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기 저작 1 - 1784~1794 한국칸트학회 기획 칸트전집 10
임마누엘 칸트 지음, 김미영 외 옮김 / 한길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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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비판서 간의 징검다리 구실을 하는 단편적 논문들의 모음으로, 특히 순수이성비판의 엄밀한 이해에 도움을 주는 긴요한 몇몇 대목들이 눈에 띈다.

예컨대 <<목적론적 원리>> 말미에서는, <<비판>>을 진지하게 접한 독자라면 누구나 품어 보았을 의문점, 즉 <<비판>>의 B판 서론(서문) 중에 드러난 표면적 모순, 즉 '가변적인 모든 것은 어떤 원인을 가진다'라는 명제가 앞 단락에서는 비순수한 명제의 예로, 뒷 단락에서는 순수한 명제의 예로 제시됨에 대해 해명한다.

<<발견>>에서는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의 구분 근거 및 '어떻게 아프리오리한(백종현 선생 역 :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갖는 의의 등에 대해 보다 명확하고 상세히 논한다.

이러한 대목들은 <<비판>>의 서술의 불친절함-전략적 오판(칸트는 내용의 비대함이 이해의 명료함을 저해할까 우려해, 고민 끝에 <<비판>>의 기존 원고에서 여러 예시나 해명을 삭제하고 <<비판>>을 출판했다 밝힌 바 있다. 이는 물론 장고 끝의 악수로 밝혀졌으니, <<서설>>을 비롯해 많은 추가적 해명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에서 비롯된 난해함을 해소함에 얼마간 도움이 된다.

이러한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내가 평점을 짜게 준 까닭은 동 출판사 <<서설>>의 리뷰를 참고하면 대강 알 것인데, 이에 더해 하나 또 밝히겠다. 역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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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가 아닌 음차어 '아프리오리', '아포스테리오리' :

가끔 '이데아' 등도 잘만 쓰질 않느냐 핑계를 대곤 하는데, 결국 그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구구절절 해설 각주가 얼마나 따라 붙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라. 그런데 이 역서엔 그런 추가 설명조차 없다!

또한 idea의 경우는 그것을 번역하더라도 뜻이 잘 잡히지 않는 경우(idea의 본뜻은 '봄/보는 것/보기'이며, '象/형상/모양새/꼴', '원형', '본질', '이상', '관념', '이념' 등으로 뜻이 발전했다 한다. 이는 소크라테스 혹은 플라톤이 본래 일상어였던 idea를 자기네 철학의 핵심어로 차용한 이래 이것이 서양지성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이것에 이것을 대하는 각 철학자의 태도가 차례차례 짙게 배어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플라톤은 idea라는 말을 만물의 원형, 본질을 나타내기 위한 말로 택했으나, 몇몇 경험주의자들은 플라톤에 반대하여 플라톤적인 idea를 망상에 가까운 관념으로까지 여겼고, 칸트는 이론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으나 실천적으로는 필요한 이념으로 여긴 것이다. 맥락상 가장 적절한 역어는 바뀔 수 있다)로 참작의 여지가 있으나, 아프리오리, 아포스테리오리는 각각 선험(경험에 앞섬), 후험(경험에 뒤섬)이라는 명료한 역어가 있다. 내가 아는 한 칸트는 이 두 말을 어떤 맥락에서든 경험을 기준으로 사용한다(반례가 있다면 이 단정을 철회하겠다).

밑도 끝도 없이 음차를 고집할 이유가 있는가? 혹 칸트 전후의 철학의 맥락도 고려하느라 이데아처럼 음차를 택해야 했다든지 하는 사정이 있다면 그 해명함이 당연히 있어야 했다. 양해를 구하는 말 한 마디 없이 날고기나 먹으라고 툭 던져놓다니 무슨 배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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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선험' :

칸트학회 김상봉 선생이 내놓은 칼럼을 한창 번역논쟁이 일 때 본 적이 있다. 칸트의 transzendental은 종래 초월철학의 초월과 다르고 하이데거의 초월 개념과도 다르며, 칸트의 저작에서 칸트 고유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통상적 의미로도 사용되니, 오해를 사기 쉬우므로 칸트 고유의 transzendental에는 초월이란 역어를 쓰지 말자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공연한 걱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초월의 뜻이 갖는 이러한 사정을 해제나 주석으로 밝히고, 초월은 이처럼 다의적이다 주의를 주면 되는 일이다. 필요하다면 난언난구마다 주석을 달면 된다. 오해가 일어날 법 하면 입을 닫거나 딴 얘길 할 게 아니라 풀면 그만이다.

사실 그런 해명이야말로 '전문적' 번역을 자임한 학자의 근본적인 임무 아닌가? 설마 21세기 한국 독자들의 지능을 얕잡아 보는 것인가? 어차피 백날 말해줘도 고차원적 수준까지는 못 알아먹을 것이라 이건가?(역시 칸트학회 소속인 이충진 선생이 번역 논쟁 중 내놓은 칼럼에서 "나는 공통의 번역어를 결정하는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끝내 나의 견해를 관철시키지는 못했다. 이러한 나의 실패에는 무엇보다도 연구 책임자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선생님의 용어를 사용하면 <도덕형이상학 정초>는 <인륜형이상학 정초>가 되고 그러면 최재희 선생님 이후 지금까지 계속된 학문적 전통이 단절될 것입니다.” 독자들은 그 둘을 동일시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그의 지적은 너무도 당연했다." 감히 운운하는 대목을 보라 ! ) 

칸트학회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는지 본인들의 역어는 (19-20세기 일본 학자들의 번역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지난 몇 십 년간 써 온 그대로) 선험이다 선언만 하고서는 밭 가는 누렁소마냥 입 꾹 닫고 일방향으로 고집스레 밀고 나갈 뿐이다. 역서에서는 아무튼 아프리오리와 선험으로 하기로 했다 할 뿐 그 이상의 정보 제공이나 해명이 없다(참으로 웃긴 점은 최재희 선생이 '선천'이라 하던 것은 칸트학회에서 이번에 '아프리오리'로 하여 "학문적 전통"을 잘만 "단절"시켰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이 한참 전 칼럼이나 더 뒤적여 보면, 김 선생은 idea가 플라톤에게서 '형상'이고 로크에게서 '관념'이듯 transzendental 역시 경우에 따라 달리 번역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에 대해 난 3개의 이견이 있다.

1.난 idea를 로크에서도 형상이라 번역해도 된다 본다. 주해만 충실하다면 말이다. 관념이라는 좀 더 속뜻에 근접했다 여겨지는 번역을 취한다 해도, 일반 독자들에게는 정확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어차피 뜻이 아리송하긴 매한가지다. 오히려 평소에 주관적으로 두루뭉실하게 아는 뜻으로 대충 파악하고 넘어가버릴 위험까지 있다. 누군가에게는 관념이 망상과 동의어일 수도 있고 개념과 동의어일 수도 있고 고정관념과 동의어일 수도 있고 인상과 동의어일 수도 있다(로크의 관념은 사실 그 모든 걸 포괄한다. 마음 속에 떠오른 그 모든 것이다. 결국 그냥 象이다). 김 선생이 초월에서 우려하는 바와 같은 것이 일어난다면 어차피 이런 데서부터 일어날 것이다(사실 칸트의 대표저서 <<순수이성비판>>의 제목부터 일상어와 적잖이 괴리되어 있어 아리송한 것이다. 이것의 속뜻은 칸트가 <<비판>> A판 서문에서 밝힌 바, "이성이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서 추구함직한 모든 인식에 관한, 이성 능력 일반에 대한 비판", 따라서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 또는 불가능의 결정과 이 형이상학의 원천 및 범위와 한계의 규정"인데, 이것이 일상어 '순수', '이성', '비판'에서 얼마 만큼 유추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렇게 놓고 봐도 크게 더 이해가 가진 않는다. 최소한 칸트가 말하는 '이성', '경험으로부터 독립', '인식', '형이상학'이 정확히 뭔지 정도는 알아야 이해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착실한 해명일 뿐이다. 초월이냐 선험이냐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

2. 그럼에도, 칸트의 경우, 일부러 종래의 초월철학과 자신의 초월철학을 대비하곤 하므로 겉뜻을 분명히 살려주는 게 보다 적절하다고 본다. 그가 종래의 초월철학자들을 강하게 의식하고 초월로 초월에 정면충돌하여 자기 고유의 초월을 굳이 드러내려 하였으므로 웬만하면 그 뜻과 정황을 살려주자는 것이다.

3. 무엇보다 선험이라는 역어가 transzendental의 몫이 될 때의 근본 문제는 a priori가 옛 폭군에게 또다시 자리를 빼앗기고 정체불명의 신분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선험의 이름을 칭할 적통이 따로 있는데 transzendental이 왕위를 찬탈한 경위는 어떻게 되는가? 다른 건 다 이해해도 이것만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transzendental 쪽을 음차하거나 김 선생의 원래 방식대로 '선험론적'이라고 하는 게 그나마 낫다고 본다. 요새 일본 학자들이 하는 식으로 '초월론적'이라 해도 될 것이다(적어도 통상적 초월과 다름은 표시될 테니). 물론 어떤 것을 택하든 그 배경의 해명은 뒤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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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현 번역을 바로잡고 가독성을 높이겠다는 한국칸트학회의 포부에서 내가 기대한 것은 충실한 역주이지 번역어에 대한 교조적 아집이 아니었다. 개념어 몇 개만 자기네 취향대로 고치고, 그에 대한 주해는 없는데(주해의 태반은 칸트가 언급한 인물의 약력 등 지엽적인 정보이다. 칸트학회의 역서는 최재희, 백종현 본과 달리 각주가 아닌 미주 처리를 해놓았고, 이 때문에 나는 주석 번호를 볼 때마다 뭔가 쓸모 있는 정보를 기대하며 일일이 미주 페이지로 넘어가는 불편함을 감수하는데, 결국 별 쓰잘데기도 없는 인물 약력만 한 줄 나와 있음을 발견할 때마다 매우 실망스럽고 짜증스럽다), 이것이 어떻게 바로잡힌 것이며, 술술 읽히게 한 것인가. 맥락은 오리무중이다. 불친절의 끝이다. 비판기 초기의 칸트가 범한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나마 칸트는 끝없이 해명을 하는데 칸트학회는 끝까지 해명이 없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어차피 자존심 문제로 번역어는 돌이킬 수 없음은 안다. 최소한 제발 주해라도 신경 써 달라. 부디 일반 독자들을 칸트의 집으로 들여보내 달라. 본인들만 만찬을 즐기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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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2-04-11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날카로운 비판입니다. 수십년 전에 번역된 최재희 선생의 역본이 가독성이나 용어면에서 후속작들보다 훨 나은 실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