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송시열.. 

선조 40년 출생 . 아버지 송갑조의 고집과 스승 김장생의 예학을 계승. 인조가 죽고, 과거 효종의 사부였던 송시열이 출사. 명이 망하고 도는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소중화사상에 빠져있던 송시열은  효종의 군사력 증강과 북벌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음. 왕의 수신과 명의 은혜를 잊지않고 청과 국교를 단절하는 수준의 제한적 북벌을 주장함.  

사종지설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으로 규정. 15년후 효종비의 사망으로 효종의 정통성 문제가 다시 대두. 서인측에서 자의대비의 9개월복을 주장. 이는 경국대전에서 서자의 며느리의 복제로 규정하는 것으로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한 것으로 여겨짐. 남인과 서인의 대립으로 2차 예송논쟁. 남인의 승리와 송시열의 유배 

 남인의 성장에 위기를 느낀 숙종은 경신환국으로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재등용.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서인의 공작정치를 두고 노론과 소론으로 서인이 내부적으로 분당. 송시열은 사실상 척신과 결탁하고 공작정치를 인정하는 노론에 가담.  

숙종이 남인계인물 희빈장씨와 사이에서 난 아들을 원자로 세우려 하자, 이에반대하다 83세의 나이로 사사됨. 

송시열의 주자신봉과 예학 몰두 그리고 그의 편협함(윤휴와 송시열을 중재하기 위해 윤휴를 옹호한는 윤선거에게 '공은 윤휴과 옳으냐?주자가 옳으냐? 묻고, '그럼 윤휴와 절교하시겠소?라고 다그치는 장면이란..뭐이런 유치원생이...)이 가져온 사회후퇴란...어린아이에게 총을 들게 하지 않는 것처럼 어린아이에게는 붓도 위험하다..친일파의 계보를 추적해보면 노론으로 연결된다는 교수님의 말이 떠오른다. 송시열과 그들의 국민은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의 나라번창에 충실했던건가..??    

사회변화를 실현시키는 데 자신을 목숨을 걸었다면 송시열은 진정한 성인을 많은 백성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을 지키는데 목숨을 걸었다. 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   

공자가 말하였다.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   

 

 남북이 갈라진 마당에 서울과 지방으로 갈리고 있는 지금.  세종시문제가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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