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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 겐고, 나의 모든 일
구마 겐고 지음, 이정환 옮김 / 나무생각 / 2023년 1월
평점 :
건축에도 관심이 많은데 아는 건축가도 없고 해서 책을 찾아 읽지는 않았다.
건축가 또는 건축학에 대한 책이 많지도 않은 편이고. 혼자 공부하려면 참으로 어려운 게 건축이다.
이런 힘든 걸 독학으로 돌파한 안도 다다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이 책은 안도 다다오의 뒤를 잇는(스타일이나 커리어는 전혀 다르다) 구마 겐고에 대한 책이다. 책도 본인이 직접 썼다.

2021년 도쿄 올림픽 주 경기장, 와세다 대학의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 한국 관광객이 많은 다자이후의 스타벅스 오모테산도점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의 한 명으로 작고, 낮고, 느린 삼저주의로 유명하다고 한다. 도쿄대학 대학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 객원연구원을 거쳐 1990년에 설계사무소를 설립했다. 20개국에서 다양한 건축물을 설계했다. 당연히 대형 건축물 프로젝트에도 많이 참여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의 설계가 가장 유명하다.
이제 책으로 들어가 보자. 들어가며. 그러니까 prologue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여기서부터 난 참 재미있었다. 건축가의 책이니까 유명한 건축물들을 사진으로 보며 감탄하고 아름다움에 취할 생각을 했는데 건축가가 참 말도 아름답게 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담담하게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 써 내려간 글인데 뭐랄까 여러모로 공감하고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들어가며'였다. 뒤에 이어질 저자의 생과 작품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책은 총 시기에 따라 4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중간중간 작가의 작품을 여러 장의 컬러 사진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글과 사진을 같이 따라가면서 읽으면 그렇게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 사진이 없는 줄 알고 책 본문에 언급한 작품들을 중간중간 책을 덮고 휴대폰으로 찾아봤는데 그럴 필요 없었다. 뒤에 사진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만, 중간중간 언급하는 다른 건축가들의 작품은 직접 찾아봐야 한다. 예를 들어 초반에 프랭크 게리가 남루함을 무기로 삼아 모더니즘 건축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는데 스마트폰으로 직접 프랭크 게리의 작품을 찾아보니 전혀 남루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남루해 보인다는 유명 건축이 어떤 모양인지 궁금했는데 직접 찾아보니 남루는 무슨. 화려하고 웅장해서 당황. 그런데 뒤로 가니까 프랭크 게리는 점점 남루함을 잃어갔다. ㅋㅋㅋㅋ 이런 히스토리가 있었구먼.
4개의 기간은 버블경제를 경계로 1,2기. 그리고 도쿄 올림픽 공모전 스토리를 경계로 3,4기로 나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몇 군데 기억에 남는 부분은 1기에서는 '기하학의 부정' 그리고 2기에서의 노가쿠 극장 건설에 대한 이야기다. 기하학의 부정이라는 것은 전통과 과거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진다. 또 건축가라면 응당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면에서도 저자가 어떤 생각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즈의 후로고야라는 작품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글쎄...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우리나라 시골에서도 볼 수 있는 작품 같은데 ㅎ 잘 모르겠다. 앞에서 한껏 남루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니 일관성 있어서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사실 2기의 비용에 대한 부분도 와닿는 바가 많았다. 노가쿠 극장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인 방법으로 도전하면 20억~30억이 소요되는데 예산은 2억이다. 저자는 2억 예산에 맞춰서 혁신적인 방법들을 과감히 동원함으로써 1.8억에 맞춰 짓는다. 비용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누구에게나 피해 갈 수 없다. 또 여기서 흘러나오는 작은 에피소드들. 이렇게 극장을 짓고 난 후에는 무대 아래 항아리를 묻어서 소리가 울리게 하는 게 일반적인가 보다. 그런데 건축 음향을 연구하는 다른 교수님이 그런 건 사실 다 아무 소용이 없다고. 의미 없는 민간요법이나 다름없는 거였다고 설명을 해준다. 그래서 저자는 비용도 절감할 겸 항아리 없이 극장을 지었는데 역시나. 동네 사람들이 부득불 극장에는 항아리가 필요하다면서 항아리를 벽보를 붙여서 구해와서 항아리를 무대 밑에 설치한다. ㅋㅋ

필요로 하는 양보다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배치가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수거한 항아리를 전부 배치. 근데 사실 나 같아도 이렇게 일할 것 같다. 그런데 또 여기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저비용인데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라는 말은 흔히 들을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 "저비용이기 때문에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라고. 이 경험은 훗날 그의 건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4기에서는 도쿄 올림픽 경기장 설계에 대한 이야기가 역시 중요했다. 사실 나는 그가 설계를 맡은 것도 알았고, 그 이력까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서 기억이 완전히 사라졌었다. 이 책을 읽으니 다시 "아.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면서 기억이 되살아났다. 4기에서는 당연히 본래의 설계자인 자하 하디드 얘기도 나오는데 우리나라 DDP 건축한 설계자로 유명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자주 언급이 될 정도로 국제 건축계에서 유명한 인물인지는 몰랐다. 아무튼 그녀와의 차이점과 특색을 그 나름대로 차분하게 설명해 주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자하 하디드에게 설계를 맡기지 않고 구마 겐고를 다시 선정할 수밖에 없던 그 사회적 배경. 뭐 말들이 많겠지만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밖에.
이상으로 건축가 구마 겐고의 삶을 책을 통해 같이 훑어보았다.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엄청 글을 잘 쓴다는 것이었다. 역시 예술은 하나로 통하는 건가? 전혀 다른 분야인데 글까지 잘 쓰다니. 내가 알기로는 구마 겐고의 작품이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작품을 만나 보려면 적어도 일본까지는 가야 하는 것이다. 안도 다다오의 책을 두어 권 읽고 제주도 본태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신기하면서도 뭔가 교감하는 느낌을 받았다. 도쿄 올림픽 경기장을 방문하면 그런 느낌을 또 받을 수 있으려나? 어쨌든 이 책을 읽고 가보고 싶어지긴 하다. 일본이라... 일본 여행을 가야 하는 이유가 이것으로 또 하나 늘어난 느낌이다. 요새 참 많이들 가던데 나도 가보고 싶다. ㅋ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꼭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인 건축가는 없는 걸까? 아리송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