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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 아노크라시, 민주주의 국가의 위기
바버라 F. 월터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평점 :
➰제목: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How Civil Wars Start)
➰지은이: 바버라 F. 월터
➰옮긴이: 유강은
➰펴낸곳: #열린책들(@openbooks21)
이토록 시기적절한 책이 또 있을까 싶다. 2024년 12월 3일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들려온 소식, 바로 ‘계엄령 선포’다. 늦게까지 쉬이 잠들지 못했다. 실시간 소식이 궁금했다. 마치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았다. 현실이 쉽사리 살갗으로 와닿지 않았다. 다행히도 12월 4일 4시 30분, 계엄령은 풀렸다.
🔖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언제나 평화가 지배할 것이라고 믿어 왔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제도는 흔들림이 없고, 우리 국가는 예외적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시민으로서 우리가 가진 힘을 알아야 한다고 배웠다. - 17쪽
1987년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부당함을 눈뜨고 보지 못하는 성미를 가진 국민들이 정부가 민주주의를 뒤엎으려는 행동을 한다면 광화문 광장을 촛불로 가득 채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평온하다고 생각할 때 위기가 온다. 그리고 그 위기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는 실제로 일어났던 굵직한 내전을 예시로 들어주며, 끔찍한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배경을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후세인의 부재 이후 민주주의를 기대했던 이라크가 내란의 늪에 빠진 이유, 세르비아인들에 의한 무자비한 무슬림 학살이 자행되었던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다수의 수니파가 지배세력이었던 소수의 시아파의 독재에 불만이 터져버린 시리아의 내전, 텔레반이 점령해 버린 아프가니스탄, 가짜 뉴스와 혐오주의가 SNS를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후의 끔찍한 결과를 보여준 미얀마의 내전.
그리고 미국. 현재 미국 역시 내전의 색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코로나 때 락다운(봉쇄) 정책을 반대하며 모인 ‘기독교 백인 남자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극단주의 단체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수장은 바로 트럼프다. 저자는 현재 미국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년 말 읽었던 #더글라스케네디 #장편소설 #원더풀랜드 의 배경이 곱씹어졌다. 소설 속 미국은 2036년 분단된다. 연방공화국과 공화국연맹으로. 이념과 종교의 갈등과 대립은 미국을 결국 갈라놓고 만 것이다. 미국 분단의 기운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다.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읽고 다시 미국이 분리되는 과정을 읽어보니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들기 시작했다.
🔖 전문가들은 이런 중간 구간을 통과하는 나라를 <아노크라시 anocracy>라고 부른다. 완전한 독재 autocracy도, 민주주의 democracy도 아닌 중간 상태를 가리킨다. - 32쪽
내전은 바로 아노크라시 단계에서 일어난다고 저자는 누차 강조한다. 이 단계에서 정부는 가장 허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에 도전하고자 하는 반군 세력들이 쉽게 힘을 기를 수 있지만 정부는 이들을 제어할 권력과 군사력이 부족하다.
20세기 초 내전은 대부분이 이데올로기나 계급에 의한 것이었다. 20세기 중반부터는 종족, 종교 집단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 들은 <파벌>을 만든다.
🔖<파벌화되었다>고 간주되는 나라들에 존재하는,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당들은 대개 비타협적이고 유연하지 않다. - 60쪽
이런 파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견고히 굳혀간다. 그리고 이들이 정치인을 지지하는 순간, 그의 추종자가 되어 다른 집단을 배제시키고 파괴하고 군림하고자 한다. 이해관계가 맞는 파벌과 기회주의적 지도자가 만났을 때 내전의 도화선에 불이 붙는다. 그리고 이런 지도자들은 대체로 <종족 사업가 ethnic enterprenuer>다. 기꺼이 다른 집단의 차별과 배제를 위해 특정 집단을 이용하고, 집단들 사이에 공포를 조장하며, 한때 주류 집단(mainstream)이었던, 그래서 잃어버린 지위를 되찾으려 하는 이들이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내전에 대한 통찰력과 미국을 바라보는 객관적 시선이 원더풀랜드를 탄생시켰다. 소설 속 미국은 결국 분단되고 만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내전을 예방하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제대로 된 지도자와 거짓 정보에 휘둘리지 않을 현명함 그리고 거짓 정보를 퍼트리지 않아야 하는 매체까지 삼박자가 제대로 갖춰줘야 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내전에서 안전하지 않다.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라 할지라도 한국은 독재 정권을 향해 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니 안심하지 말자. 언제고 내전의 나락에 빠지는 것은 한순간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