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의 탄생 - 유럽의 살롱과 클럽과 카페 그 자유로운 풍경
이광주 지음 / 한길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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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자마자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스오리엔트의 학자 50여명이 등장하는 이 그림에서 손으로 하늘 위 이데아 세계를 가리키는 플라톤과 현실의 세계인 땅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담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왼편에선 소크라테스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커피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통해 카페가 토론과 여론 형성의 장이 되었고, 이 때문에 터키의 술탄 무라드 4, 영국의 국왕 찰스 2,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제 등이 커피 금지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책은 유럽의 살롱과 클럽과 카페에서 담론 문화가 형성된 과정을 자세히 다룬 책으로, 유럽과 다른 문명권을 구별 짓는 담론의 문화가 '아테네 학당'에도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살롱과 클럽, 절도 있는 미학>에서는 프랑스,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의 살롱과 클럽의 역사를 소개하며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핍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영국에서는 살롱 대신 클럽이 모임의 장이 되지만, 명칭과 무관하게 사람을 모이게 하고 의견을 나누며 담론을 펼치게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국가별로 지닌 국민성이 다르듯 네 나라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오묘한 차이가 재미를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크게 보면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갈리는 느낌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여성들의 활약 여부인데요, 프랑스에서는 우아하고 교양 있는 귀부인이 살롱과 살롱 문화의 주인이었고, '파리의 여제'로 불린 조프랭 부인의 살롱은 18세기 지식인과 교양인의 사교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독일도 안나 아말리아 공비, 샤를로테 왕비, 크레옌 부인 등의 살롱과 함께 베를린 최초의 살롱을 만든 유대인 여성 헤르츠 부인, 또다른 베를린 대표 살롱을 만든 라헬 부인이 눈에 띕니다. 놀라운 점은 당시에도 유대인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학대받았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롱 문화를 주도했으며 문인학자가 언제나 성황을 이뤘다는 점입니다.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레리나 출신인 비젠탈 부인의 살롱은 히틀러 치하에서도 반독일적 모임을 지속했으며, 박해받는 사람들의 피난처이자 반나치활동가들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반면, 전통적으로 많은 여왕이 역사에 등장하는 영국은 여성의 커피하우스 출입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영국 신사들의 전용 커피하우스인 클럽이 번성합니다. 자유로운 담론이 오가긴 했지만 클럽은 출신과 신분은 물론 종파나 정치적 일체감이 요구된 모임이었고, 이는 프랑스로 대표되는 궁정중심의 귀부인 문화와는 다른 영국 귀족의 상황과 맞물립니다. 영국의 클럽은 회원제로 운영되며 지켜야 할 규칙도 있었다고 하니, 가상의 인물이긴 하지만 셜록의 형인 마이크로프트는 이런 문화를 바탕으로 침묵이 규칙인 '디오게네스 클럽'이란 곳을 직접 창립하기에 이른게 아닌가 싶다는 엉뚱한 생각도 듭니다. 영국의 실제 클럽과 달리 그곳엔 담론이 존재하지 않았겠지만요.

 

저자는 "살롱과 살롱 문화는 국민적 심성, 멘털리티 그리고 문화전통에 따라 저마다 특유한 색채를 짙게 풍겼다(145p)"고 말합니다. 그리고 "살롱이나 클럽이라고 해도 나라와 도시, 시대에 따라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공통점은 살롱과 클럽이 배출한 프랑스의 오네톰, 영국의 젠틀맨에서 볼 수 있듯이 사교와 지성이 조화를 이루어 정파나 당파를 구성하더라도 슬로건을 내세운 이데올로기적 논리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사실이다(116p)"라고 강조합니다.

 

안타깝게도 이와는 비교되는 우리나라 선비 사대부의 문화도 짧게나마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의 사랑방도 담론을 즐기는 장소였지만 여인 금지구역이었고, 그 담론이라는 것도 문벌과 학통, 정파가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음을 아쉬워합니다.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이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분명 최고의 살롱을 운영하는 귀부인이 됐을거라는 의견과 함께요.

 


저자는 반듯한 사회, 좋은 사회란 자유로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이며, 우리 모두의 바람직한 공동체, 진정한 이야기문화담론문화의 형성을 주제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현재 우리의 담론문화에 대한 따끔한 지적도 빠지지 않는데요,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인 만큼 조금 길지만 전체를 옮겨 보겠습니다.

 

"국가의 품격을 지킨다는 것은 사회가 개인의 경우와 다름없이 서로 이웃에게 귀 기울이며 반듯한 말씨와 예절을 두루 갖추는 것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 땅의 현실은 어떠한가. 비속어가 난무하고 절제를 잃은 표현이 판을 치며 대화와 담론을 거부하는 사회가 아닌가. 시대착오적 국가주의자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압박하고, 이데올로기적 슬로건이 그림자를 드리운 우리의 현실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반듯한 담론문화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117p)

 


이어지는 2<카페, 도시 속의 열린 살롱>에서는 저자기 직접 방문한 도시들의 차, 커피, 카페에 얽힌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유럽 카페의 원형이 된 이스탄불의 카페부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인 '카페 플로리안'이 있는 베네치아 그리고 런던, 파리, 베를린, 빈까지 카페가 시대와 삶에 끼친 영향이 상당합니다.

 

차에 대한 이야기 중에는 차 상인이 많은 이윤을 내고자 최단 시간에 차를 많이 싣고 오는 선박을 물색하는 데 성패를 걸었고, 이 때문에 쾌속선에 의한 티 레이스가 펼쳐진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배들의 이름도 '번개', '파도의 물보라' 등이었다고 하는데, 마치 오늘날 DHLFedEx 간 경쟁을 보는 느낌입니다.

 

저는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이 등장하는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말씀 드린대로 카페 플로리안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다보니 나름 커피애호가인 저는 베네치아에 갔을 때 카페 플로리안에 들렀습니다. 카페 플로리안이 많은 명사들의 단골 카페임은 알고 있었지만 혁명을 지지하는 국내외 지식인의 집합소 역할을 했다는 건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요, 관광객과 현지 손님들의 복장 외에는 시간이 멈춘 느낌을 준 카페 플로리안의 추억이 더욱 특별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역시 나라별로 차이는 있었지만 담론이라는 주제는 모든 나라에서 동일했습니다. 이스탄불에서는 서민이 이용하는 카페와 고급카페가 나뉘긴 했지만 전 계층이 카페를 즐기며 담론을 나눴습니다.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차차 여성들에게도 개방되고, 민중의 열린 배움터이자 정보센터로, 근대 저널리즘 탄생의 요람으로 발전합니다. 계몽의 세기를 상징하는 파리 최초의 카페 프로코프에서는 신분과 종파, 이데올로기와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담론을 즐기고 혁명의 중심 역할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놀라운 점은 과거 담론을 주도했던 카페들이 아직까지도 운영되며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카페 플로리안에 갔던 것처럼 관광명소의 역할도 하고 있지만, 그곳에 심어져 있는 담론 문화 또한 세대를 넘어 전달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2부 내용은 전에 읽은 <홍차 너무나 영국적인/한길사><커피의 역사/우물이 있는 집>, <커피와 차/현암사>의 내용과 씨실날실로 엮이거나 보충해주는 부분이 있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더해 <차의 세계사/열린세상>이나 이 책의 저자인 이광주교수가 쓴 <동과 서의 차 이야기/한길사>도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해서 읽을 책 리스트에 올려놨습니다. 자꾸 리스트만 길어지고 있는 게 문제지만요.

 

그리고 우리나라의 카페는 어떠했는지 궁금한 분은 <다방과 카페, 모던 보이의 아지트/살림>을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살림지식총서답게 두껍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다방과 카페의 초기 모습을 접할 수 있습니다.

 

담론[談論]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논의한다는 뜻입니다. '주고 받으며'가 참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이야기 속에는 경청도 들어있고, 다양성도 들어있고, 상호존중도 들어있고, 새로운 방향의 합의나 발전 등 많은 게 담겨 있겠죠.

 


책을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살롱과 클럽, 그리고 카페가 사람들이 모이는 하드웨어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소프트웨어라는 생각. 자율성 개방성 다양성이라는 사회 문화 배경과 자유로운 담론 문화가 그것이겠죠. 우리나라도 하드웨어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프트웨어가 문제인데요, 버그 없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고민이 있는 분이라면 책을 펼쳐서 저자가 전달하려고 하는 바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밑줄 그은 문장이 있는데, 전해드리며 마무리 하겠습니다.

 

"참된 문화, 반듯한 사회란 모든 계층이 일상적인 삶을 누리면서도 그에 더해 교양을 갖추기를 바라며 그 실현을 위해 정치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문화와 사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전제로 각 분야의 상층 인사에게 기대되는 것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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