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 김춘수 탄생 100주년 기념 시그림집
김춘수 지음, 조강석 엮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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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고사 세대. 가을철이면 교내 시화전이 열렸다. 자작시 또는 유명을 떨친 시를 그림과 함께 손 글씨로 적어 패널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한다. 단골로 김춘수의 꽃이 빠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십대 후반 떨리는 가슴을 그이만큼 담백하게 담아낸 시어가 있을까 싶었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이 되고 싶다’

방과 후에 학교 도서관에 자리를 깔고 책을 읽고 매주 한 번씩 써클 모임을 하던 소년은 어느덧 반백을 넘어가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고 있다. 그 시절 내게 다가온 김춘수의 꽃은 아직(yet)인 상황이었다. 국어 시간에 색색의 형광 펜으로 그어가며 소재와 주제, 시상을 해부하듯 분석하던 땀내 나는 남자 교실의 설익음 또한 기억에 생생하다. 세월이 흘러 잊혀지지 않는 눈짓을 보낸 사람을 만나 꽃길을 걷기도 하고, 눈물을 쏟기도 했다. 이런 삶의 모습들이 모여 이야기가 되었다. 시인은 이런 미묘한 변화를 시어로 박제한다.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은 시인 김춘수 탄생 백주년을 기념한 시그림집이다. 책으로 엮은 시화집인데 여섯 분의 현역 화가들이 시상을 따라 그린 작품이라 대부분 2022년작이다. 그림마다 보고 읽는 느낌이 다르다. 김선두 화가는 화가 이중섭을 그렸다. 김춘수의 시 ‘내가 만난 이중섭’과 함께 김선두가 먹으로 그린 그림을 보노라면 이중섭의 눈물이 배어나오는 듯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한 뼘씩 지우고 있는 이중섭. 동경에 사는 아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기에. (111쪽을 보라)

김춘수는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 발간 이후 17번째 시집 ‘쉰한 편의 비가’를 2002년에 펴낸 뒤 2004년에 타계한다. 엮은이 조강석은 김춘수의 일생에 걸친 시 여정을 한 권으로 시화집으로 묶어 냈다. 목차에서 60년 넘는 시인의 발자취가 시집과 선별된 작품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워낙 긴 세월 작품 활동을 하다 보니 시인의 작품 세계 또한 변천을 겪게 되는데 부록으로 있는 ‘작품 해설’에서 길라잡이를 해 준다.

시를 좀 더 이해하고 시인이 보고 느낀 시상을 공감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의 살았던 시대와 만났던 사람. 그에게 영향을 준 책과 작가들. 살았던 동네를 찾아보는 노력들이 있다. 그런 노정의 결실이 문학과 여행이 융합된 에세이로 출간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를 사는 6명의 화가가 시인의 대표작을 묵상하며 그려낸 그림들이 독자에게 색다른 감동을 준다. 아는 만큼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시집을 넘기며 대부분 처음 접하는 작품이라 좀 더 음미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럽지만 시를 챙겨보지 않은 메마른 심성이 드러나는 셈이다. 시와 그림집에 담긴 60년 넘는 시인의 쉼 없는 창작 여정을 훑어 보며 한 작은 결심. 매스 미디어는 다이어트를 하고 여력을 책 읽기에 써야겠다는 소박한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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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은 김춘수가 1956년 버스 안에서 우연히 본 신문 국제면에 실린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소련은 1956년에 무장 군인들을 동원해 폴란드와 헝가리의 반공산주의 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김춘수가 본 사진은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어린 소녀의 것이었다. 시는 이 사건을 극화하면서 이데올로기와 폭력이 개인의 삶을 훼손시키는 현장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나아가 헝가리에서 자행된 폭력은 비단 한 국가의 특정한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한국전쟁 혹은 그 이전에라도 한국의 소녀에게도 언제나 일어날 수 있음직한 일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178-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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