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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ㅣ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평점 :

문화라는 것은 참 묘해서 섞이고 새롭게 변형되며 발전합니다. 그 중 음식문화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음식은 인간의 기본욕구인 의식주를 충족시키는 한편 후추, 설탕, 차, 커피로 대표되는 식민지의 슬픈 역사와 열강의 다툼과도 연결됩니다. 아편전쟁이나 미국독립전쟁의 배경에 차도 한몫을 했으니 음식은 인류를 살게도 죽게도 하며 인류의 역사와 늘 함께 해왔습니다.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책이라 소개한 책입니다. 저자는 스탠퍼드 대학 언어학 교수인데요, 책 제목이기도 한 '음식의 언어'는 스탠퍼드 대학의 인기 교양 강의입니다. 이는 음식을 통해 역사, 문화, 사회, 경제는 물론이요 행동경제학, 심리학, 언어학까지 두루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이한 점은 책의 구성을 우리가 음식을 먹는 순서대로 했다는 겁니다. 메뉴 고르기로 시작해 앙트레를 거쳐 메인요리, 토스트로 끝나는 구성은 정식 코스 이름으로 장을 구성한 헤르만 코흐의 소설 <디너>를 떠올리게도 했습니다.

1부 <메뉴의 모험: 식탁 위에 펼쳐진 세계지도>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음식의 전파과정을 통해 그 안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탐험합니다.
저자와 동료들은 일곱개 도시의 레스토랑 메뉴를 검색해 현대식 메뉴 6,500건(요리 가짓수 65만건)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이를 기반으로 메뉴판에 담긴 단어에 따른 가격, 레스토랑의 등급과의 상관관계를 연구합니다. 1900년대 초반 미국 레스토랑 메뉴판을 살펴보면 프랑스어가 잔득 섞여 있다고 합니다. 값이 비싼 중상급 이상 레스토랑 메뉴가 훨씬 더했다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외국어가 뭔가 있어 보이는 수단이 되는 건 변함없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에피타이저를 뜻하는 앙트레가 왜 미국에선 메인 코스를 뜻하게 되었는지, 영국의 대표적 요리인 피시앤드칩스가 처음 런던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다룹니다.

현대의 피시앤드칩스가 탄생하기 이전 이러한 방식의 요리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도에 의해 발명되었으며, 아랍 무슬림들의 손에서 완성되었고, 기독교도들의 응용을 거쳐 페루의 모체족 요리와 융합되어, 아시아에는 포루투갈인들에 의해, 영국에는 유대인들에 의해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미국에서 만들어진 줄 알았던 패스트푸드의 핵심요소 케첩이 중국의 푸첸성에서 쓰던 발효된 생선 소스에서 유래했다는 점은 책을 읽으며 알게 된 놀라운 사실입니다. 케첩은 영국을 거쳐 미국의 국민소스가 되는데, 저자는 이 흐름에서 세계경제사를 통찰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아시아 수출품에 대한 유럽의 욕망과 은을 향한 중국인들의 욕망이 있고, 식민지와 수탈의 역사와도 연결됩니다.
이와 함께 칵테일, 와인, 토스트, 추수감사절과 칠면조를 즐기는 문화가 현재에 이르는 과정을 다양한 사료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이끌어 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즐기는 음식이 얼마나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문화가 융합된 결과인지 놀라울 지경입니다.

이어지는 2부 <미식의 말들 : 내 입맛이 말해주는 모든 교양>에서는 포테이토칩, 마카롱, 셔벗, 크래커, 디저트까지 간식이나 식후에 즐기는 음식을 대상으로 언어학적 역사, 심리학, 현대의 조리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두루 살핍니다.
저자는 블로거들의 맛집 리뷰에서 긍정의 심리학을 살피고, 포테이토칩 포장지 홍보문구에서 광고하는 사람들의 미묘한 언어 기술과 가격, 계급과의 상관관계를 논합니다. 탄산음료 톡 쏘는 맛의 원천인 구연산과 인산은 페르시아와 아랍 화학자들이 감귤류 과일에서 추출한 데서 시작됐다는 것, 중국인들이 화약을 만드는데 사용한 칠레초석이 얼린 셔벗을 만드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는 점 또한 흥미를 끄는 음식의 역사입니다.
브랜드 네이밍과 음운학을 다룬 부분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내용을 모두 이해하기엔 제 지식이 부족하긴 했지만, 크래커와 아이스크림 이름을 전설모음과 후설모음(발음할 때 혀 위치에 따라 구분)으로 구분해 선호도를 연구하거나 주파수 코드 이론, 공감각적 가설까지 연결하는 걸 보며, 우리에게 오랜 기간 사랑받는 브랜드에 엄청난 과학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음식을 먹는 것엔 큰 관심이 없지만 음식에서 파생된 역사와 문화에는 관심이 많아 한 가지 음식을 주제로 한 책은 꽤 읽어왔습니다. 기존에 읽은 책은 한 가지 중심 재료로 다양한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라면, 이 책은 코스요리 전문점 같은 느낌입니다. 즉 다양한 음식을 보다 압축적으로 다룬 책인데요, 너무 많은 음식 이름이 등장해 개인적으론 읽기 벅찬(?) 느낌도 있었지만 반대로 미식가에게는 읽는 재미가 더해 질거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우리가 무심코 먹는 음식들 또한 현재의 조리법이 정립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시간을 거쳐 왔을지, 오늘 제가 먹은 한끼 식사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또 한가지, 이 책에 우리나라 음식은 등장하지 않지만(7장 '섹스와 스시, 마약과 정크푸드' 편에서 한국의 TV 식품 광고를 분석하는 내용이 나오긴 합니다.) 분명 어딘가에 영향을 주고 어딘가에서 영향을 받았을거란 겁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세계 각국의 음식을 접할 수 있고, 반대로 다른 나라에 알려진 우리 음식도 많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식의 언어'가 어떻게 달라질지 기대됩니다.

저자는 "여러 민족이 문화적 보물이기나 한 것처럼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요리들의 유래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우리 모두가 이민자라는 사실이다. 어떤 문화도 고립된 섬이 아니며, 문화와 민족과 종교 사이의 혼란스럽고 골치 아픈 경계에서 어떤 훌륭한 특성이 창조된다." 말합니다. 이 말이 정답입니다. 음식에는 맛과 영양소 이외에도 참 많은 게 담겨 있습니다.
책을 처음 펼칠 땐 어떤 강의길래 음식에 대한 강의를 7만명 이상이 들었을까 싶었는데 괜한 생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표지(원서보다 한글판이 더욱)마저 맛있는 책 '음식의 언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