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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발가락 사이로
이광이 지음 / 삐삐북스 / 2024년 10월
평점 :
삐삐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 입니다
세월은 아침에 세수하는 손가락 사이로 왔다가
저녁에 양말을 벗는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고 없다.
주자청처럼.
그 사이에 숨 한 뻔 쉬고, 땀 한번 닦고,
웃고, 양말 벗기 전에 술 한 잔 하고,
오늘처럼.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펼쳐든 이광이 산문집인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에 나오는 명언입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일상 곳곳에서 묻어 나오는 이야기를
심각한 일도 가볍게, 가볍지만 울림을 주는 저저만의 독특한 문체로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가발을 맞추고 낯선 여인이 '저 다음 역에서 내려요'라고 넌지시 말을 건네기를 기대하는...
헤어 소수자인 저자는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부터 유머를 장착하고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모밍아웃을 하며 헤어 소수자로서의 삶을 묵묵히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저자는 독특한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오할스님, 뻘수저, ...
허균의 한정록에 나오는 교습법이 희한해서 중학생 딸에게 "아빠 혀가 있느냐?", "아빠 이가 있느냐?" 하는 대화를 했다는 글을 읽으니 50대인 저희 남편이 중학생 둘째에게 장난치던게 오버랩 되어서 한참 웃었답니다.
무꽃
삶의 작은 부분도 함부로 넘기지 않는 어머니의 따뜻함이 묻어 나오는 무꽃 이야기에서 친정 부모님이 떠올랐어요.
이웃이 직접 농사지은 무를 받아 봉투에 넣어 두었는데 다 못쓰게 되어 버릴려고 보니 무 2개가 이쁘게 꽃을 피웠다며 그 안에서 살아볼려고 하는 것이 기특해서 베란다 화분에 다시 심어 놓은 걸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두었다고 합니다.
일전에 친정에 갔는데 화분에 못보던 꽃이 피어 있길래 물으니, 시골에서 고모가 더덕을 보내줬는데 까려고 펼쳐보니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에 껍질이 마른 것도 있어서 좋은 것들을 골라내다 꽃대처럼 보이는게 올라온 더덕이 있어서 화분에 심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 더덕이 저리 꽃을 피웠다며 좋아하셨어요.
처음 보는꽃이 저도 신기했는데, 저는 미처 사진 찍을 생각을 하지 못했네요...
황룡강 일몰
부모님이 태어나신 곳에 흐르는 큰 물줄기가 황룡강입니다.
어린 시절 명절이 가까워지면 친정 아빠는 기차표 예매를 한다고 서울역에 밤샘 줄서기를 하러 가시곤 했어요.
숨이 턱턱 막히는 호남선 열차를 타고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과 친지분들께 드릴 선물을 바리바리 지고 입석 차표로 기차에 몸을 싣고 몇시간을 가는건 여간 곤욕이 아니였어요.
며칠 지내자고 이런 고생을 오며가며 해야 하는게 잘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어느날엔가 황룡강이 내려다 보이는 야트막한 산 정자에 삼남매를 데리고 가신 아빠가 노을지는 황금들녁을 바라보며 옛추억을 이야기해 주시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가진 것 없이 무작정 상경해 하루 하루 버텨내는 서울 살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음을..
황금들녘과 황룡강 일몰이 얼마나 그리웠을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귀가
아흔넷인 선배의 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해진 후로 3년은 병원에서 3년은 요양원에 계신다고 합니다.
온종일 누워계시니 왼쪽 다리에 감각이 사라벼 버렸다고..
지팡이 하나 사다달라고 하셔서 사다 드리고 한달 후 찾아갔더니 다리를 찾았다고 하십니다.
그 지팡이로 발바닥을 만오천 번 때렸다고, 100번 때리고 작은 돌멩이 하나 놓고, 또 100번 때리고 하나 더 놓고 하면서 만오천 번을 세었더니 마비됐던 자리에 피가 돌고, 신경이 돌아오고, 감각이 생겼다고..
지팡이를 하나 더 사다 달라고 해서 선배는 양발을 번갈아 때릴 모양이다 하고는 사다드렸는데 얼마후, 요양원에서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고 급히 찾아갔더니 어머니는 다리, 팔꿈치, 얼굴에 시꺼먼 멍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침상에 내려서서 지팡이 두개를 짚고 걷다가 다리에 힘이 없어 꼬꾸라져 버렸다고.. 그냥 누워 계시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걸으려고 했냐고 물으니.. 집에 가려고, 걸어서 집에 가려고 했다고 하십니다.
시아버님 생각이 나서 울컥했습니다.
올해 아흔 셋은 아버님은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지신게 느껴지고,
혼자 지내고 계시는게 걱정될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어요.
얼마 전에도 실버타운 근처에 마트로 외출을 나가셨다가 어지럽다고 쓰러지셔서 주변에 사람들이 구급차를 불러주어 실버타운 위층에 있는 요양병원에 모셔다 드렸던 일이 있었어요.
저희 집에서 거리가 있는 관계로 우선은 전화상으로 요양 병원에 입원처리를 했는데..
한사코 집에 가시겠다고 병원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남편의 중재로 하루만 입원하시는 것으로 설득을 하고, 다음날 퇴원 수속을 하러 찾아갔어요.
식사를 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아직은 그정도는 아니야. 내집에서 죽어야지..."
어르신들은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순간 살아서는 못나오겠구나 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돌봄이 쉽지 않은 일이기에 요양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인데..
생각해 보면 어르신들은 얼마나 집에 가고 싶겠어요..
저에게도 현실적인 문제로 직면을 하니 결정내리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자의 엄니인 최봉희님은 '5·18 엄마가 4·16 아들에게'라는 세월호 참사 1년 기록 시집을 낸 시인이십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엄니와의 추억이 산문집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저자의 글솜씨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 는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하루하루가
한달이 되고, 일년이 되고,
어느덧 머리가 하얗게 세어있고, 늙음을 받아들이는 덤덤한 인생을,
잔잔한 세월을 생각해 보는 책이였어요.
그 속에 웃음을 잊지 않는 이야기가 있고, 세상을 보는 깊은 혜안이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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