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에 대하여
아리요시 사와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책 소개

"나는 죄가 없어요. 그저 수수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했을 뿐이랍니다."


그녀가 한 송이씩 정성껏 만들어 친구에게 선물환 조화(造花)에서는 오래도록 향기가 풍겼다고 한다. 가짜 꽃의 거짓 향기처럼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은 없다.
- 「옮긴이의 말」에서


**

도미노코지 기미코의 얘기를 듣고 싶다고요?

도미노코지 기미코. 그녀는 전후 엄청산 생활력과 사업 수완으로 '사업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명실상부 도쿄의 여왕이었다. 그러나, 모든 걸 가진 듯 했던 그녀의 삶은 떨어져 나간 한 떨기 장미꽃 마냥 함께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그녀 관계된 27명의 증언들이 하나하나 풀어져 나간다. 글에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27인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은연히 알게되는-소설가 '나'의 시점으로 도미노코지 기미코의 삶이 재조명 되기 시작한다.


기미코는 집안 형편이 녹록치 않아, 의무교육을 마치고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소녀였다. 부모님이 채소가게를 운영하고 계셨으나, 그녀는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부족한 공부는 야학으로 보충하며 세무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던 여성으로, 어떻게 보면 자수성가한 사람의 표본이요, 전후 혼란기에 능력있는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혹은 그녀가 성공 후, 매스컴을 타기 시작하면서부터-악의적인 소문들이 함께 돌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꽃뱀, 보석 브로커, 사기꾼, 워커홀릭, 복잡한 혼인관계, 비인간적인 사람... 등등......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녀의 빌딩 아래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누구 못지 않게 밤낮으로 노력하며 살았던 그녀. 키미코는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한없이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아름다웠던 한송이 장미같은 사람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속에 숨겨진 가시 같은 지독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이렇듯 27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녀에 대한 추측이 몇 번이고 번복된다. 그러나, 그 속에서 기미코는 해명이나 변명같은, 그녀에 대한 어떤 이야기는 일절 들려주지 않는다. 증언을 듣고 정리하는 '나' 역시 한 명의 관찰자 일 뿐이다.

27명의 증언을 들으며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
또, 죽음의 진상도 확실히 규명되지는 않는다. 결국 27개의 증언을 통해 그녀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그녀가 존재했던 공간, 정황들을 곱씹어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추측해 보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한 인간의 삶이 관점에 따라 어떻게 비칠 수 있으며, 시대적 배경에 따라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다가온다. 또, 책을 덮을 즈음에는, 마치 전후 일본 사회의 중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2  리뷰

바둑을 직접 두지는 않았지만, 27개의 증언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27개의 바둑알을 하나씩 다시 복기해나가는 과정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한 수, 두 수 둘 때마다 끊임없이 나를 가로막는 상대가 있는, 흑백으로 점철된 복잡한 바둑판 같은 인간의 삶을 떠올리게 해주는 그런 책이었다. 

하지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기미코'의 삶은 그냥 그 위 흰 돌도 검은 돌도 아닌, '바둑판'자체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상황에 따라 흰돌도, 검은돌도 놓을 수 있었던 능력을 겸비했던 여자. 순수와 사랑과 정의가 흰색도 검은색도 될 수 있었던 장기판. 딱 그런 느낌이었다.


27개의 변주곡
꼭, 변주곡을 듣는 기분이었다. '키미코의 인생'이라는 주제를 놓고 여러가지 형식의 기법이 적용되 나오는 변주의 연속.
앞서 계속 언급했지만, 27개의 증언이 조금씩 다르다. 물론 크게 선/악과 같이 나눌 수 있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같은 상황을 놓고도 미담 열전이 나오다가도 어떤 이는 그걸 번복해버리기 때문이다.

초반부만 보더라도, 같이 야간 학원에 다녔던 남자는 열심히 공부하던 순수한 아가씨 쯤으로 보았고. 몇 동창들의 일화에 따르면 떠돌이 동물들을 가엽게 여기는 여린 심성의 소녀였으며, 어떤 친구에게는 전후 옛 귀족가문의 향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무기력한 집안에 얹혀살며 집안 허드렛일을 도맡아주고 자신을 도와주던 착한 아이이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먼저 읽다보니, 당연히 갑자기 동거남과 일화 후에는 기미코가 약간 안타깝기도하고, 그 시대 여성들도 저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걸까. 하고 아쉬움과 같은 연민이 살짝은 서려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초반부 <바람둥이 대학생>편까지만해도 거기 나오는 남자가 키미코와 연애하고 동거까지하면서, 제 성에 차지 않는 형편이라며 다른 여자와의 미래를 꿈꾸며 만남을 지속하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이야기부터는 반전이다. 자신은 '사랑'이 전부였을 뿐이라며, 아이는 혼자서라도 낳겠다던 그녀가, 새로 결혼 살림 차린 남자의 가정에 와서 버젓이 그들의 부모 앞에 사실을 다 털어놓은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혼 소송에 위자료까지.

그리고 이처럼 '사랑'에 대한 이야기 말고도, 한 명의 사업가로써 그녀의 사업 수완과 품성에 대한 이야기도 분분히 엇갈린다. 어떤 직원들에게는 인심 좋고, 시대를 내다 보고 사업을 진행했던 뛰어난 사업가였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모조품을 교묘하게 팔고 전후 보석 가격에 대한 정보를 통해 브로커 일도 일삼았다.

누군가에겐 멋진 어머니였으나, 누군가에게는 모진 딸이자 냉정한 어머니였다.


27개의 열쇠, 타살vs자살
이처럼 하나의 사실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이어지기 때문에 이야기는 정말 지루할 틈이 없다. 다만, 어떻게 해야 되도록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걸까를 놓고 계속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 이 여자가 정말 타살을 당할 정도의 일을 행했는가. ..... 같은?

와타세 이야기까지만 보면 마치 아이를 갖고나자 버림 받은 처연한 여자의 복수극처럼 보이기도하고, 도미모토 간이치의 이야기를 들으면 지나치게 그 시대에서 요구했던 여성상으로 버림받은 불쌍한 여자가 있는 것 같기도(?)하다. 과거가 깨끗해야 한다거나, 되도록이면 혼전순결을 강요한 그 시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같은 의식말이다.

그러나, 사와야마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서운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또 마지막즈음 데루히코이야기까지 갔을 때는, 아.. 왠지 이 여자 진짜 '악녀'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친어머니의 증언이 나올 때부터 계속 찝찝했었었다.

무튼 저렇게 이야기를 떠올려보니 일단 확실한 건..... 기미코라는 여인에 대해 '악녀'라는 판단을 내리게되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타살을 당할 정도였나......까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는 것이 판단이었다.

물론 그녀가 한 짓 중에 용서받지 못할 간악한 짓도 있었지만, 범행 동기여부를 떠나서, 왠지 이 여자의 삶을 반추해보면, 본인이 내던진 것이 더 맞는 느낌이 들었다. (아...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솔직히 책 역시 답을 알려주지 않으므로, 이것 역시 독자의 몫이나, 나는 그저 둘째 아들과 간호사, 그리고 마지막에 불타올랐던(?) 남자 직원의 증언을 종합해서 나름 나만의 결론을 내렸다.


독자들이 내려보는 악녀의 정의
기미코는 단적으로 말하면 짠하고도 무섭고 나쁜 여자였지만, 동시에 당시 일본 전(戰)후 혼란스러운 시대상에 나왔던 전형적인 인물이자, 현대 사람들이 타인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떠올리게 해주는 캐릭터였다.

기미코의 죽음을 밝혀내기 위해 증언을 읽는 것도 재미있지만, 사람들로부터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구나를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몇 명의 지인들이 떠올라 소름이 돋기도 했다.

다만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극단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지, 세상에 이미 많은 '기미코'들이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다소 씁쓸한 자문도 해보고. 또, 나 역시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정당하게, 순수한 것 마냥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에겐 악녀 기미코같은 사람일수도 있는 거고.

이런 생각까지 이르다보니 왜 작가가 기미코(君子)라는 이름-작중 기미코가 너무 흔한 이름이라고 개명하고 싶다는 의지를 몇 번 내비쳤다.-을 썼는지 괜히 소름돋고 그러기도 했다.


당시 일본이 그려지는듯한 생생함
책을 읽는 내내 당시 일본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옛날 수능 공부할 나이, 현대 문학 읽을 때는 시대상을 나타내는 단어를 참으로 줄기차게 필기하고 형광펜으로 체크하고 외웠는데... 참으로 신기하다. 읽다보면 사용되는 단어 하나 하나에 당시 배경들이 묻어나온다. '지하철이 아니라 노면전차'라던지, '귀족집안'이라던지, 계속해서 나오는 '전후'라는 단어.

1950년대. 전후 패전 국가가 되면서 귀족들은 몰락하고, 민주주의가 발현하고, 혼란을 틈타 사람들의 생활상은 변화한다. 능력있는 자가 점차 부를 늘린다. 노력하지 않으면 도퇴되고, 부동산 버블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새로운 사업에 대한 논의가 생겨난다. 부동산 투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건물 양식을 세우고, 성장한 여성 사업가나 '사모님'들의 모임도 형성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도 '여성'에 대한 시각이 매우 보수적이다. 아직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능력있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며, 남자는 매춘부를 사더라도 여자는 정조 관념이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도 은연중에 살짝 나온다.

이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다보면, 가끔 소설 분석하다 으레 나오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 현대인의 혼란스러운 삶을 대변하는...'어쩌고 하면서 인물 분석을 하던 내용이 기미코에게 투영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보면 착한척, 가식과 위선으로 휘감은 허식의 여왕이기도 했지만, 기존의 것이 뒤엎이고, 성공의 기회가 사방에서 움트던 혼돈의 시기에, 자기 나름의 '이상향'을 쫓던 여자가 자신의 이상에 갇히고 말아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타/마무리
책 읽는데 3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책은 정말 술술 읽혀들어간다. 사람마다 증언이 다르니 27가지의 이야기가 들어있고, 어느 순간부터는 죽음에 대한 진실도 진실이지만, '도대체 이 여자 어떤 여자야?'라는 생각 때문에 책을 놓을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책을 읽으면서 드문드문 떠오른 몇 명의 지인들도 있고...... 가령 부모님들은 마냥 순수하고 어린 줄로만 아는데 속은 능구렁이 몇 백마리나 여우가 자리한 사람이라던가, 다른 친구들은 마냥 착하고 베푸는 거 좋아하는 걸로만 아는데, 어이없는 이유로 나를 몰아갔던 한 친구라던가....(물론 이건 내 글만 읽고는 판단할 수 없는 내용!)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기미코였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나를 담았던 시선 속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또, 나 역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내 딴에서는 '옳은 방법, 선한 방법'이라고 치부했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무책임한 행동, 하지 말았어야 했던 행동'으로 비치기도 했었으니. 그런 인간의 내면이나 행동들도 녹아 있어,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줬다는 점에서 좋은 작품이었다.
 
아, 여담으로 책을 읽는 동안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미스리플리>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드라마는 보지 않았고, 궁금해서 검색해보다가 저 단어를 알게 되었는데.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마음속으로 꿈꾸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뜻하는 용어이다. '리플리 병' 또는 '리플리 효과' 라고도 한다. 성취욕구가 강한 무능력한 개인이 마음속으로 강렬하게 원하는 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에 직면했을 때 많이 발생한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어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다가 상습적이고 반복적인 거짓말을 일삼으면서 이를 진실로 믿고 행동하게 된다.
- [네이버 지식백과] 리플리 증후군 [Ripley Syndrome, ─症候群]


계속해서 자신의 친어머니를 양어머니라고 소개하던 키미코, 그리고 이제 재력가가 되었지만 은연중에 의무교육밖에 받지 못했던 자신의 학력을 꺼내며 굳이 수그리던 그녀의 모습들. 그녀가 귀족가문의 사생아는 아닐까 하던 소문들. 그녀와 조화. 그리고 후반부에 나오는 둘째 아들의 이야기. 아름다운 곳에 닿고 싶었던 엄마의 모습.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들이지만, 모든 것들이 교묘하게 맞물리는 느낌이 들어 아연하면서, 약간의 소름이 돋기도했다. 아, 혹시 이 여자 실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열심히 살면서 극복해보려다가 되려 병적으로 살아온 게 아닐까. 

옮긴이의 말에 가짜 꽃의 거짓 향기 ...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조화가 그렇게 상징적인 것일 줄은 몰랐는데, 책을 끝까지 완독한 지금은, 기미코에게 가장 어울리는 꽃이 아닐까 싶었다.

이처럼 읽는 동안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만드는 오랜만의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


<본 서평은 현대문학(출판사)의 문학독후로 활동하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