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 문보영 아이오와 일기
문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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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 일기'는 낯 익은 말이다. 이미 최승자의 <어떤 나무들은_아이오와 일기>를 접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이오와'라는 지명도 'IWP' 프로그램도 마치 내가 경험했던 것인양 친숙하다. 뭔가 나도 알고 있다는 반가움 내지는 아는 척하고 싶은 충동이 불쑥 튀어나오는 느낌이라고나할까. 시인이 묵은 낡은 호텔도 30년 전 그때와 연결되며 마치 과거의 시간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신비함을 제공한다. 어쩌면 문보영 시인이 그런 느낌으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 수도. 뭔가 아이오와에서는 무엇이든 과거와 연결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새로운 곳에서 오히려 익숙한 것을 발견하는 편안함. 이것 역시 시인의 일기를 채우는 문장들의 결과 맞닿아있는 듯하다. 그래서 더 안정적인 느낌이다.
언어도 환경도 낯선 곳에서는 무엇이든 우왕좌왕하기 나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침착하고 차분하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도 공간에 적응하는 과정도, 심지어 불편함에 대처하는 자세까지도 모두 예상하고 있던 것을 하나씩 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이 아이오와와 참 잘 어울린다는,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시인의 시와 산문을 읽었고, 시인의 근황을 늘 지켜보고있는 팬으로서 시인이 자신의 공간을 이제서야 잘 찾아갔다는 느낌도 들 정도였다. 일기와 편지는 시인의 또다른 정체성을 테니까.

아이오와는 40도다.(...) 아이오와는 너무 따뜻해서 죽어버릴 것 같다. 이것이 아이오와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25쪽)

아마 나라도 최승자 시인의 일기를 전적으로 믿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따뜻해 죽어버릴 것 같은 아이오와를 나도 겪어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아이오와의 겨울은 너무 겁을 주니 싫고, 딱 40도의 저 온도에 있어보고 싶다는 마음. 정말 너무 따뜻해 죽어버릴 것 같을지, 나를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길을 걷다가 종종 놀란다. '왜 빨리 걷고 있지?' 그리고 생각한다. '달팽이처럼 걸어야지.' 풀밭을 가로지르며 휙휙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을 구경한다.(70쪽)
고시원에 살던 시절에 나는 작은 공간에서도 풍부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고, 넓은 공간에 살다 보니 부엌도 없는 작은 호텔방이 갑갑하게 느껴질 거라 걱정했다. 예상과 달리 나는 여전히 별거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다.(138쪽)

달팽이처럼 걷는 시간, 작은 공간에서도 별거 없이 잘 살 수 있는 시인의 모습이 좋다. 천천히 자신을 찾아가는 시간을 하루하루 채워나가고 있는 듯해 지켜보는 마음이 편안하다. 어쩌면 이 글이 '일기'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일기란 과거의 이야기이다보니, 기억은 미화된다고 하지 않나. 현장감은 떨어질 수밖에. 그러다보니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시인님, 아이오와 광인 같아요...
나는 왜 편안함을 느끼는 걸까? 글쎄. 사실 난 줏대 없는 인간이다. 거절에 약하고, 갈등이나 싸움의 조짐이 보이면 회피하거나 도망가는 쪽을 택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강해지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안다. 어떤 따뜻한 곳에서는 내가 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호구처럼 살아도 된다는 걸 안다.(...)
나는 강해지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변하지 않기로 한다.(208-9쪽)

시인이 아이오와에서 했던 경험들이 모두 의미있었겠지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스스로 자신을 인정했다는 점이었다. 어떤 것이 자신의 모습인지를 제대로 확인했다는 것, 지금까지의 나와 앞으로의 나에 대해 생각했다는 것. 그래서 나도 그러고 싶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이 일기를 읽어야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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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함께한 1000일 - 초대 정책실장 이정우가 기록한 참여정부의 결정적 순간들
이정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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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 중이었고, 거실 TV 앞에서 아이를 품에 안아 재우며 한참을 울었다. 그때 그 아이가 지금 고1이다.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노무현 대통령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이렇게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의 특별함이 있겠지 싶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물론 그 전에도 늘 들어오던 성품으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특별하다는 말보다 지극히 인간적이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 그 인간적임으로 그 험난한 일들을 해내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시간이 고뇌와 고난 속이었겠구나 싶다. 그리고 이만큼의 그릇이어야 가능한 자리와 위치가 있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노무현이라는 사람과 참 잘 어울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서에 나오는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라는 구절이 내 머리를 때렸다.(397쪽)
노 대통령도 독서를 좋아했고, 위원회를 설치해 학자들과 대화했다. 정책을 만들 때도 눈앞의 인기보다 논리적 타당성과 진정 국민을 위한 정책인지를 따졌다.(398쪽)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답답할 때 책을 찾는다는 것, 책에서 답을 구하고 책을 통해 다른 이들과 소통하며 그 답이 옳은가에 대해 판단한다는 것. 그래서 책 좋아하는 사람들 주변에는 역시나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런 사람들이 책으로 나누는 이야기 속에 발전적인 비전에 담기게 된다는 것. 그래서 소망하게 된다. 자신의 일이 끝나고 난 후 책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 그 소망을 미처 이루지 못한 노무현 대통령과 그 꿈을 이룬 문재인 대통령이 함께 겹쳐 떠오른다. 봉하책방과 평산책방이 함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까지.

이 책을 읽고 문득, 정치적이라는 말을 우린 어떻게 쓰고 있나 싶었다. 사전에는 '정치와 관련된 것.', '정치의 수법으로 하는 것.'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정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가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의 뜻을 갖고 있다.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정치적'이란 말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라든지 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하는 활동에 초점을 두는 경우와 인간다운 삶 영위나 상호 간의 이해 조정,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에 초점을 두는 경우다. 저자가 때때로 말하던 첫 만남에도 대뜸 반말을 했다는 대통령과 늘 친절했다는 노무현 대통령을 이 두 초점 중 어디에 두고 바라볼 것인가를 생객하봤을 때, 답은 금방 나온다.
지금까지 '정치적'이란 말을 좋은 뜻으로 사용한 적이 별로 없다. 그건 지금까지 보여준 우리나라의 정치가 이유일 것이다. 불신 가득한 국민으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니까. 하지만 모든 정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몇 명의 대통령이 있었고, 그러기 위해 어떤 과정 속 치열함이 있었는지가 이 책에 잘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전에 <대통령의 글쓰기>(강원국, 메디치미디어)를 읽고 강연을 들으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단 한 마디도 그냥 나오는 것은 없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우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주 사소해보일 수 있는 단어 하나 표현 하나였다. 모든 결정이 이리도 힘들어서야 대통령 어떻게 하나 싶을 정도였는데, 이 책은 더했다. 그나마 기록이기 때문에 몇 분의 일로 압축하여 적었을 것을 감안한다면 그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과 치열함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 그 숨어 있던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게감을 유머로 승화시켰던 노무현 대통령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을 생각하고 주변을 돌아볼 줄 알고, 때론 고집을 꺾지 않았던 인간적인 대통령. 그리고 그 옆을 충직하게 지켰던, 믿음직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정치는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당연하지만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을 읽으며 참 극한직업, 삶을 깎아 희생하려는 마음 없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감의 직업이구나 싶었다. 이들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된다. 정치를 한꺼번에 묶어 비판하곤 했던 나를 반성하면서.

덧-
그 바쁜 와중에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도 대단한 것 같다. 단 몇 줄의 일기를 매일 남기는 것조차 힘들어 가끔 밀리기도 하는 나로서는 더더욱. 아마도 학자이기에 가능한 의무감, 책임감이지 않았을까. 역사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한다는 묵직한 마음이 느껴졌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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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지만 만만하지 않습니다 - 공감부터 설득까지, 진심을 전하는 표현의 기술
정문정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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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언어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국립국어원에서 제작한 영상이 있어 함께 봤는데, 극 중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중에 말하는 직업은 안 되겠다." 친구의 능력을 낮게 평가하고 미래(직업 진로)를 저주하는 말이었다. 이 세상에 말하지 않는 직업보다 말하는 직업이 훨씬 많을 건데, 이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리고나서 곰곰이 혼자 생각해봤다. 그러고보니 나도 말하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나는 학창시절 말을 잘 하는 학생이었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았다. 늘 숨어있길 좋아하고 수업시간에 꼭 해야할 대답이 아니고는 묵음으로 대답하기 일쑤였다. 나도 때에 따라 이런 말을 많이 들었을 건데도 지금 이만큼의 말하기(누구 앞에서 말할 때, 가끔 말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를 할 줄 알게된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아무래도 대화에서 논리적으로 이기고 싶다는 욕심이었던 듯.
4년 째에 접어들었다.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쓰기 시작한 지. 책 읽기는 꾸준히 했지만 쓰기를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휘발되는 기억과 생각을 붙잡고 싶어졌다. 그래서 시작했다. 또 하나, 내가 갖고 있는 부정적이고 삐딱한 마음을 긍정적이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한결같이 나만 잘난 것처럼 생각하고 공격하기 좋았했던 나를 바꿔보고 싶었다. 이건 쓰면서 어느 정도 교정된 듯하다.

이 책은 말하기와 쓰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언어가 표현하기 위한 음성과 문자이니 당연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모두 잘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자의 능력이 한편으로는 부럽다. 그리고 그런 부러움 이면에는 인정하는 마음이 있다. 말하기 위해 또 쓰기 위해 거쳐왔던 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이런 말과 글이 가능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저 쉽게 그 노하우와 팁을 공유받고 싶은 생각으로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내가 저자도 아니면서 감히!). 이건 잠깐의 시간으로 축적될 수 있는 기술(부제에서 말한 표현의 기술)이 아니고 깊은 성찰과 노력과 실천이 바탕이 되었을 때 가능한 수준이다. 그러니 책 한 권 읽고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거라는 욕심은 금물. 대신 오랜 시간 공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시도해도 좋을 듯.

그런 면에서, 꼭 기억해두고 싶은 내용들이 있었다.

글은 어떤 '척'에서 벗어나야 쓸 수 있는데 말, 특히 강의를 할 때는 '척'의 오라를 뒤집어쓴 뒤에 연기하듯 눈빛과 손짓, 호흡과 발성을 조절해야 하죠.(21쪽)
_'척'은 솔직하지 않아 배척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헌데 가만히 보니, 사실 나도 말할 때 '척'을 참 잘 하는 것 같다. 지금껏 '척'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늘 '척' 하면서 말했던 것 같다.

글이란 게 원래 결론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지.(58쪽)
_뻔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돌고 돌아 길게 늘려 써야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생각한다. 그냥 결론만 말하면 더 간단할텐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거다. 맞다. 그게 아니다.

일상 상황에서, 특히 친분이 없는 사람과는 대화를 원활하게 이어가는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조금은 밋밋하고 무난한 대화가 계속되더라도 말입니다.(91쪽)
_내가 참 못하는 것 중 하나다. 침묵이 어색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이야기를 계속 해야하는 건 더 불편하다. 이 불편을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구나. 끊기지 않는 대화가 필요하단 말이구나.

어떤 말을 의식적으로 하다보면 생각이 그에 따라 이동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마법의 말은 두 가지입니다.
"그럴 수 있어."/"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183-4쪽)
_이 마법의 말들을 잘 보이는 것에 적어두고 잊지 말아야겠다. 나란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각종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학대와 빈곤을 경험한 아이들에게는 뇌가 빨리 닳는 후유증이 남기 쉽습니다.(...) 눈치보고 생존하는 데에만 에너지를 몰아 써도 부족한 상태니까 뇌가 금세 과부하에 걸려버리고 마는 거예요.(203쪽)
_눈치보고 생존하기 위해 뇌가 과부하가 걸릴 정도라는 걸, 읽어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그만큼 고통을 이기기 위해 우리 몸이 닳아버릴 정도로 애쓰고 있다는 것에 순간 울컥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겪는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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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되어
김아직 지음 / 사계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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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면, 이 소설을 다 읽고 책을 덮으며 피식, 웃었다. B급 SF. 이런 맛이었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어떤 말로 정리하면 좋을까 고민했는데, 이 한 마디면 모든 것을 다 아우를 수 있겠다 생각했다. 역시, B급 SF!

설정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먼지가 되어 자유로워진다. 근데 왜 하필 먼지였을까. 연기나 구름, 혹은 가루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굳이 먼지였어야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싶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먼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먼지가 나면 누구나 인상을 쓰고 코와 입을 막고, 눈을 감는다. 옷을 털고 그 곳을 피하게 된다. 진짜 사람들이 먼지가 되는 것이 좋았던 걸까. 이런 여러 부정적인 이미지의 먼지가 되는 것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산 너머도 산이고, 고생 끝에는 다른 고생이 온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기를 쓰고 지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인간의 죽음을 앞날에 기대와 설렘이 멈춘 날로 정의한다면, 오하석은 서른 살 무렵에 이미 죽었다. 오하석에겐 타르디그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115쪽)

삶의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해주는 방법, 먼지가 되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는 유혹. 오히려 세상을 떠날 수 있지만 또 세상에 있을 수도 있는 방법. 더 극단적으로 말해 자살 방지 혹은 조력으로도 보이지만 또 완전히 죽는다고 볼 수도 없으니 단정지을 수도 없다. 특히 원하는 이들에게 전파한다는 이유를 갖고 사람들에게 접근하니,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한다. 무슨 목적으로? 이때 떠오르는 단어는 사이비종교. 무척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먼지 생각을 해보면, 타르디그가 되고자 했던 사람들은 기존 삶이 어쩌면 먼지같은 삶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먼지같이, 누군가의 눈에 티끌처럼 유해하기만할 뿐 존재감은 없고 그저 이리저리 치이며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 그러니 같은 먼지라면 더 자유로운 먼지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재원은 자신이 선택한 삶으로 떠났다. 마지막 통화에서 재원은 유어에게 네 멋대로 살라고 했다. 그때 언니는 앞으로 우리의 삶이 '먼지가 될 것인가, 먼지만큼이나 불안한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라는 선택을 필연적으로 거쳐야 한다는 걸 내다본 게 아닐까. 그래서 내 선택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네 멋대로 하라고 했을 것이다.(159쪽)

결국 이 모든 것은 이 질문으로 시작해서 이 질문에 답을 찾아야 끝날 것 같다.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재원도 유어도 답을 찾았다. 그 답이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결과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차이만 있을 뿐. 그리고 그 선택에 스스로 분명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까지.

이 이후 어떻게 됐을까. 세상이 타르디그의 세상으로 바뀌었을까. 아니면 타르디그가 이 사회에서 사라지고 다시 기존의 세상이 되었을까. 어느 쪽으로든 이 세상에 먼지(먼지인간이든 혹은 먼지같은 인간이든)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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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아이들
한요나 지음 / &(앤드)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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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로 등급이 나뉘는 사회. 겉모습으로 어느 구역 출신 사람인지를 구분하고 그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사회. 나와 같지 않거나 낮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무시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 숫자와 알파벳으로 경계를 구분하는 사회. 필요에 따라서는 아이든 어른이든 이용하려드는 사회. 그런 사회 속에 하루와 주하가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사회를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빌리와 레오니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신물이 나는 킹이 있었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진정 이런 모습이라면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꿈꾸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깊은 숨을 들이쉬게 만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 모습에 대한 상상의 그림이 이렇다면, 벌써부터 숨이 막혀오는 느낌이었다.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과 그것이 먹혀들어가는 모습은, 이 사회를 더 강력한 계급사회로 만들고 철저히 사람을 줄세워 권력과 이익만으로 사회와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학습시키틑 결과를 낳았다. 사회가 숫자로 구분되어 있듯 학교의 학급도 알파벳으로 구분하여 출신과 태생에 따라 이미 서열화된 사회 안에서 이를 당연히 여기도록 교육시키고 있는 꼴이었다. 어디에서도 평등이나 공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하루나 주하가 감당해야 할 주변 아이들과 사회의 눈초리는 매서울 수밖에 없었다. 허락되지 않은 곳에 발을 디딘 다른 종족에 대한 경계와 무시, 오히려 이용하려드는 불법적인 거래는 너무도 명확한 폭력이었다. 그리고 이런 폭력을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학교와 사회였다. 가진 자들의 논리와 판단이 사회를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사회였다. 아무리 SF소설이지만, 이런 SF는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주하의 빨간 머리와 하루의 긍적적 마인드,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거리낌없이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빌리와 레오니는 그 존재만으로도 빛났다. 가만히 보면, 이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까만 머리카락으로 살고 있는 아이는 없었다.

머리칼이 콩처럼 까만 아이들은 모두 A반이었다. 콩보다 더 검은 머리칼들. 일명 대지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축복받은 학생이었다.(9쪽)

이 사회는 까만 머리여야 온전한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A반임에도 불구하고 까만 머리를 염색으로 가리고 다니는 아이들과 빨간 머리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아이, 그리고 이런 모든 아이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는 흙갈색의 아이까지. 이 아이들은 모두 다르지 않았다. 이게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든 가장 첫 번째 생각이었다. 염색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까만, 콩보다 더 까만 머리카락으로 염색하려들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여기서 한 가지 희망을 읽었다. 어쩌면, 소설 속 사회에서 더 나아간 미래를 꿈꾸는 아이들은 어른과 반대 방향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야?"
"응?"
"어른들이 다 결정하잖아."
"우리가 아닌 누군가가 결정하는 거지. 우리를 대신한다고 하지만 전혀 대신하지 못할 사람들이 대표로 정하는 거야."(244쪽)

아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의 눈에 비춰진 세상이 사실 가장 정확한 모습일 거라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이 경우도 그런 경우. '전혀 대신하지 못할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이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 거라는 것. 그런 어른들에게 이 사회를 맡길 수 없다는 것. 그러니 미래는 직접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 하루와 주하가 마음을 먹고 결심하게 되는 이 과정이 멋지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이 소설을 읽고 든 두 번째 생각. 소설 속에서 아이들은 대화 속에서 아직 어리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건 어리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가 아니라, 어리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혔다. 그만큼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주하가 COS라서,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주하든 하루든, 어느 아이가 되었든간에 이 아이들이 알아챈 자신의 마음의 크기가 이 정도로 크다면 충분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는 거다. 이 대목에서 어른들은 반성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주하가 왜 빨간 머리일까. 그리고 5구역에서 발견된 빨간 머리, 노란 머리의 다양한 머리카락 색의 아이들은 또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 보았고, 그래서 내린 답은 '무지개'. 우리는 무지개를 일곱 색깔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색깔과 색깔 사이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저 사람이 편의상 언어적으로 구분해놓은 표현일 뿐. 어찌보면 이 소설 속 경계는 무지개의 경계와 비슷하지 않을까. 사실은 명확히 구획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경계는 모호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말할 수 없다. 그건, 색깔이 어느 한쪽 끝에서 반대쪽 다른 끝까지 이어져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이 만들어나갈 사회는 무지개와 같은 사회일 수 있지 않을까. 다양한 색이 공존하고 하나의 색에서 다른 색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 섞일 수 있는 사회. 어디까지라는 부분의 차별 없이 누구나 어디에서라도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이 아이들이 찾은 것은 아닐지.

빠져들어 있었다. 청소년 SF소설만은 아닌 듯싶다. 오히려 어른인 내가 느끼고 깨달은 바가 컸다. 상상 속의 이야기이지만 지금을 살고있는 나에게도 뜨끔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었다. 공들여 읽으면 좋을 이야기였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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