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으로 읽는 기막힌 한국사 43 - 고조선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왕을 중심으로 풀어쓴 한국사
김선주.한정수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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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호기롭게 읽기 시작했다가 신라 본기에서 멈춘 책. 삼국사기-당연히 한글로 번역된-가 생각난다. 기전체니 편년체니 하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고려 때 김부식 등이 삼국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역대 왕의 치적을 정리했다. 학창 시절 지겹게 외웠던 사람이름이나 지명들을 발견할 때는 반갑기도 했다. 수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날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와 통찰을 얻을 수 있음은 독서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시나브로 일교차가 심한 가을의 초입에 만난 책 ‘왕으로 읽는 기막한 한국사 43’은 시대 순서로 기술된 통사이다. 김선주, 한장수 박사가 공저했다. 손에 쥐고 이틀만에 완독을 했다. 여가 때마다 현대 문물의 유혹을 뿌리치고 약 4,500년 전부터 시작하는 시간 여행을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43인의 왕을 디딤돌 삼아서 당시의 정세와 문화, 경제, 종교를 간략하게 짚는다. 이 책을 따라 읽다보니 몇 년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났다.

고교시절 암기(!) 과목으로 배웠던 문교부 국사책에서는 1876년 체결된 강화도 조약이 일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불평등한 것이라고 배웠다. 12개에 이르는 조문이 왜 불평등한 내용인지 본문을 읽지 않고서 판단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한국사 검정을 준비하며 힘들었던 지점이 바로 이런 거였다. 인물과 그가 쓴 책 이름, 어떤 제도가 언제, 어떤 이름으로 시행되었는지 제목 정도만 암기하는 공부로는 역사를 해석하고 오늘의 삶에 적용하고 미래를 대비하는데는 부족할 수 밖에 없다.

두 공저자는 고대에서 근세까지 방대한 한국사를 담아내기 위해 취하고 버리는 것을 분명히 한다. 외세의 도전 뿐만 아니라 내부의 권력 갈등, 경제적 위기 등을 맞이하고 왕이 어떤 판단과 대응을 했는지를 중심으로 설명을 한다. 때문에 독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오늘날의 국내외 정세와 경제와 종교, 문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안목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읽고 배운(학) 것을 자기 것으로 익히고(습) 소화시키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내년 봄 대선을 앞둔 시점에 내로라하는 후보들이 각축을 하고 있다. 예전 왕조 시대와 달리 주기적으로 통령을 새로 뽑는 것은 분명 국가적으로 큰 일이다. 조선의 영조가 장기 집권을 하면서 탕평 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권력 다툼의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날 정당과 재벌, 언론의 관계를 꿰뚫어 볼 수 없다. 한 권의 책으로 궁금증을 모두 해소할 수는 없지만 작은 실마리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데 의의를 두고 싶다. 내년 이맘 때 다시 한 번 꺼내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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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을 축출하기 위한 나당 전쟁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무려 7년여 동안 전개되었다. 그동안 신라는 고구려 및 백제 부흥군과 결탁해 지배력을 확대하려 했다. 문무왕 16년인 676년, 나당 전쟁은 매소성과 기벌포 등지에서의 싸움으로 일단락되었다. 당시 당은 서역 토번(티베트족)의 침공으로 신라와의 전쟁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신라는 이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드디어 삼국통일을 이룬 것이다.
(87p)

통일신라 하대는 150년간 이어졌는데, 왕이 20회나 교체될 정도로 매우 혼란한 정국이었다. 반란이 많았고 정부가 이를 진압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지방에 대한 중앙의 지배력이 약해졌다. 진성여왕 3년인 889년에는 지방에서 공물과 조세가 올라오지 않기도 했다. 가뭄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도적들이 활보했다. 도적들이 해인사를 습격하자 승려들이 겨우 막아낸 일도 있었다.
중앙의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귀족들이 지방에 정착하고, 지방에서 나름대로 성장한 세력은 중앙과 연결 고리를 갖고자 모색했다. 장보고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각자 세력을 키워 독자 세력화를 도모한 이들도 있었다. (103p)

매관매직을 자행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는 물론, 국유지까지 강탈하는 비행을 일삼던 염흥방, 이인임 일당이 우왕에 의해 처형되었다. 공공의 적이었던 그들을 처형하면서 우왕은 자신감을 얻었던 걸까? 명과의 대치 상태에서 젊은 국왕 우왕은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우왕은 당시 최고 군권을 장악한 최영과 의기투합해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여기에는 명이 북원과 대치 상태에 있으므로 요동 지역에 군사를 동원하기 어려울 거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193p)

조선왕조가 외세의 통상 요구가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분석과 그 대응 방안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위정척사에 입각한 쇄국 정책으로 일관하자, 이에 반발한 고종과 왕비 민씨 및 지방 유림이 대립하면서 외척 정치가 부활하고 개화 세력이 이와 불안한 공존을 이어가는 가운데, 조정은 충분한 준비를 할 겨를 없이 서구 열강 및 일본에 개항하고 만 것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에이어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발발로 조선왕조는 새로운 시대로 강제 전환하게 된다. (311p)


동학농민운동은 반봉건, 반외세를 내세운 근대사의 중요 사건이었으나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동학농민군이 중앙의 모든 정치 세력을 적으로 돌리고 지주 및 부호 양반을 공격한 것은 전략상 문제로 보인다. 그게 지방 사회 분열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고 그에게 의지하려 한 점도 한계였다. 대원군은 봉건 왕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인물로, 반봉건을 외치던 동학농민군과는 애초에 가는 길이 달랐기 때문이다. (328-3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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