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시를 쓰세요, 나는 고양이 밥을 줄 테니
박지웅 지음 / 마음의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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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사람의 발길을 붙들어 놓았다. 세계를 누비던 비헹기도 주기장에 묶인 지 오래 되었다. 지금까지 이런 연말은 없었다. 주말이 오기를 기다렸던 여느 때와 다르게 이젠 집밖 출입을 못하고 방콕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때에는 시공을 초월한 책 속으로의 여행이 나름 의미가 있다.

이번에 만난 책은 시인 박지웅의 신작 '당신은 시를 쓰세요. 나는 고양이 밥을 줄 테니'라는 다소 긴 제목을 가진 산문집이다. 산문집이긴 한데 시도 있고 마음 푸근하게 하는 수채화도 제법 수록되어 있어 지루하지 않다. 작가는 자기의 현재 일상은 물론 과거 유년시절의 추억까지 소환해 온다. 소소한 삶의 에피소드에서 시의 주제와 소제를 끄집어 내는 방법을 알려 준다.

이 책이 흥미를 끄는 이유는 분명하다. 시인이자 작가로, 또 문학교실 강사로 살아가는 저자의 일상에서 글감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란 이야기는 짧지만 강렬하다. 도서관에서 열릴 문학 강좌에 교통 정체로 2시간 지각한 아찔한 상황을 풀어냈다. 2시간이나 늦었지만 단 한 명도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려줬다고 한다. 작가는 말한다.

'지금이라도 출발해야 하는가, 포기해야 하는가.' 갈등의 순간은 언제든지 다시 온다. 그 순간의 나는 나에게 넌지시 말을 해볼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39~39p)

분주한 일상 가운데 잠시 짬을 내서 한 잔의 차와 함께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이 책을 펼쳐 보자. 자그만치 54편이나 되는 삶의 이야기와 거기서 빼낸 비단 실 같은 시와 사색의 결과물이 산문으로 짜여 있다. 한 번 읽어보니 잠시 시간을 두고 재독, 삼독을 해야 숙성된 포도주처럼 제 맛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그만큼 삶의 단상을 글로 풀어내는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연과 인생을 함축하여 시어로 뽑아내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듯 독자 또한 그것을 복조해 내는 사색의 시간을 들여야 하지 않을까.

이런 문장을 보자.

살아가다 문득, 도시 바닥에 암매장된 '흙'을 본다. 도시의 나무들은 흙에 뿌리를 내렸다기보다는 그 위에 꽂혀 있다. 우리가 봉쇄한 땅에서 나무들은 살아간다. (230p)

작가는 이런 상황을 마치 인디언 보호구역을 연상케 한다고 일갈한다. 성분상 같은 흙일지라도 도시의 콘크리트 안에 갖힌 것과 너른 들판의 그것은 다르다. 작가는 54편의 산문을 읽으면서 각자의 삶과 인생은 어떠한지 생각해 볼 것을 생각해 보라고 독자에게 말을 건다.

작가는 또 대만 출신의 데이얀 영 감독의 단편 영화 'BUS 44'를 소개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 '왜 보고만 있는 건가요'라는 산문(172~176p)으로 깊은 울림을 준다. 자신만을 챙기기 바쁜 각박한 현대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그 피해자가 바로 나와 가족일 수도 있다는 각성이 필요하다. 마치 세월호 사고를 남의 일처럼 여기고 기억에서 소거하려는 것이 인지상정이듯. 작가는 굳센 의지를 갖고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할 이유와 가치를 찾으라고 강권한다. 이 작은 책은 가벼운 듯 무겁다.

사람의 발길과 손길과 숨결이 공포가 되어버린 시대, 코로나가 강타한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곁'과 '평범한 일상'이다. 그러고서 우리는 새삼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다' (157p)

다음날, 나는 한 통의 팩스를 전해 받았다. 차량 말소 증명서였다. 그렇게 누비라는 많은 추억을 싣고 망각의 강을 건너갔다. 누비라는 지금쯤 레테의 강가를 따라 아주 먼 길을 달려가고 있으리라. 그날 나는 추억의 필름 아래 이런 글귀를 하나 적어 넣었다.

20X 5430(1999~2013)

지구 다섯 바퀴를 돌고 벚꽃 아래 잠들다. (1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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