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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너무나 영국적인
박영자 지음 / 한길사 / 2014년 12월
평점 :
최근 한 신문기사를 보면 2014년 우리나라 성인 1인당 평균 341잔의 커피를 마셨다고 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사 제44권에 "1892년 구미 제국들과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커피를 전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기록이 있고, 고종이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관에 있는 동안 커피에 익숙해져 아주 좋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하면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지 약 120년 가량 되었는데 이 길지 않은 기간에 소위 국민음료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나라가 있는데요, 바로 영국입니다. 최근 BBC 보도에 따르면 영국인이 하루에 마시는 차의 총량이 대략 1억 2천만 잔이라고 합니다. 하루에 4잔은 기본이고, 많게는 7~8잔을 마신다고 하네요. 차가 영국에 들어온 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1660년 왕위에 오른 찰스 2세와 혼인을 한 포르투갈 공주인 캐서린 베르간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캐서린 베르간자는 한 덩어리의 차와 설탕을 함께 가져왔다고 하는데요, 이 때부터 영국 왕실에 티타임 문화가 전해졌다고 합니다. 메리 여왕과 앤 여왕은 손에서 차를 내려놓지 않을 정도로 차에 중독되었다는군요.
이후 홍차는 영국의 역사와 문화, 일상생활 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학창시절 배운 ‘보스턴 차 사건’과 연관해 미국 독립전쟁을 일으키는 촉매제가 되기도 했고, 아편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죠.
18세기 초 영국에서는 '시계가 오후 4시를 치면 6시까지 영국 내의 모든 가정의 주전자가 한꺼번에 펄펄 즐겁게 소리를 내고, 도자기 찻잔에 설탕을 넣어 짤그랑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고, 현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하루도 홍차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합니다.

차를 즐기는 영국인의 모습은 회화, 문학, 영화,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죠. 국내에서 많은 인기을 얻은 영국드라마 셜록에서는 심지어 셜록과 모리아티가 마주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 책은 영국이 홍차를 처음 접한 17세기부터 빅토리아 시대까지를 중심으로 영국과 영국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1장 ‘홍차 아우라: 감성’, 2장 ‘홍차 스파이: 욕망’, 3장 ‘홍차 중독자: 미식’으로 구분한 23개의 꼭지 속에서 영국인의 의식주, 역사, 전통, 예술, 산업 등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홍차 문화를 접할 수 있습니다.
차를 일상적으로 마시기 전 영국인들은 주로 맥주를 마셨습니다. 술이 좋아서 마신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마셨습니다. 물을 정화하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살균효과가 있는 술을 마신거죠. 술독에 빠진 영국을 구한 게 바로 차입니다. 또한 차의 천연 항 박테리아 성분 덕분에 술독에 빠진 노동자, 질병에 걸린 어린이, 조산 위험에 처한 임산부의 삶이 개선됩니다. 영국의 산업혁명 또한 차 인기를 높이는 요인이 됩니다. 홍차는 노동자들이 술에 취하지 않은 채 하루 종일 맑은 정신으로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음료니까요.
영국인들이 커피나 다른 음료가 아닌 홍차를 택한 것은 영국의 날씨도 한 몫 했다고 합니다. 1년 중 200여일을 비와 안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차갑고 눅눅한 상태를 벗어나 몸을 따뜻한 상태로 유지시켜주는 홍차가 적격이라는 거죠.
하지만 커피 또한 몸을 따뜻하게 유지시켜 줍니다. 실제로 1650년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인 옥스퍼드가, 1652년에는 런던 최초의 커피하우스인 파스콰로제가 생기기도 하는데요, 왜 유독 홍차를 좋아하는 걸까요?

우선 동인도무역을 통해 커피보다 홍차의 수입이 더 수월했다는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이를 문화인류학의 시각으로 접근한 해석이 있습니다. 영국인들은 타고난 수줍음으로 중증에 가까운 대인기피증, 이른바 사교불면증을 가지고 있는데 사교적인 상황에서 불편한 분위기를 바꾸는 데 차끓이기가 적격이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또 일부 사회학자들은 영국인의 차갑고 과묵한 기질상 커피보다는 평온함을 주는 홍차가 더 적합했을 거라고도 합니다. 영국인의 기질을 이렇게 하나로 묶어 해석하는 게 맞나 싶지만, 작가 시드니 스미스는 “차를 우리에게 내려주신 신께 감사하라! 차가 없었다면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라고 했을 정도라니 말그대로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또 한가지 의문이 듭니다. 차나무가 자라지 않는 영국이 어떻게 차의 나라가 되었을까요? 당시 유럽사람들은 차나무가 중국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중국 또한 차의 종자와 묘목 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독점으로 차를 수입하는 기간이 끝나자 영국정부는 차 재배지로 인도를 염두해 두고, 탐험가이자 식물학자인 로버트 브루스 소령을 인도 아삼지방의 밀림으로 보내 차나무 재배를 연구합니다. 인도에서 차 재배가 성공하자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게 되죠. 이와 함께 중국의 차 재배 비법을 빼오기 위해 스파이까지 투입해 결국 수천년간 중국이 지켜온 차의 비밀을 도둑질하기에 이릅니다.
차가 뭐길래 스파이까지 투입하나 싶기도 하고, 식민지 사람들을 얼마나 착취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 결과 인도는 현재 세계 1위의 홍차 생산국이 되었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대부분의 나라는 영국의 홍차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변형해 정착시켰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즐기는 홍차 속에는 과거의 아픔도 함께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빅토리아 시대부터 내려오는 티타임의 종류는 이른 아침 침대에서 마시는 얼리티, 아침식사와 함께하는 브렉퍼스트티, 오전일과 중에 일레븐스티, 오후에 간식과 즐기는 애프터눈티, 저녁 식사 때 하이티, 저녁식사 후 느긋한 가운데 애프터디너티,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이트티 등이라고 합니다. 영국인들에게 홍차 없는 하루는 상상할 수도 없겠구나 싶습니다. 물론 이렇게 모든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계층은 한정적이었겠지만, 노동자 계층 또한 나름대로의 홍차 문화를 즐겼고 홍차는 그들에게 가장 저렴하게 섭취할 수 있는 삶의 위안제가 되어 주었습니다.

‘영어로 쓴 가장 뛰어난 소설’ 중 하나로 평가되는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에는 “오후에 차를 마시는 의식에 소요된 시간보다 더 기분 좋은 시간을 삶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는 대목이 나옵니다. 사실 저도 주로 커피를 마시고 홍차는 아주 간간이 마셔왔을 뿐이라 아직 홍차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홍차를 더 자주 마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포레스트 검프>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보면 역사속 사건들과 주인공의 행동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재미를 자아냅니다. 이 책은 말하자면 홍차버전 포레스트 검프랄까요? 영국의 역사와 문화의 흐름 속에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홍차의 활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중간 중간 수록된 그림들은 눈을 즐겁게 함과 동시에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해줍니다.
이 책과 함께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리수)>, <런던 미술관 산책(시공아트)>을 함께 읽으시면 영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매력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물론 향긋한 홍차 한 잔이 함께 한다면 더욱더 좋지 않을까요?
“맙소사! 차 마실 시간이군. 큰 사건이건 말건 차 마실 시간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