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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의 잭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의 대표적인 추리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책 읽는 자로서 각 분야, 국가의 대표작들을 읽어보고 싶은 욕심과 추리소설 입문작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비록 선택이 실패하긴 했지만.
이 책의 사건들은 스키장에서 벌어진다.신게쓰 고원 스키장에 한 통의 협박메일이 왔다. 환경파괴라는 핑계거리로 스키장에 폭탄을 설치했으며 폭탄을 터트리지 않는 조건으로 3천만 엔을 요구한 것이었다. 쿠라타 매니저는 경찰에 알려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높으신 분들의 결정으로 협박범에게 3천만 엔을 넘겼다. 하지만 범인은 추가로 돈을 더 원했고 다시 3천만 엔을 바랬고 이젠 경찰에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스키장 관계자들은 그들의 요구를 한 번 더 들어준다. 그렇지만 범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5천만 엔을 더 요구하고 그들에게 돈을 배달하는 과정에서 협박범에 대한 실마리를 얻으려는 사람들의 추적으로 인해 '관객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거래를 유보한다. 그리고 다음 돈 배달에서 패트롤 요원 네즈와 그를 돕는 치아키에게 덜미를 잡혀 범인이 밝혀진다. 그리고 숨겨진 반전으로 진짜 흑막이 밝혀진다.
'차가운 눈에 둘러싸인 뜨거운 서스펜스!'라고 출판사 측에서는 이 책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완독하고 난 후 전혀 이 문구에 동의하지 못했다. 또한 '협박범과 목숨 걸고 벌이는 레이스가 시작된다!'라는 설명도 동의 불가하다. 서스펜스의 뜻은 줄거리의 전개가 관객이나 독자에게 주는 불안감과 긴박감인데 이 책에서는 그런 면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숨 걸고 벌이는 레이스도 아니다. 애초부터 추격하는 작품 속 인물들도 목숨을 걸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며 독자가 보기에도 목숨까지 걸고 있는 상황과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책에 대한 출판사 소개가 이렇게나 터무니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책에 대한 별점을 반 개 밖에 주지 않았는데 책은 물론이고 많은 종류의 리뷰를 쓰면서 별점이 반 개인 경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나는 왠만하면 별점을 후하게 주는 편이다.
그렇다면 이런 초라한 별점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거야 당연히 책이 재미 없이 때문이다. 리뷰이니 만큼 이 책이 왜 재미 없었는지 요모조모 따져보기로 하자.
우선 첫 번째. 스토리가 지루하고 긴장감 제로의 전개다. 이 책의 페이지 수는 439p다. 꽤 긴 소설인데 그 소설의 절반 이상을 작가는 사건 나열만 하고 있다. 스키장에 협박메일이 오고 협박범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치지 않고 또다시 협박해오는 내용. 단지 책의 줄거리만 서술하고 있다. 사건과 얽힌 인물들은 각자의 행동을 취하지만 내용 상에 들어가기 위한 의례적인 반응일 뿐이다. 이 책은 장르는 분명히 '추리'이건만 어떤 등장인물도 추리를 하지 않는다. 좋은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손을 거쳐서 캐릭터가 작가의 극 중 의도를 위한 중요한 열쇠가 되는데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그저 작품 속 사건에 평면적인 '반응'만 할 뿐이다. 게다가 페이지 절반 이상이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나열만 하고 있으니 긴장감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작품에서의 '사건'이 워낙 충격적이거나 다른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것이었다면 달랐겠지만 추리소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협박 사건인데 이래저래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수준의 서술을 누가 긴장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초라한 반전과 복선은 물론 개연성 없는 스토리. 뜬금없는 결말이다. 이것은 이 책이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더 부각되는 문제인데 스토리마저 지루한데 복선이 있을 성 싶긴 하지만 복선과 개연성이 미비한 정도를 넘어서 아예 없다. 복선과 개연성이 없으니 결말은 뜬금없을 수밖에 없고 반전 또한 별 볼 일 없다. 게다가 이 책의 반전과 결말은 책의 후반 단 몇 페이지 안 되는 선에서 작성된다. 마치 "옛다, 결말이다."하고 툭 결말을 던져버린 듯한 느낌이다. 실제로 작가가 "옛다, 결말이다"라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쓰진 않았겠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은 나는 작가에게 배신감까지 느꼈다. 스토리가 부실하고 결말이 뜬금없는 것은 상관 없다 치더라도 성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고 저런 일이 있었는데 해결이 됐어요'라는 추리소설로서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B급도 안 되는 결말. 이런 결말이 기대 만발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니 실망감이 극에 달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설가의 다작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작하는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어보면 '깊이'가 덜 느껴진다는 기분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도 대표적인 다작 소설가다. 상관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추리소설로서의 '깊이'인 거미줄과 같은 쫀쫀한 복선과 놀라운 반전. 그로 말미암은 장르 소설의 재미를 이 책은 적어도 나에게는 주지 못했다. . 다음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또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더 깊이 있는 소설을 써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