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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다비도프氏
최우근 지음 / 북극곰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다음(daum)'에서는 <새로운 작가의 발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보석같은 작가들>이라는 취지로 앞으로 주목하고, 꼭 기억해야 할 개성 넘치고 위트 있는 작가의 글을 소개하는 사이트 <7인의 작가전>을 운영중입니다. 2014년 11월부터 7인의 작가전에 초대된 7명의 작가와 소설 중에는 요 네스뵈의 <데빌스 스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이트에서 책의 일정 분량을 보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 읽으시려면 책을 구매하셔야 하지만요.
작가인 최우근은 <경찰청 사람들>로 방송작가 활동을 시작하여, 다큐멘터리 <성공시대> <록 달리다> <복서> <파랑새는 있다> <형사수첩>, 드라마 <강력반> 등을 집필하며 20여 년 동안 방송작가로 활동했다고 하니 사실 많은 분들이 방송으로는 이미 최우근 작가의 글을 접해온 셈입니다.

투명인간을 소재로 한 독특한 소설입니다. 이 세상에는 투명인간이 살고 있고, 투명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설정입니다. 투명인간은 1897년에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투명인간, The invisible man)이 나온 이래 영화 소제로도 많이 쓰였고, 많은 분들이 어릴 적 한번쯤은 투명인간이 되면 좋겠다는 상상도 해보셨을 겁니다.
스포일러가 안 될 선에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투명인간이 되고 모든 생활이 혼란에 휩싸입니다. 여자 친구도 떠나고, 함께 살던 부모님도 결국 지방으로 내려가 버립니다. 그러던 중 주인공에게 의문의 엽서가 도착합니다.
보내는 사람: 불가리 익스트림 옴므
받는 사람: 다비도프 쿨워터맨
다비도프 쿨워터맨씨, 귀하를 우리들의 모임에 초대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주인공 외에도 투명인간은 존재하고 있었고, 다른 투명인간에게 투명인간 모임에 초대받게 됩니다. 향수가 등장하는 건 투명인간끼리도 서로 볼 수 없으니 향기로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투명인간 각자에게 하나의 향수가 지정되지요.
이와 함께 옆집 여자 안나, 조화백, 최형사 등 주인공 주변인물과 펼쳐지는 이야기가 흡입력 있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방송작가 경력 때문인지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내용이 머릿속에 영상으로 그려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SF 요소도 있고, 코미디 요소도 있고, 중간 중간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도 있습니다.

소설은 독자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죠. 이 책도 단순히 투명인간이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읽어도 좋고, 투명인간에 여러 의미를 부여해도 좋은 책이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투명인간이 겪는 불투명인간들의 차별에 대해 소수자 문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고, 후반부에 다시 불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는 부분(이것도 스포일러인가요...)에서는 윤리적인 문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까칠한 캐릭터긴 하지만 옆집 여자의 말 “동등한 게 뭔지나 알고 하는 소리예요? 동등이라는 거는요, 내가 어디 있는지 그쪽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쪽이 어디 있는지 내가 아는 거, 그게 바로 동등한 거예요. 아니 동등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그거죠. 동등이요? 내가 그쪽이랑 어떻게 동등할 수가 있겠어요? 도대체 이 인간이 지금 어디 있나,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있나, 늘 전전긍긍하면서 이렇게 최소한의 자구책에나 매달리는 처진데 말이에요.(92p)”도 묘하게 생각할 여지를 준 문장입니다.
부모님도 투명인간이 된 주인공을 안타깝게 생각하다가 결국엔 “거실에 안방에 온 집안에 화장실에까지 CCTV를 달고 사는 기분이야. 뭐 특별히 숨길거야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는데...”라며 불만을 토로합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주인공이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나도 아무도 주인공의 뒷담화를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게, standard나 normal이 아니라는 게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투명인간을 말 그대로의 투명인간이 아니라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는 의미의 투명인간으로 보는 순간 또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을 겁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날카로운 풍자도 곳곳에 등장합니다.

- 분노의 단계가 시작됐을 땐 하필 선거철이었다... 어깨띠들에 아버지가 끼어 있다는 것에 화가 났고, 그날 저녁반찬으로 한우 불고기가 오른 것에 화가 났고, 그게 너무 맛있어서 젓가락질을 멈출 수 없는 것에 화가 났다. 우리 아파트 담벼락을 어지럽히는 선거 포스터에 화가 났고, 거기 적힌 후보자들의 좋은 일이란 좋은 일은 안 해본 거 없다는 식의 가짜 약력에 화가 났고, 조작된 약력을 부러워하는 내게 더 화가 났고, 특히나 별로 잘나지도 않은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뽑아준 인쇄소에 화가 났고, 뻔뻔하게 그걸 갖다 붙인 후보자들에 화가 났고, 셀카 사진 한 장 찍을 수 없는 내 현실에 무지무지 화가 났다. (35p)
- 입사지원서에 왜 굳이 사진을 붙이라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합격을 하면 매일 보게 될 얼굴이고, 떨어지면 평생 안 볼 얼굴이 아닌가? 언젠가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날 낮술을 먹고 한 회사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로 항의했다. 인사담당자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입사지원서 양식에 사진 붙이난 난이 인쇄돼 있어서요.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50p)
- 나는 통화거절 버튼을 누르고는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자료들을 모든 언론사에 보냈다. 물론 사장 이름으로. 예상과 달리 기사로 다룬 언론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58p)
- 나는 여태 진실은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진실은 하나가 아니었다. 어쩌면 인구 수 만큼의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또 하나를 알게 됐다. 힘 있는 자의 진실은ㆍㆍㆍ힘이 더 세다. (178p)
- 몇몇 목격자들이 포털 게시판에 거세게 항의했지만, 그 글들은 게시되는 즉시 블라인드 처리 되었다. 그리고 경찰에서 기획한 대규모 연예인 마약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그리로 몰려갔다. (265p)
이 정도면 독서토론도 가능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어디까지나 해석하기 나름이니까요.
작가는 대학시절 연극을 하기도 했다는데 도입부 연극 관련된 내용은 작가의 경험담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가의 희곡집 <이웃집 발명가>를 <옆집 발명가>로 패러디해 소설 속에 등장시키는 깨알 같은 재미도 있구요. 원작소설(스티븐 굴드 저)은 안 읽어봤지만 영화 <점퍼 Jumper>가 약간 연상되는 부분도 있었는데요, 여러 가지 맛이 담긴 음식처럼 다양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