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헤어지다 죽은 여자들 - 가장 조용한 참사, 교제폭력을 말하다
경향신문 여성서사아카이브 플랫 지음 / 동녘 / 2025년 7월
평점 :
남성 독자로서 동녘 출판사의 헤어지다 죽은 여자들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마음 한구석에는 막연한 방어기제와 불편함이 자리했다. 교제 살인이라는 끔찍한 단어는 나와는 무관한 극단적인 일부 괴물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뉴스에서 종종 나오는 사건들이 떠올랐다.
이 책은 결코 남성 전체를 잠재적 가해자로 낙인찍는 고발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남성으로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거나 혹은 외면했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책이 담담하게 풀어내는 사건 기록과 유가족의 절규는 우리 사회의 이야기이며, 어쩌면 내 주변의 누군가가 겪었거나 겪고 있을지 모를 고통의 기록임을 깨닫게 한다.
일상 속에서 여성들이 겪은 참혹한 폭력의 실태와, 그 이면에 존재하는 사회적 무관심, 제도적 한계, 피해자 탓하기 문화 등을 냉정하게 비판한다.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과연 이런 문제에 아무 관련이 없는 존재일까?" 라는 자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가해나 방관에 연루된 적은 없지만 나 역시 주변에서 벌어지는 경미한 농담, 성차별적 분위기, 피해자를 향한 무심한 시선을 외면해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남성으로서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지점은 가해자들이 휘두른 폭력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쉽게 포장되고 오용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사랑해서 그랬다”는 변명, 집착과 통제를 ‘열정적인 애정 표현’으로 착각하는 자기 합리화는 비단 특정 가해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용인해 온 가부장적이고 왜곡된 관계 인식이 폭력의 씨앗이 되었음을 책은 명확히 보여준다. ‘네가 걱정돼서 그래’, ‘다른 남자 만나지 마’ 와 같은 일상적인 말들이 어떻게 상대방을 옥죄는 통제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그 경계에 대해 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제도적 문제 역시 뼈아프게 느껴졌다. 경찰과 법원은 여전히 친밀한 관계의 폭력을 사적인 갈등으로 치부하고 피해자가 신고를 반복해도 실질적인 보호 장치는 제공되지 않는다. 결국 법과 제도가 폭력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대신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이 무관심 속에서 피해자는 언제든 다음 희생자가 될 수 있다. 11번의 신고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막지 못한 시스템의 실패는 이 문제가 단순히 남녀 간의 갈등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안전망에 뚫린 거대한 구멍임을 증명한다.
책이 주는 불편함은 회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반드시 마주해야 할 각성의 계기임을 절감했다. 이는 내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다. ‘헤어지자’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그런 공포를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일정 부분 안전 이라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남성들이 더 읽어야 할 책이다. 교제폭력의 구조와 문화는 대체로 남성의 침묵과 무관심 속에서 유지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