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 - 작가를 따라 작품 현장을 걷다
함정임 지음 / 열림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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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이란 쉽지 않은 제목의 신간을 읽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이 바로 그것이다. 무진이란 지명은 가상의 공간이지만 작가 김승옥이 유년 시절을 보낸 전남 순천의 갯벌과 갈대밭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17년 전쯤 가을 순천만 갈대밭을 직접 걸여보고 나서 1964년작 ‘무진기행’을 다시 읽었다. 안개로 뒤덮인 무진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 배경이 되어 주었다. 또한 일상 탈츨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독자와 여행자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작품 속의 공간이나 작가의 숨결과 손길이 남아 있는 장소를 직접 가보는 것은 단순한 팬덤 그 이상으로 보인다. 이번에 읽은 소설가 함정임의 신간 ‘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은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는 문호들이 활약했던 장소와 지역을 소개한다. 저자는 직접 그곳을 찾아가 현장 사진을 찍고, 작품의 주요 부분을 소개한다. 저자는 ‘작가를 따라 그곳으로 갔고, 홀린 듯 걸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가 살았던 시카고의 골목과 멕시코, 쿠바 아바나의 바다를 찾아간다. 중학생 때 지루하게(!) 처음 읽은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는 곳엔 오늘날에도 가난한 어부가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

반백이 다 되어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니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붕어나 잉어 정도나 낚았던 나의 낚시 경험으론 거대한 만새기(dolphinfish)와의 사투가 실감이 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작가와 소설의 배경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이해의 폭이 다름을 느낀다. 소설가이자 여행자인 함정임의 내공을 쫓아가기는 쉽지 않다. 책에 소개된 작가와 작품 중 생소한 것이 적지 않다. 아는 작가와 작품이 나오면 반갑지만 그렇지 않은 챕터는 당혹스럽다. 억지로 읽고 사진을 보면서 앞으로 읽어내야 할 소설 버킷 리스트를 적어 본다. 내 뜻과 욕망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조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함을 문호들의 작품 읽기를 통해서 배운다.

책 이름 처럼 저자 함정임의 발길은 지구촌 곳곳을 아우른다. 모두 4부에 걸쳐 24꼭지를 풀어낸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에서 백야의 땅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이스탄불에서 일본의 후지산까지, 드넓은 프랑스의 들녁과 강들은 자주 보고 들어 익숙할 느낌이다. 저자의 잔잔한 설명에 마치 나른한 오후에 책을 읽으며 뜨거운 차를 마시다 깜빡 잠이 드는 듯하다. 워낙 많은 곳과 작품을 다루고 있다 보니 한 번 읽어서 소화하긴 어려웠다. 서가, 손 가까운 곳에 두고 떠나고 싶을 때마다 꺼내 읽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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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서쪽 미라보 다리 근처에 체류한 적이 있다. 춥고, 음울한 겨울이나 라일락꽃 피어나는 초여름이나 거리마다 은방울꽃을 파는 오월이나 센강 둑을 걸으며 미라보 다리 쪽을 바라보고는 했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이 내 머릿속에 없었다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13p)

누군가 고독이 원인이 되어 소설을 쓰고, 누군가 권태가 원인이 되어 소설을 읽는다. 고독이든 권태든 하루하루 소설을 쓰고, 소설을 읽는 행위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구, 모험이다. 미지의 세계는 '기억'에, 모험은 '여행'에 관계된다. 세상 어떤 소설도 이 두 가지, 기억과 여행을 근간으로 삼지 않는 것은 없다. (85p)

기다림 속에 삶은 흘러간다. 인생도 흘러간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 아무것도 없었던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작가와 작품에 새겨진 지도의 흐름을 따라간다. 태어난 곳의 침대와 방, 책상과 창, 부엌과 계단, 뜰과 오솔길, 강과 바다. 언덕과 고원, 산과 계곡, 성과 누옥, 시장과 카페, 광장과 골방, 그리고 거리, 거리들, 모두 누군가 스치듯 살다 간 곳들이다.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도 하다. (3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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