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 - 페미니즘의 관점
김동진 외 지음, 김동진 기획 / 학이시습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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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누구나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도 생각했다. 모든 텍스트가 그렇듯 책은 독자에게 특별히 선택되어야 하고, 시간을 들여 읽어져야 하고, 읽은 내용이 머리와 행동에 남아 체화되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이 책은 더 그렇다. 더 많이 읽어져야 하고, 더 많이 시간을 들여 생각해야 하고, 더 많이 행동을 변화시켜야 한다. 가볍게 읽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책의 행보를 걱정하고 있다. 내가 누구에게 이 당의정을 강제로 입을 벌려 먹일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필요를 느끼지 않고서는 이 책을, 잠시도 딴 데 정신을 팔 수 없는 425페이지를, 요약조차 하기 어렵고 내용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할 지 막막해지는 이 내용을 읽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문제의식.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남성을 위한 부차적인 존재, 2등 시민으로 보는 뿌리 깊은 편견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수 있을지, 생각이 변화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이 사회의 젠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에게 던질 수 있을지 정말로 생각하게 되었다.

교육이란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과 성찰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교육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즉 스스로 변화할 힘을 가진 개개인이 교육 장면의 주체가 된다. 아이 둘을 키우며 나는 매일 현장 그 자체에서 살며 교육의 주체가 되고, 내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서로에 대하여 적극적인 성찰이 일어나고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변화한다.

내가 괴로운 부분은 이런 것이다. 나는 젠더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으며 교육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실생활에 왔을 때 내가 잘 해 나가고 있는지 확신을 갖기가 어렵다.

내 딸은 작년부터 머리를 투블럭 스타일로 자르고 다닌다. 이유는 그 아이 속에서 여러 갈래로 자라났겠지만, 본인 입으로 내뱉은 가장 큰 이유는 아빠와 머리를 세트로 하고 싶고, 까슬까슬한 느낌이 좋단다. 그런데 나는 정작 두려운 마음이 들었었다. 얘가 사람들에게 놀림 받거나 이상한 애로 낙인찍히면 어떡하지. 내가 여자 복장 남자 복장 경계가 없다고 너무 세뇌(??)를 시켰나 등등. 나조차도 세상이 주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어려웠다. 머리 하나 자르는데 왜 이렇게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실제로 아이가 머리를 자르고 나서 여러 불편한 지점들이 생겼다. 생면부지의 수많은 행인들이 일부러 애를 불러세워서 너 남자냐, 여자냐?’ 물어본다든지(생식기의 차이를 당장 말하라는 건가?), 놀이터에 놀러 가면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쟤 여잔데 머리 저렇게 잘랐대! 근데 또 치마 입었대!’하고 입방아를 찧는다든지, 나를 낳아준 여성과 남편을 낳아준 여성이 합동으로 왜 애 머리를 저렇게 잘랐냐, 남자 만들고 싶어서 그런거냐, 예쁜 애를 왜 저렇게 해놨냐하고 만날 때마다 일장 연설을 듣는다든지 하는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나는 그런 사소한 일상에서 오는 공격들에 솔직히 지쳤다. 그냥 머리를 기르게 만들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체 여자 모습이 무엇이고,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일까? 내 아이가 젠더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고할수록 세상에서 요구하는 어떤 기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그래서 받을 비판이 먼저 걱정되는 것은 내가 진정 페미니스트가 아니어서일까?

 

하지만 나는 안다. 단 하나의 페미니즘적 해결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나 성장, 향상, 재고, 확장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성찰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성차별적인 사회 구조와 관습을 묵인하지 않는 작은 한 발걸음이 크다는 것을.

 

내 자식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결국 모든 것은 내 문제이고 기우였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을 지켜줘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이 불편한 것처럼, 나는 아이를 내가 지켜주어야 하고 모든 공격으로부터 막아주어야 할 연약한, 나와 대등하지 못한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나보다 내 아이가 더 지혜롭게 대처했다. 모르는 할머니가 아이구~너 장군이네. 남자애라 힘이 좋네라고 하시며 칭찬하고 지나가면 할머니 뒤에 대고 메롱을 한다든지(물론 바람직하다고는 못하겠다, 그래도 속은 시원하다), 초등학생들이 몰려와 너 왜 여잔데 머리 짧아? 너 여자야 남자야?’하고 물어보면 나 여잔데?’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신나게 논다든지 하며 나보다 더 마음이 단단하고 대처가 유연하다.

 

, 나의 성생활에 대한 생각 전반을 돌아본다. 동의를 단편적인 말이 아니라 사회적인 맥락과 위계를 고려하는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 전엔 해본 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가해자중심으로 생각한 부분도 많았다. 안희정 사건 이후로 각성이 되었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그래도 좀 조심했어야 하지 않나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회 문화적 환경에 따라 관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면서도 말이다.

 

교사로서의 나의 모습도 돌아본다. 교육 현장에서 내가 얼마나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 그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물론 많은 권력을 휘둘렀다. 젠더 이슈에 눈 뜨고 나서는 내 생각이 바른 생각이라고 강하게 이야기했던 부분도 있다. 이런 내 모습이 아이들의 공감 능력을 상실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대 의견을 수용하는 것. 의견의 합치가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비판을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다양한 의견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 나의 진짜 역할이라 생각한다. 특히 공부 열심히 했다고 상으로 치킨을 시켜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던 것, 고깃집에 아이들을 데려가 배불리 먹이는 동시에 둥물권에 대해 교육했던 모순에 대해 뼈저리게 반성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폭력을 당연하게 행했던가.

 

이 책을 읽는 중에 발생했던 첫째 아이 일에 대해 쓰고 싶다. 요즘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기에 어린이 삼국유사 시리즈를 사주었다. 그 시리즈를 몇 주째 탐닉하더니 나는 커서 스님이 되겠다라고 선언했다. 삼국유사에는 도술을 부리는 여러 스님, 법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스님들의 그 능력에 감복한 나머지 장래 희망을 스님으로 결정한 것이다.

잠이 안 오는 밤, 나는 내 아이의 미래에 대하여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곤 했다. 1.내 자식이 커밍아웃을 한다면 1)대처 2)지지 방법 2. 내 자식이 학생인데 임신을 했다고 한다면 1)대처 2)지지 방법 3. 내 자식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1) 대처 2)지지 방법 등등을 머릿속에서 문서로 작성해본다. 그런데 그 수많은 미래 예측 시뮬레이션 중에 자식이 스님이 된다면이란 선택지는 없었다(우리 집은 4대째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예상을 너무나도 벗어난 자식의 발언에 나는 표정 관리를 못 했다.

으으으응, 그런데 스님 되면 너 소시지도 못 먹을 것이고 머리도 빡빡 깎아야 할 텐데……. 불경도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괜찮겠어? , 모든 스님이 도술 부릴 수 있는 건 아닌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째는 머리 뿌리는 남기고 싶다며 스님이 되는 것을 재고하기로 했다. 하지만 자식이 한 선택을 일단 지지해주지 못하고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말한 나의 이중성에 나 스스로 상처 받았다. 스님이 되고자 하는 자식의 열망은 하나의 성장 에피소드로 지나갈 수 있는 부분이었으나 앞으로 자식이 자라나며 내뱉을 수많은 말들, 내 생각에 반하는 선택들을 과연 나는 자식을 대등한 한 인간으로서 온전히 지지해줄 수 있을까. 표정으로, 태도로 자식을 배신하고 있지는 않을까.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 중에 수업 시간을 통해 배우는 건 3퍼센트 정도고, 나머지 97퍼센트는 학교 공간과 구성에서 배운다는 말처럼 나의 행동 언어는 많은 것을 자식에게 이미 말하고 있다.

 

, 외모 평가.

 

내가 가르치는 학생은 거의 여성이다. 아이들은 수업 시작 전에 외모 이야기를 많이 한다. 머리 잘랐네, 티셔츠 새로 샀네, 너 운동화 예쁘다 등등. 얼마 전 중 3 아이들과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읽고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가 뭐냐. 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냐. 만약 성별이 달라진다면 대화 내용도 달라질 것 같냐고 질문을 던졌다. 끊임없는 외모 평가 속에서 여학생들은 자신의 외모를 스스로 검열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외모 칭찬을 받으면 기분 좋다고 이야기했다. 그게 잘못되었고 이상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수업 시간이 길지 않아 일단 신체의 외형 말고 기능에 초점을 맞춰 내 팔아, 나를 철봉에 오래 매달리게 해 주어 고맙다라는 맥락으로 긴 글을 쓰게 하고 마무리했다. 그다음 수업부터 여자아이들은 적어도 내 앞에선 외모에 관련된 얘기를 하지 않으려 애쓰는 게 느껴졌고, 나도 외모에 관련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맨날 여자만 깨닫고 여자만 달라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회복 탄력성에 대해 감사하게도 되는 수업이었다.

 

 

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수많은 날들을 보냈다.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나를 자신의 자취방으로 끌고 갔던 선배와 아무렇지 않게 계속 같이 학교를 다녀야 했을 때도 그랬고, 결혼하고 나서 봤던 면접에서 결혼한 줄 알았으면 면접까지 안 올렸는데 잘못했네라는 노골적인 차별 발언을 들을 때도 그랬다. 임신했을 때도, 모유 수유할 때도, 경력 단절 후 재취업에 허덕일 때도 그랬다.

하지만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여자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야말로 가부장제 수호 끝판왕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집에서도 나는 상당히 권위적인 엄마인데 남성 권력까지 지녔으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지 불보듯 뻔하다. 이제는 주께 감사한다. 내가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연약한 타인을 이해하려 더 애쓰고, 그들의 자리에 함께 서서 연대하려 애쓴다. 귀를 열고, 배우려고 애쓴다. 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하려 애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나는 나의 페미니즘이 다만 성토대회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경험이 지식으로, 학문적 정보로 연결되고 확장되기를 바란다. 나의 불완전성으로부터 누군가가 배우는 것이 있기를 바라기에 나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부분들도 글로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한 감시자가 되어야 하며, 건강한 친밀함을 공유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희망을 잃지 않는, 함께 길을 찾아가는, 그런 엉뚱하고 단호한 길치가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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