구체적인 도구를 직접 만들어 세상의 판을 바꾸려 했던 그의 집념은 첫 장부터 내가 단순하게 알고 있던 세종대왕과 다른 모습이었다.
책에 실린 세종의 다섯 가지 경영 철학 가운데 4장에 실린 실사구시 파트에서 그의 차가운 실용주의적 면모가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 맹목적인 도덕과 명분론에 매달리던 당시 사대부들의 공리공론을 뒤로하고 오직 철저한 데이터와 통계로 세상을 통제하려 했던 통치 방식은 무척 인상 깊었다. 명나라의 눈치를 보며 대국의 달력을 빌려 쓰던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직접 측량한 칠정산을 펴내고 자격루와 앙부일구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압도적인 실력 격차를 벌려 기득권의 반대를 무너뜨리고 백성들의 실생활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 했던 세종의 치밀한 설계도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과학과 숫자로 세상을 증명해 내는 세종의 집념을 따라가다 보니 예전에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 천문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관노 출신이었던 장영실을 파격적으로 등용하여 조선의 밤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며 독자적인 과학 기술을 꽃피우던 영화 속 장면들이 책의 내용과 겹쳐졌다. 심각한 안질과 소갈증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육체가 무너져 내리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밤을 지새우며 결과를 만들어냈던 왕의 고독한 투쟁에 마음이 아팠다. 만약 세종대왕이 조금만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아계셨더라면 조선의 과학 기술과 천문학이 어디까지 눈부시게 발전했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세상이 정한 방식으로는 결코 나를 담아낼 수 없다는 감상적인 연민이나 막연한 기다림으로는 세상을 한 뼘도 바꿀 수 없다는 냉정한 진실을 일깨워준다. 세상이 정해놓은 룰에 끌려다니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 나만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안겨주었다. 교과서에 갇힌 위인의 신화를 넘어 현실의 거대한 장벽을 정면으로 돌파해 낸 진짜 세종의 면모를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