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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초록빛 - 아끼고 고치고 키우고 나누는, 환경작가 박경화의 에코한 하루
박경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평점 :
생활감이 묻어나는 진심 가득한 글에는 마력이 있다.
잊고 있던 내 추억을 환기하여
“나도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까지 도달시키는 힘.
나는 어릴 때 에코-프렌들리한 삶을 살았다.
아토피가 심했던 탓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까지 우리 집 세탁기는 탈수 용도로만 쓰였다.
엄마는 모든 의류를 작은 빨래판에 비벼 직접 빨았고
수건은 큰 솥에 넣고 푹푹 삶아 살균하는 과정을 한 번 더 거쳤다.
세탁 세제와 유연제 없이 이렇게 세탁한 옷과 수건은 아주 부드럽다.
따뜻하고 기분 좋은 햇볕 냄새가 난다.
나는 이런 식의 기억을 몹시 그리워하는 동시에 까맣게 잊은 채로 지내왔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대개는 잊은 채로 살다가
건조대에서 빳빳한 수건을 걷어서 차곡차곡 갤 때,
문득 부드럽고 햇볕 냄새가 나던 그 수건들이 떠올라 그리워지는 것이다.
밥 반찬도 아빠 밭에서 난 채소들을 주재료로 삼아 삼삼하게 먹었다.
상추, 오이, 호박, 깻잎, 토란을 돈 주고 사 먹으면 이렇게 비싸다는 걸 자취하고 나서야 알았다.
박경화의 에세이는 잊고 있던 소중한 기억을 자꾸만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이것도 끌어올리고 저것도 끌어올려서 결국엔 나를 조금 바꾸어 놓는다.
예컨대……
나에게 집이란 너무 소중하고 중요한 공간이라
나는 “살고 싶은 집”에 대한 아주 확고한 청사진이 있다.
원룸이 아닌 10평 이상의 집, 볕이 잘 들고, 화장실에도 창이 있어서 환기가 잘 되고,
맞바람이 불 수 있다면 더욱 좋고, 싱크대가 넓은 집. 노후되지 않은 집. 근처에 좋은 도서관이 있고, 전문의가 있는 병원과 동물병원과 약국이 있지만 너무 번화하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집.
박경화의 에세이집을 읽고 나자 여기에 몇 가지가 추가되었다.
상추와 방울토마토와 감자를 심을 수 있는 작은 텃밭이 있는 집.
빨래 삶는 큰 솥을 올릴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크기의 인덕션이 있는 집.
빨래 건조대가 거추장스럽지 않을 정도로 넓거나 베란다가 있는 집.
집 앞에 산이 있어서 풀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집.
과일을 양껏 사 먹을 수 있는 재력.
과일과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를 나눌 수 있는 이웃들.
...역시 열심히 살아서 프리랜서가 되는 편이 좋겠다.
환경을 생각한다는 것은 거창해보이지만,
사실은 나와 내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어차피 당장 지구 망하는 거 아니잖아. 내 일 아니잖아. 과학자들이 힘써 주겠지. 진짜 망하지는 않겠지만, 만약에 망한다면 그냥 죽으면 돼.”
환경 운동에 회의적인 대중의 보편 정서는 대개 이럴 것이다.
그런데……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아있을 땐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
사람들은 편리함을 “더 나은 것”, “삶의 질을 상승시키는 것”의 동의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편리함은 그냥 편리함일 뿐이다. 행복은 보통 수고로움을 동반한다는 걸 우리는 “삶의 질 상승”이라는 만능 문장 뒤에 숨어 외면한다.
환경 보호가 미래 세대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당장 나와 내 주변에 관심 쏟는 일이라는 것을 박경화의 책을 읽으며 새롭게 배웠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마음.
고쳐 쓰는 게 새로 사는 것보다 더 돈이 드는 시대지만, 박경화의 책을 읽고 나면 고쳐 쓰는 수고로움이 하나의 게임 퀘스트처럼 즐거움으로 변모한다. 책의 내용은 가볍지만, 따라 해볼 수 있는 실질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가득하다.
한 달에 한 번씩 전등 끄는 시간을 가지고,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물건과 먹거리와 식물을 나누고, 수고롭더라도 신경 써서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선물하는 일.
“마음이 홀가분해질 정도로 잘 처리하려면 바쁜 일상에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세상일이 언제나 그렇듯 말이다.”(p.79)
한겨레 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마음이 홀가분해질 정도로 잘 처리하려면 바쁜 일상에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세상일이 언제나 그렇듯 말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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