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붕대스타킹 반올림 62
김하은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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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붕대스타킹 #김하은 #바람의아이들 #서평단 #서평 #책추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도 몸이 차가워지고 추워졌다. 손과 발이 시렵고 따뜻한 기운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몸에 한기가 들며 얼굴에는 인상이 써졌다. 쉽게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한숨이 깊어졌고 두통이 생겼다. 어둠이 오는 것이 두렵고 또 그런 어두운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무서웠다. 아직도 이런 사회에 살고 있구나, 여전한 사회의 어둠 속을 걸어야 하는구나. 몰입하지 않으려해도 몰입이 됐다. 이런 이야기가 더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알긋나?"
통화가 끝났다. 엄마가 한 마지막 말이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와 얼음처럼 차가운 붕대로 변해 내 몸을 감았다. 침대가 얼음장 같았다. 얇은 이불로 몸을 둘둘 말아 한기를 피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소름이 끼치도록 추웠다.(40쪽)

아무 일 없었던 거라고 우기면 되는 문제일까. 결코.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아야겠지만, 그 일을 쉬쉬 감추고 숨기는 것만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은 오히려 더 큰 상처와 고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고, 선혜의 경우 엄마의 그 말이 되려 얼음 붕대가 되어 선혜를 추운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너, 힘들었겠다."
그날 이후 내가 겪은 일들을 아는 사람들이 그랬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일찍 다니라고, 힘내라고, 잘 살라고, 미안하다고, 안 됐다고, 용감하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은 달랐다. 바로 이 말, 힘들었겠다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이 말이 듣고 싶었다.(210쪽)

선혜는 몸을 다쳤다. 하지만 몸의 상처는 회복될 수 있다. 문제는 마음을 더 많이 다쳤다는 거다. 마음이 다치면 그 상처는 오래 간다. 어쩌면 평생 회복되지 못한 채 안고 가야할 수도 있다. 그런 마음의 상처를 최대한 더 다치지 않도록, 조금이나마 아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선혜에게는 '힘들었겠다'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그 말이 필요했던 거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는 두려움과 아픔이 오히려 마음을 통해 몸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 두꺼운 검은 스타킹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추위는, 결국 선혜가 끌어안고 있던 상처와 아픔이 몸으로 나타나는 통증이 되는 것이다.

성추행 혹은 성폭행과 관련해 우리 사회는 여전히, 여자들에게 가혹하기만 한 사회다. 여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마치 남자들이 휘둘러도 되는 권력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여자에게 그 탓을 돌리기까지 하는 사회는 이제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누군가가 가하는 폭력에 무방비로 당하는 건 늘 약자의 몫이고, 그런 약자를 힘으로 내리 누르는 사회는 얼마나 낮은 사회인지. 이 소설을 읽으며 화를 참을 수가 없다. 아직도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이 또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슬프고 마음이 아팠다.

햇볕이 뜨거웠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그 더위를 꽉 껴안았다.(216쪽)

조금씩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이 되는 건 아니다. 선혜는 그 시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다만 그 시간을 스스로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지를 조금씩 배우고 알아나가고 있을 뿐이니까. 그저, 선혜가 다시 그 추위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도록 잘 지켜봐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따뜻한 햇살 안으로 선혜와 함께 들어가주는 것이지 않을까.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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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정의 위로 - 버지니아 울프에게 '자기만의 삶'으로 쓴 답장
이혜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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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정의위로 #이혜미 #이혜미에세이 #위즈덤하우스 #서평단 #서평 #책추천

한국일보 '허스펙티브' 구독 신청을 했다. 저자는 중국으로 간다지만, 그래도 내가 듣고 싶은 소식은 계속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요즘은 결이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그래서 이 책이 <잠정의 위로>일까.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삶과 생각, 발언들이 그동안 나에게도 쌓여 있던 불편한 감정들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주는 자극이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듯한 속 시원함. 어디서도 대놓고 말하지 못했던 답답함이 어느 정도 풀리는 듯한 느낌. 이 책은 분명, 위로가 되는 책이다.

'잠정: 임시로 정함'(...)
하지만 때때로 잠정은 숨 쉴 구멍이 되어주었다. 내게 잠정적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다. 정해두었지만 언제든 내킬 때에 바꿀 수 있다. 혹은 바꾸기 전까지는 일단 정해둔다.(...) 나의 잠정은 가능성, 자유, 그리고 현존(현재에 있음)과 동의어다.(262쪽)

저자가 살아왔던 삶을 통해 나의 삶도 가만히 살펴보았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떤 삶을 살아내고 있는 걸까. 나에겐 과연, 연간 500파운드와 자신의 방이 주어졌는지, 여전히 주어지지 못한 현실에서 '자기만의 방'을 갖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어쩌면 나의 삶은 결국, 저 '방'을 탐하는 삶이었던 것은 아닐지. 그런 삶을 위한 '잠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이 분명, 완벽한 삶의 형태가 되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늘 최선을. 그리고 그 최선이 다른 최선으로 바뀌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삶. 어떤 것도 정해져 있는 것은 없고, 또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삶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나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면, 잠정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이 '잠정의 삶'이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페미니스트를 자임한 그 순간부터 매사 '불편부당不偏不黨'함을 증명해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쓰는 기사마다 '가치지향적'이라는 시선이 내리꽂혔다. 한마디로 젠더 이슈를 다루는 페미니스트 기자가 쓰는 기사는 사실 중심적이지 않고 선동적이라는 말이었다.(145-6쪽)

언제까지 이래야만 할까. 어느 순간부터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경험을 꽤 오래 당해왔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무엇이 편견이고 낙인인지, 아직도 성에 따른 차별이 남아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처음부터 하나씩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데에서 힘이 빠진다. 그리고, 그 노력 자체가 무척 힘겹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힘겨운 속에서도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저자의 힘이 무척 인상적이다. 어찌 보면 저자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그 모든 것에서 힘을 들여야만 가능했던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 여전히 힘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살짝, 저자의 그 힘에 기대어 내 목소리를 내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는 '자전적 에세이'란 말을 썼다. 늘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들던 생각과 비슷했다. 에세이에는 어쩔 수 없이 글쓴이의 일상과 생각이 공유된다. 거짓으로 꾸며 쓰지 않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해보질 수밖에 없다. 생각도 마찬가지. 에세이의 생명은 자신이 이 글을 통해 어떤 생각을 전달하려는 것인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에세이에서는 저자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다. 그만큼 저자도 자신의 생각과 삶을 있는 그대로 글에 담아낼 수밖에 없다.
저자의 말처럼 이건,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이건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을 수도, 반대로 질타와 비난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책임이 따르기도 한다. 내가 하고 있는 말과 글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후 어떤 변화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인가도 잘 확인해야 한다. 그만큼 조심스럽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거침이 없다(는 느낌이 강했다). 고민을 길게 하거나 주저하는 법이 없다고나 할까.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말할 줄 아는 신념과 지식, 그리고 의지도 있어 보였다. 이 사회는 태도만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 태도 위에 그 태도를 뒷받침할 능력이 함께 있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능력까지 모두 갖추었다. 태도와 능력이 겸비되었으니, 저자의 이야기는 그만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책을 읽고 나서 저자의 팬이 된 듯하다. 저자가 갖고 있는 삶에 대한 자세도,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도, 모두 좋았다. 우선은, 저자의 중국 생활을 응원해본다. 그리고 조만간, 저자의 생각을 다시 글과 책을 통해 만나보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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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이 사라졌다 - 제25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95
김은영 지음, 메 그림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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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문이사라졌다 #김은영_글 #메_그림 #문학동네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수상작 #보름달문고 #서평단 #서평 #책추천

해리와 해수에게 일어난 일, 하루 아침에 집의 문이 사라졌다! 여기서 문은 창문도 포함. 외부와 통할 수 있는 곳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초등학생 두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어려워 보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아, 만약 내가 해리 혹은 해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처음엔 당황스럽고 놀랍다가, 점점 무서워지고, 나중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을까, 싶다. 아주 나약하고 소심한 모습.
그런데 이 책 표지 그림의 해리와 해수는 무척 당당한 모습이다. 해수는 살짝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해리의 불끈 쥐고 있는 주먹도 예사롭지 않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쳐나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 뭔가 두둥, 하고 대단한 일을 벌일 것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제목과 표지만으로도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지 무척 궁금했다. 과연 이 아이들은 어떤 결론에 다다르게 될 지 너무 기대가 됐다.

"무서운 곰에 속지 마. 문을 못 보게 되거든."(124쪽)

우리는 종종 어느 곳 하나 빠져나갈 구멍조차 찾기 어려운, 난감하고 무서운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그저 그 상황 안에서 오도가도 못 하고 있게 될 때 말이다. 그럴 때가 바로 이 아이들처럼 사방이 꽉 막힌 공간 안에 갇힌 기분이 든다. 그러면 두렵고 당황스러워 어떤 곳에서도 나갈 방도를 찾지 못하고 한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갇힌 상태로, 출구를 찾을 수가 없다. 무서운 '곰'이 저 앞에 있는 것처럼, 벌벌 떨며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문이 모두 사라진 집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기만 해야하는 것이다.

"해병이도 꽉 막힌 알에서 껍데기 깨고 나왔잖아. 문이 없으면 우리가 문이 되는 거야."(128쪽)

꽉 막혀 해결 지점을 찾기 어렵다고 미리 포기하거나 좌절하다가도, 결국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점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런 해결 지점은 보통, 매우 가까운 곳에 있으며 또한 지금의 난관에서 벗어날 방법도 자기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만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다음을 생각하지 못하는 가로막는 것이다. 당황하게 되면 알던 것도 생각이 안 나기 마련이니까.

이 이야기가 인상적인 이유는, 이 아이들은 쉽게 좌절하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어른보다 더 현명하게 지금의 상황을 인지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생각하고 해결해 나갔다. 지금의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바깥의 누군가로부터 얻으려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내기 위한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생각만 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움직이고 실천했다. 이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지금 하는 생각과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확신할 수 없음에도 도전하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 이 아이들을 칭찬해주고 싶은 지점이다.
그리고, 집 안에 갇혀 있는 동안 내내 두려움에 떨며 아무것도 못 하고 있던 게 아니고, 그 안에서 본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또 더 재미있는 것은, '해병'이까지 길러냈다는 것이다. 아이들만의 규칙을 만들고 지키고, 또 그 안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고 미래에 대한 기대까지 잃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이 두 아이들이 있는 공간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치 이리저리 벽으로 막혀 있는 미로 안에서 출구를 찾아 나가기 위해, 힘껏 달려나가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달려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더 현명할 때가 많다. 그럴 때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많은 걸 배우게 되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면 좋을 지를 해리와 해수를 통해 한 수 배웠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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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게 없던 척척박사 후안에게 닥친 끝없는 시련과 고난에 대하여
박연철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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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게없던척척박사후안에게닥친끝없는시련과고난에대하여 #박연철 #박연철그림책 #호르헤카를로스보르헤스 #문학동네 #뭉끄4기 #그림책 #서평단 #서평 #그림책추천

제목이 무척 길다. 내가 갖고 있는 책 제목 중 가장 길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어떤 그림책을 읽었냐고 누가 물어봤을 때 한 글자도 안 틀리고 잘 얘기해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따져보고 시작해야겠다. 일종의 분석이라고나 할까. 그래야 나중에라도 잊지 않고 잘 얘기할 수 있지. 다른 말로 공부 혹은 암기라고 해도 되겠다.
<모르는 게 없던 척척박사 후안에게 닥친 끝없는 시련과 고난에 대하여>는 우선 '후안'의 이야기다. 후안은 스스로 자신을 '척척박사'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모르는 게 없'으니까. 그래서 '모르는 게 없던 척척박사 후안'이다. 헌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한다. 모르는 게 '없는'이 아니라 '없던'이다. 과거형이다. 이 말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지금은 모르는 게 있다는 뜻이다. 그런 후안에게 일이 생겼다. '시련과 고난'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시련과 고난이 '끝없'이 생기는 거다. 끝없다는 말은 말 그래도 계속이란 뜻이다. 계속 시련과 고난이 '닥친'다. 그런 후안에게 대한 이야기다. 우아! 제목만으로도 너무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후안이 누구인지도 궁금하고, 어떻게 해서 척척박사가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그런 후안에게 닥친 시련과 고난이 무엇인지도 궁금하고, 이 시련과 고난을 후안은 어떻게 해결했는지도 궁금하다. 우아! 제목만으로도 할 얘기가 무진장 많다. 이럴 수 있나! 표지를 넘기지 않고도 이야기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이 책, 시작부터 무척 흥미진진하다.

"이 책을 펼까 말까 고민하고 있나요?
그럼 당신도, 끝없는 딜레마의 세계에
들어설 준비가 되었습니다."

뒷표지에 적혀있는 문구다. 앗!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지? 표지만으로도 한참을 이렇게 저렇게 궁리하고 생각하고 살펴보느라 책을 넘겨 펼치지 못하고 있는 그 마음을 단박에 눈치채고 딱 맞는 말을 하고 있다. 정말, 기가 막힌 책이구나 싶다. 그리고 눈여겨 볼 단어가 보인다. '딜레마'. 아, 이 단어를 제대로 확인해봐야겠다 싶다. 사전적 의미로는 '선택해야 할 길은 두 가지 중 하나로 정해져 있는데,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곤란한 상황.'이다. 딱이다! 둘 중 하나의 답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둘 중 무엇을 선택해도 찜찜하다. 완전한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을 선택해도 곤란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지점이다. 가끔 아이들과 대화하다보면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딱 떨어지는 답이 없는 문제가 제일 어렵다고. 그래서 수학은 괜찮은데 국어는 어렵다고, 아이들이 하소연할 때가 있다. 아, 이런 느낌인가보다 싶다. 헌데 이건 철학의 문제라서 한 차원 더 높다.

"후안,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드디어 나왔다! 후안을 딜레마에 빠지게 한 그 첫 번째 질문! 그런데 너무 낯익은 질문이다. 어렸을 때 한 번 쯤은 받아 본 질문이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가 있는 아이라면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게 딜레마구나, 한번에 알아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제목대로다. 척척박사라도 이 질문에는 답을 쉽게 할 수가 없다. 이유는, 답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딱 떨어지는 답을 갖고 있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척척박사는 어떤 사람일까? 또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무엇이든지 묻는 대로 척척 대답해 내는 사람.'이 척척박사다. 앗, 그렇다면 후안은 척척박사가 아니었나? 어쩌면 여러 방면의 척척박사가 있을 텐데 후안은 딜레마 쪽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시련과 고난'에 빠졌지.

"후안, 뭔가 어려울 때는 네 안을 곰곰이 들여다보렴.
해답은 그 안에 있을 수도 있단다."

과연 나라면 어떤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과연 이 문제는 여섯 살의 후안이었기 때문에 겪은 시련과 고난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의 나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도 망설이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한참 고민할 테니까 말이다. 이건 나이의 문제도, 경험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이런 질문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 그리고 어떤 자세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다. 그런 면에서 후안은, 해답을 찾을 수 있는 태도와 자세를 찾은 듯하다.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지! 나도 이런 문제에 어떤 해답을 찾아 나갈 것인가, 그 태도와 자세를 찾아야겠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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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차별 - 그러나 고유한 삶들의 행성
안희경 지음 / 김영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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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차별 #그러나고유한삶들의행성 #안희경 #김영사 #서평단 #서평 #책추천

<인간 차별>이란 제목이 공격적으로 들렸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인데도, 이렇게 단정지어 말하니 감정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왜 사람들은, 아니 인간들은, 인간들을 '나'를 기준으로만 판단할까. 이건 생존 본능일까, 아니면 그렇게 습득한 결과일까. 어쩌면 그렇게 습득하도록 짜여진 구조물이 인간인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그만큼 인간의 판단과 기준, 편견과 차별, 의식과 가치관이 무서울 정도였다.
제일 무서운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누군가를 겨냥한 차별의 언어라는 것이다. 나는 차별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흔히 또 별 생각없이 쓰던 말들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 그에 대한 생각조차 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결국 비효율적으로, 자신이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결코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인간의 너무도 단순하고 어리석은 지점인 것이다.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 알기만 하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알고도 그런 차별을 공공연하게 하기도 한다. 은연중에 내비치는 차별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너와 다르다, 다른 부류이니 나한테 잘해라, 내가 너보다 위다, 내가 하는 것이 다 옳다 등을 표내고 싶어 모르는 척을 가장하여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게 모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인간인 것이다.

상대를 이루는 '존재의 성질'을 어디에 하나로 묶지 않으려는 자세. 상대를 고유함 그 자체로 새로이 받아들이는 느린 마음이다.(45쪽)

모든 것의 시작은 여기에서 출발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A, 너는 B, ...... 그리고 나머지는 다 Z, 이런 식으로 구분하고 이름을 붙이려고 든다면, 그 기호 안에 사람들을 억지로 욱여넣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욱여넣는 것 자체가 차별인 것이다. 무척 단순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굳이 이름을 붙이고 싶다면 이 세상의 사람들을 구분하려는 구분 기호가 끝도없이 만들어지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사람에게는 그 부분 기호가 있는데. 김춘수의 '꽃'이란 시에 나온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라고. 각 사람의 이름이 곧 구분하려는 기분 기호인 것이다. 바로, 각 사람의 '고유함'을 있는 그대로 봐주면 된다.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이 인정이 그리도 어렵나?

한 공간에서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공간에서 아내를 생각하고, 또 다른 공간에서 이주노조에 대해 생각하는 저를 마주했습니다.(...) 사람 속에 주머니가 늘수록 생각과 표현이 다양해집니다. 슬픔을 느낄 때, 내 안의 어느 주머니에서 생각을 꺼내 극복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한테 나누어줄 수도 있어요.(175쪽)

어쩌면 하나의 주머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자기 주머니 안에 넣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것이 차별인 건 아닐까 생각해봤다. 많고 다양한 생각의 주머니를 갖고 이런 저런 경우일 때마다 각기 다른 주머니를 꺼내어 생각한다면, 각 주머니별로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는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주머니들이 쌓여 '고유함'을 볼 줄 아는 나를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많은 생각의 주머니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새크라멘트 분향소를 만들면 좋겠어요."(220쪽)
함께 준비하는 가운데 사회에서 받은 불신과 상처가 위로받기 시작했다고.(223쪽)

사람이 어리석어,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알지 못한다면, 기꺼이 경험해보면 된다. 말을 하고 실천해보면 알게 된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누군가를 위한다고 한 것이 결국은 자신을 위한 일이 될 수도 있고, 함께 한다는 것 안에서 서로가 얽혀있는 사회의 연결망과 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생각의 주머니를 갖고 살아가면 좋을지, 그 생각의 주머니를 키우고 새롭게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머무는 그곳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나와 남이 레드우드 잔뿌리가 엉키며 지탱하듯 서로 얽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240쪽)

우리는 모두, '얽히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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