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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hamund.wordpress.com/2008/09/28/david-foster-wallace/ 

 

David Foster Wallace
포노마 칼리지의 창작문학 교수이자 작가인 데이빗 포스터 월래스(David Foster Wallace)의 대학 전공을 보면 그의 직업과 잘 줄이 그어지지 않는다. 하버드 대학의 학부과정인 하버드 칼리지와 더불어 최고의 리버럴 칼리지 중 하나인 앰허스트 칼리지에서 그가 전공한 것은 모달 로직과 수학이다. 하지만 그의 사진 하나만 봐도 그가 작가라는데 아무런 의심을 품을 수 없게 된다. 그에게서는 그만큼 커다란 포스가 풍겨나온다.

자살을 얘기하는 사람은 삶에 대한 엄청난 통찰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치기에 불과하다. 삶과 죽음은, 나와 너처럼, 천당과 지옥처럼, 하나가 없으면 또 하나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은 뫼비우스의 띠마냥 엮여 맺어져 있다. 대개의 사람들, 인구의 99.9999%는 삶과 죽음 사이에 완전한 테두리가 있다. 하지만 아주 소수의 선각자들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의 차이란 무의미하다. 매일 죽는다, 라는 표현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삶의 농도가 진하고 켯속이 꽉 찬 사람들. 월래스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였다’라고 과거형을 쓴 이유는 그가 죽은 탓이다. 자살이다. 그가 어떻게 자살했는지, 그리고 ‘왜’ 자살했는지, 아래의 글을 읽고나면 깨닫게 되리라.

이 글은 월래스가 지난 2005년 케년 칼리지의 졸업식에서 한 축사를 월스트리트저널이 그를 기리며 실은 연설전문이다.


< 연설전문 > http://online.wsj.com/article/SB122178211966454607.html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결을 헤살지으며 헤엄쳐 가다 마침 반대편에서 오던 늙은 물고기를 만난다. 그 늙은 물고기는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안녕, 아이들아. 물은 어떠냐?” 어린 물고기들은 대꾸하지 않고 나아가다가, 그 중 한 마리가 다른 물고기에게 이렇게 묻는다. “물? 그게 도대체 뭐지?”

아니, 지레짐작하지 마라. 내가 지혜로운 늙은 물고기이고 이제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는 너희들에게 물이 뭔지를 알려주려는 게 아니니까. 난 지혜로운 늙은 물고기가 아닌 까닭이다. 이 물고기 얘기의 핵심은 이렇다. 가장 빤한 것. 어디에나 있는 것.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현실’ 내지 ‘실체’야말로 가장 보기 어렵고, 그에 대해 얘기하는 것마저 어려운 주제라는 것이다. 이렇게 문장으로 엮어놓고 보면, 물론 극히 상투적인 얘기다. 그렇지만 매일의 인생살이에서 이러한 상투적인 얘기야말로 삶과 죽음을 가를 만큼 중요하다. 과장처럼 들리겠지. 추상적 난센스로 들릴 수도 있겠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진리라는 것, 너무도 확신하게 되는 것 중의 대개는 나중에 보면 결국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난다. 아예 망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예 중 하나를 들어보자.

“나야말로 이 우주의 중심이며, 현실 중의 현실이다. 존재하는 것들 중 가장 명징하고 중요한 개체이다. 이러한 나의 뿌리 깊은 믿음은 내 경험 중 직접적인, 매개체를 통하지 않은 경험에 의해 뒷받침된다.”

우린 이런 식의 자연스런, 근본적인 자기중심성에 대한 얘기를 꺼려한다. 사회로부터 배척되는 탓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이러한 생각을 마음 깊숙이 품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 뇌에는 ‘디폴트’로 배선이 그리 깔려있는 까닭이다.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너희가 경험한 것 중 너희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지 않은 경험이란 게 있었는지. 너희가 경험하는 세상은 네 앞에 있든지 뒤에 있든지 옆에 있든지, 아니면 티브이에 있든지 모니터에 있든지, 하여튼 네 둘레에 있다. 남들의 생각과 느낌은 어떤 식으로든 너희에게 소통돼야 한다. 하지만 너희 자신의 생각과 느낌은 그런 매개체가 필요 없다. 직접적이다. 급박하다. 현실이다.

아니, 다시 말하지만 지레짐작하지 마라. 너희들에게 남에 대한 자비심이나 이타심에 대한 설교를 하자는 게 아니니까. 소위 말하는 ‘덕목’에 대한 설교를 할 마음은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덕목’ 얘기가 아니다. ‘선택’ 얘기를 하자는 게다. 디폴트로 이미 세팅돼버린, 뿌리 깊은, 말 그대로 ‘자기중심성.’ 이 탓에 모든 것은 ‘나’라는 렌즈를 통해 보고 해석하는 성향. 이를 바꾸거나 이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선택’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디폴트 세팅을 조절(adjust)할 수 있는 사람들을 흔히 ‘잘 조절된(well-adjusted)’ 사람이라 부른다. 이 표현은 아무 생각없이 나온 게 아니다. 내가 이 연설을 하고 있는 이곳이 대학의 졸업식이니까 자연스레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일 게다. 즉, 내가 말하는 ‘디폴트 세팅 조절’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지식과 얼마나 높은 지능이 필요한가, 라는 의문일 것이다.

이 질문은 사실 답하기 까다롭다. 최소한 내 경우를 볼 때 대학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점 중 가장 위험스러운 것은 대학교육을 받고난 후에는 모든 것을 너무 머리로만 해석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머릿속에서만 추상적 담론을 하다가 거기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곤 한다.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그저 주의를 기울이면 될 일을 가지고. 그저 내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주의만 기울이면 될 일을 가지고.

너희들도 지금쯤이면 깨달았겠지만,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독백에 취하지 않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기는 극히 어렵다. 졸업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리버럴 칼리지에서 내세우는 표어인 ‘생각하는 법 배우기’라는 말이 좀 더 심오하면서도 좀 더 진지한 아이디어의 축약형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곧, ‘생각하는 법 배우기’란  생각하는 ‘방법’과 ‘주제’에 대한 ‘콘트롤’을 발휘하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다. 이 말은 충분히 ‘깨어있고’ 늘 ‘자각하는’ 상태에 있음으로 해서 내가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지를 선택할 수 있고, 경험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도출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너희들이 어른이 된 이후 살이에서 이러한 선택 능력이 없다고 한다면 너희 삶은 끝장이다. 상투적 표현 하나를 생각해 보자.

“마음은 하인으로서는 백점이지만, 주인으로서는 빵점이다.”

다른 상투적 표현처럼 이 표현도 겉만 볼 때는 지루하고 재미 없는 얘기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주 커다란 진리, 그러면서도 마주하기 두려운 진리를 담고 있다. 어른이 돼서 자살하는 사람들, 최소한 미국에서는 그 대부분이 머리에 총을 쏴서 죽는 것은 다 까닭이 있다. 또 하나의 진실은 이들, 자신의 숨을 스스로 끊는 이들이 방아쇠를 당기기 오래 전에 이미 죽어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내 주장은 이렇다. 너희들이 이곳 리버럴 칼리지에서 받은 교육의 가치는 이래야 한다. 즉, 너희들이 앞으로 살아갈 어른으로서의 삶. 안락하고 부유하고 폼나는 살이를 해가는 동안, 어떻게 하면 죽은 삶, 무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삶, 너희 머리의 종으로 사는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너희들이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오는 ‘디폴트 세팅.’ 매일매일 오롯이 혼자서만 사는, 제가 무슨 왕이나 되는 양 홀로 사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고유한 체 혼자 사는, 그러한 ‘디폴트 세팅’의 노예가 되지 않는 길은 무엇인가! 이를 깨칠 수 있어야 한다.

과장 같나? 추상적인 난센스같이 들리나? 그럼 좀 구체적인 얘기를 해보자. 너희들 졸업생들은 ‘매일매일’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정말이다. 이 나라에서 이제 성인으로 살아갈 너희들에게는 아예 언급되지 않는 진실이 있다. 그 진실 중 하나는 욕구불만이다. 짜증이다. 이는 지루하면서도 반복되며 사소하다. 너희들의 부모들과 나이 많은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으리라.

예컨대, 평균적 일상에 대해 말해보자. 아침에 일어나서 제법 고단한 직업상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근을 한다. 하루 아홉 시간이든 열 시간이든 열심히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된다. 이때쯤 해서는 피곤해진다. 스트레스도 엄청 쌓여있다. 이제 원하는 것이라고는 얼른 집에 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한 두시간 빈둥거리다가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고 싶은 마음 뿐이다. 다음날도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탓이다. 그때 퍼뜩 떠오르는 게 집에 먹을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이번 주에 수퍼마켓에 갈 시간마저 없었다. 일이 너무 바빠서.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나와 차에 올라 수퍼마켓으로 몰아간다. 퇴근길의 도로는 꽉 막혀있다. 수퍼마켓까지 가는 시간은 너무도 오래 걸리기만 한다. 어찌어찌 도착해 보니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다른 사람들도 퇴근길에 잠시 들러 쇼핑을 하러 몰렸으니 당연하다. 가게 안은 창백한 형광등 불빛 조명 아래서 짜증나는 음악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정말 있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렇지만 잽싸게 들어갔다가 잽싸게 나올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과도한 조명과 과도한 넓이의 이 수퍼마켓 안 골목골목,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그곳에서 내가 원하는 걸 찾으려면 마냥 돌아다녀야 한다.


카트는 또 어떤가. 나만큼 피곤에 지친, 나만큼 바쁜 사람들, 그리고 물론 느릿느릿 움직이는 노인네들과 얼빠진 인간들, 후천성주의력결핍증에 시달리는 아이들 사이를 요리조리 카트를 움직여 조종해 나가야 한다. 이를 앙다물고 ‘좀 지나갈까요’ 하면서 최대한 예의를 차려 말한다. 마침내, 드디어, 살 것을 다 산다. 다만, 이제는 체크아웃 카운터에 기다란 줄이 지어져 있는 것을 보게된다. 바보같다. 닫혀 있는 체크아웃 카운터는 도대체 뭔가! 부글부글 끓는다. 그렇다고 뭣빠지게 일하고 있는 점원에게 화를 풀 수도 없다.

아무튼, 차례가 돼서 카드를 내밀고 값을 치룬다. 잠시 후 ‘안녕히 가세요’라는 소리가 들린다. 철저하게 죽은 목소리다. 음식이 가득찬 봉지들을 카트에 담아 주차장으로 나선다. 곳곳이 울퉁불퉁 돋아있고 쓰레기로 지저분한 주차장을 가로질러 카트를 밀고 차를 세워둔 곳까지 온다. 이제 차에 쇼핑봉지를 안의 내용물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조심조심 잘 실어야 한다. 집으로 가는 동안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기 일쑤인 까닭이다. 다 실었으면 그제서야 집으로 향한다. 정체가 심한,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교통지옥을 뚫고.

뭔 말이냐면, 이처럼 사소하고 짜증나는 개똥같은 일을 겪을 때야말로 ‘선택’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교통정체든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수퍼마켓이든, 기다란 줄을 지어 체크아웃 카운터 앞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 뒤에 서야하든,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생각할 틈이 있다. ‘어떻게’ 생각할 것이며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한, 장보러 갈 때마다 우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오고 기분은 개차반이 될 게다. 우리의 자연스런 ‘디폴트 세팅’이 그렇게 생겨먹은 탓이다.

‘디폴트 세팅’에 따르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언제나 ‘나’만을 생각하게 된다. 배고픈 나. 피곤한 나.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나. 온 누리가 내 앞길을 거칙적대며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내 길을 가로막으며 거치적거리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보라. 이들은 얼마나 짜증나게 생겨먹었는가. 얼마나 어리석으며 소처럼 미련하게 생겨먹었는가. 눈은 퀭하니 죽어있고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는, 체크아웃 카운터에 줄을 지어 서있는 이것들! 줄을 지어 기다리면서도 휴대전화에 대고 큰 소리로 떠드는 이들에게서 예의범절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짜증이 밀려온다. 게다가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난 하루 온 종일 열심히 일했다. 밥도 못먹어서 굶주려 있다. 피곤에 지쳐있다. 그런데도 집에가서 따뜻한 밥 한끼 먹고 좀 쉬고 싶은 욕망마저도 충족할 수 없다. 이 모두 둘레에 있는 이 미련한 인간들 탓이다.

아니면, 내 ‘디폴트 세팅’이 좀 더 ‘사회지향적’으로 맞춰져 있다고 하자. 퇴근길에 꽉 막혀 있는 도로에 멈춰서서 차선 하나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몸체의 SUV, 허머, V-12엔진을 장착한 트럭들을 본다. 이 미련하고 몸집만 큰 차들은 이기적이게도 엄청난 양의 연료를 낭비하고 있다. 화가 나며 생목이 치밀어 오른다. 뒤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범퍼 스티커들은 또 어떤가. 애국적이거나 종교적인 메세지를 고함치는 저것들. 왜 저런 구호들은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낭비가 심한 차량에, 가장 추하고 생각없고 제맘대로 운전하는 인간들이 모는 차량에 붙어있는가.

이 인간들은 대개 운전 중에도 휴대전화로 끊임없이 지껄인다. 정체 속에서 겨우 몇 미터 앞서가고자 느닷없이 끼어드는 이 인간들. 우리 손자들이 우리 세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얼마나 낭비가 심한 사람들로 여길까. 지구의 기후 체계를 망친 세대. 버릇없고 어리석고 역겨운 세대. 모든 게 그저 개차반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디폴트 세팅’에 내맡겨진다.

내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로 ‘선택’한다면 그것도 좋다. 대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생각은 너무 저절로, 너무 쉬이 다가와서 그것을 ‘선택’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은 지적하자. 그저 ‘디폴트 세팅’의 작동에 불과하다. 자동적이며 무의식적이다. 우리의 살이가 지루하고 짜증나고 구질구질한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고 우선 당장 내게 필요한 것과 나의 느낌이야말로 세상의 우선순위를 결정해야한다는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믿음. 이 탓이다.

 

요컨대, 이런 상황에서도 생각을 달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앞길을 막고 꼼짝도 않고 기름을 낭비하고 있는 차량들. 이러한 교통정체 상황 속에서, 저 SUV에 타고 있는 사람이 과거에 아주 끔찍한 사고를 당한 적이 있어서 이제 운전하는 것이 너무 무섭게 되어, 심리치료사가 차를 살 때는 꼭 덩치가 큰 SUV를 사라고 명령했을 수도 있다. 저 허머에 타고 있는 사람은 어떤가. 방금 전 내 앞에 느닷없이 끼어든 커다란 허머에 타고 있는 저 사람은 아마 자신의 아이가 크게 다쳐서 그 아이를 옆에 태우고 허둥지둥 병원으로 몰아가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가 서두르는 연유가 내가 서두르는 까닭보다 더 정당할 수 있다. 그가 내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앞길을 막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아니면, 억지로라도 이렇게 생각해 보자. 수퍼마켓에서 체크아웃 카운터에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적어도 나만큼 지루함을 느끼고 짜증나 있을 공산이 크다. 그 중 몇은 나보다도 더 힘들고 구질구질하고 고통스런 살이를 하고 있을 공산도 크다.

또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너희들에게 어떤 윤리강의를 하고 있다고 여기지 마라. 아니면 너희가 이런 식으로 ‘꼭 생각해야 한다’라고, 내가 설교하고 있다고도 생각치 마라. 어느 누구도 너희들이 자동적으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어려운 탓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몸에 붙이려면 의지력과 정신적 노력이 필요하다. 너희들이 나와 비슷하다면 어느 날은 도저히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없으리라. 또 어느날은 할 수는 있어도 하고 싶어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대개의 나날들에서 너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이런 식의 생각을 한다면, 체크아웃 카운터에서 만난 뚱뚱하고 죽은 눈을 가지고 있던 여인, 얼굴에 화장으로 떡칠한 그 여인이 어린 아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도 달리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아마 그 여인은 삼일 밤을 연달아 세야했을 지도 모른다. 암으로 죽어가는 남편의 손을 보듬어 잡고서. 아니면 어제 아내가 관공서에 갈 일이 있었을 때 친절하게 도와준,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그 공무원이 이 여인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더 높다. 하지만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다. 요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의 ‘선택’에 달려있다. 너희가 ‘실체’가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자동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중요한 ‘사람’이 누구이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동적으로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다시 말해 너희가 ‘디폴트 세팅’에 의존한다면, 너희도 나처럼 무의미하고 짜증스런 가능성 외에는 아무 것도 고려에 넣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말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고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면 너희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바글바글하고 시끄럽고 느리고 구질구질한 상황 속에서도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뭔가 성스러움마저 볼 수 있는 능력이 네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성스러움. 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태우고 있는 바로 그 힘과 동일한 힘에 의해 불타고 있는 성스러움. 자비와 사랑. 그리고 만물의 바탕에 깔려 있는, 껍질 속에 존재하는 단일성을 볼 수 있는 힘이 네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신비주의적 전통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누리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어떤 식으로 볼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너다, 라는 것이다. 어떤 것에 의미가 있는지, 어떤 것이 무의미한지를 네가 의식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 어떤 것을 숭배할지, 그걸 정하는 것은 바로 너다.”

유일한 진리가 이것이라고 했는데, 사실 또 하나의 진리가 있다. 매일매일 참호 속에서의 살이에서 소위 ‘무신론주의’라는 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것도 숭배하지 않는다’라는 말 따위는 의미없다. 우리 모두 뭔가를 숭배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숭배할 ‘대상’이다. 이른바 ‘신’이라든가 어떤 영적인 대상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까닭이 있을까? 그리스도건, 알라건, 야훼건, 위컨여신이건 아니면 어떤 윤리적 원칙이건, 이런 대상을 숭배할 까닭이 있을까?

있다. 그것도 아주 도드라진 이유가. ‘신’이나 ‘영적대상’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 외의 것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면 필경 그 숭배의 대상이 너희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인 까닭이다. 돈이나 물질을 숭배하면, 다시 말해 돈이나 물질에서 너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면, 결코 너희들은 이제 그만 가져도 돼, 라는 말을 못하리라. 결코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리라. 이게 진리이다. 숭배의 대상이 네 몸뚱아리이거나, 아름다움이거나, 성적 매력이라면 너희는 늘 자신을 추하게 느끼며 평생을 보내리라.

마침내 늙고 병들어 죽을 시간이 가까와 오면, 너희는 명부의 사자가 너희를 방문하기 이전에 벌써 수 많은 죽음을 경험한 후이리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 진리를 이미 잘 알고 있다. 신화에도 나오고, 속담에도, 상투적 표현에도, 우화에도, 브로마이드에도, 짧은 경구에도 늘 나온다. 인류가 간직하고 있는 위대한 이야기들의 뼈대는 이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진리를 매일의 의식 표면에 명징하게 떠올릴 수 있느냐는 점이다. 힘을 숭상하라. 그러면 너희가 느끼는 것은 약함과 두려움 뿐이리라. 그 두려움을 눙치기 위해 너희는 더욱 많은 힘을 찾아 헤맬 것이다. 너의 지성을 숭배하라. 똑똑해 보이는 것에 전념하라. 그러면 결국 네가 다달을 감정의 종착역은 어리석음이다.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남이 너의 어리석음과 사기꾼임을 밝혀낼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형태의 숭배 대상이 나쁜 이유는 그것들이 ‘악하다’거나 ‘죄스러운’ 탓이 아니다. 나쁜 까닭은 그것들이 ‘무의식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바로 ‘디폴트 세팅’인 탓이다. 이러한 숭배의 대상은 성장하면서 안개처럼 우리의 의식에 스며든다. 매일 매일. 이제 보는 것도 이런 숭배의 대상의 눈으로만 본다. 이제 가치 매김도 이런 숭배의 대상을 척도로 한다. 나도 모르게. 너도 모르게.

그럼, 세상은 네가 ‘디폴트 세팅’에 따라 작동하는 것을 탓할까? 아니다. 세상은 남자와 돈, 권력이 주도한다. 이런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두려움과 경멸, 욕구불만, 탐욕, 그리고 ‘나’에 대한 숭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는 이러한 포스들, 두려움, 경멸, 욕구불만, 탐욕, ‘나’에 대한 숭배를 지극히 잘 사용해서 엄청난 부와 안락함,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이끌어 냈다. 자유. 두개골 크기의 왕국의 왕이 될 자유. 모든 피조물의 한 가운데 홀로 있을 자유. 이런 식의 자유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으리라.

하지만 이와 다른 종류의 자유가 있다. 이 자유는 너무도 진귀해서 바깥 세상, 이기는 것, 성취하는 것, 보이는 것이 다인 저 바깥세상에서는 입도마에 그리 오르지 않는 주제이다. 정말 중요한 이 자유에는 몇 가지 필수 속성이 있다. 주의 기울이기. 깨어 있기. 하기 싫어도 하는 엄격함. 노력. 진정으로 남을 위하기. 진정으로 남을 위해 희생하기. 이 모든 것을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매일, 사소한 방식으로, ‘쿨’하지 않은 방식으로 계속 하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를 추구하지 않는 한 남는 것은 무의식적 삶이다. ‘디폴트 세팅’에 의해 돌아가는 삶이다. ‘다람쥐 쳇바퀴’의 삶이다.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잃어버린 영원한 무엇에 대한 갈망이다.

안다. 재미없다. 생동감도 없다. 영감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자유야말로 모든 수사학적 개똥을 닦아낸 후 오롯이 남는 순결한 진리이다. 물론 네 생각은 너에게 달려있다.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건 네 자유이다. 다만, 내 말을 어느 자기계발 연설가의 쓰레기 같은 설교로 치부하지는 말아달라. 종교나 도덕, 도그마나 사후세계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유일한 ‘진리’는 죽음 전의 삶이다. 네 대가리에 총알을 먹이지 않고도 서른 살, 아니면 쉰 살까지도 살자는 얘기다. 아주 단순한 자각. 정말로 실체인 것. 정말로 필수적인 것. 우리 둘레 어디에나 널려있는, 그러나 잘 찾아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 그래서 끊임없이, 자꾸자꾸 스스로에게, ‘이게 물이야, 이게 물이야,’ 하고 상기시켜야 하는 것. 이러한 것들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게다.

매일매일 깨어 있는다는 것. 살아 있는다는 것.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렵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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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십계명

* 웃는다.
Tony Robins가 하는 소리는 다 개소리지만 하나 새겨 들을 만한 게 있다. 감정(emotion)은 움직임(motion)에서 나온다(e)는 얘기다. 웃으면 기분도 명랑해진다.

* 우뇌 자극 행위를 매일 꼭 한다.
Jill Bolte Taylor 박사는 우뇌를 심지어 ‘열반’의 열쇠라고까지 주장한다.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죽어있는 우뇌를 깨우는 행위를 매일 꼭 하는 게 중요함에는 별 의문의 여지가 없을 듯싶다.

* 우쭐하지 않는다.
어떤 성공을 했거나 좋은 일이 있으면 스스로에게 잘했다, 대견하다 한 번 해주고 진짜 원인, 즉 운이 좋았음을 고마워한다.

* 우울증의 무서움을 안다.
우울증 우습게 보면 패가망신한다. 우울증을 예방하는 최고의 백신은 가족, 친구와의 관계이다.

* 《우리》에 대한 생각을 《나》에 대한 생각보다 많이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것이다.

* 걸을 때는 욱걷는다.
기회가 닿는 대로 보폭을 크게 하여 힘을 줘 빨리 걷는다.

* 먹을 때는 감씹는다.
먹을 때는 감칠맛이 나도록 맛있게 거듭하여 씹는다.

* 남 욕한다고 나아지는 건 없다는 걸 늘 뇌리에 새긴다.
이것만 지켜도 사춘기에서 벗어나 어른이 된다.

* 자격 있는 사람의 평가는 늘 새겨 듣고 명상한다.
자격 없는 인간들의 평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남에 대한 평가를 즐겨 하는 사람과는 되도록 상종하지 않는다. 이런 인간들은 대개 남에게는 한없이 엄격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무연히 관대한 까닭이다. 극구 피해야 할 허섭스레기들이다.

* 삶에서 100%는 없다는 걸 늘 뇌리에 떠올려 곱새긴다.
삶은 《긍정》이 아니라 《부정》이 지배한다는 것을 깊게 銘心한다. 아무리 좋은 일이 거듭 생겨도 단 한 번의 나쁜 일로 삶은 끝날 수 있다. 아무리 성공을 거듭해도 단 한 번의 추락으로 땅에 떨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교제해도 남 헐뜯고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인간 하나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다. 맑고 깨끗한 물을 더럽히는 데는 오직 올챙이 한 마리면 충분하다는 자연의 이치를 늘 염두에 둔다. 특히, 똥내나는 인간들(모든 도덕적 원칙은 제 소유인 양 제멋대로의 윤리적 잣대로 남을 재단하는 인간들)과는 섭슬리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삶은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비극은, 청춘이 이를 누릴 자격이 없는 젊은 세대에게 주어져 낭비된다는 것이라 하지만, 기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다. 나이를 먹어도 사춘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미 가진 것의 소중함을 모르고, 가까운 사람의 애정어린 말보다는 ‘쿨’하게 보이는 사람의 희떠운 말에 더 끌리고, 물때썰때를 모르며 해야 할 일에는 마음이 없고 하지 말라는 일은 극구 한다. 유치한 반항심을 개혁 정신으로 착각한다. 그러면서 세상의 숨겨진 이치들을 다 꿰뚫고 있는 양 행동하면서 아등바등 애면글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마흔이 되어도 쉰이 되어도 이처럼 정신세계가 사춘기에 머물러 있다면 열 아홉 이후의 삶은 허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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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 of Reading
독서의 기술
꼭,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란 없다.

우리의 지적 관심은 나무처럼 자라고 강물처럼 흐르는 까닭이다. 樹液만 제대로 있다면 나무는 어떻게든 자라게 마련이고 샘에서 맑은 물만 솟는다면 물은 흐르게 마련이다. 흐르다가 절벽을 만나면 돌아갈 테고 낮은 계곡을 만나면 잠깐 멈춰 서서 이리저리 서성일 테며 깊은 산속에 팬 못을 만나면 기꺼이 그곳에 머물 테다. 그리고 급류를 만나면 발길을 재촉할 터이다. 이렇게, 미리 목적지를 정하여 애쓰지 않아도 언젠가는 바다에 닿게 마련이다. 세상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란 없다. 그저 특정한 때에 주어진 곳에서, 주어진 환경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주어진 시점에서 읽으면 된다.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의 짝을 만나는 것처럼 운명, 우리 중국식으로는 ‘인연’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성경’처럼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어떤 걸작을 읽을 만한 때가 되지 않았는데 덤빈다면 그 책은 그저 쓴맛만을 남길 터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오십이 되어서야 주역을 읽을 만하다,”고 했는데 그의 말을 따르자면 마흔 다섯 살에도 아직 주역을 읽을 만한 자격이 없는 셈이다. 논어도, 그 은근한 맛과 농익은 슬기를 깨치려면 읽는 사람 자신이 정신적으로 농익은 다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다는 건 두 면으로 이루어진다.

작자와 독자. 쓴 이가 갖고 있는 통찰과 경험에서만큼 읽는 이가 갖고 있는 통찰과 경험에서 책 읽기의 소득은 빚어진다. 송 시대의 대학자였던 정이천은 논어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책을 읽는 이에는 세 종류가 있다. 논어를 읽고 나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멀뚱멀뚱한 사람이 있고 한 두 줄 마음에 들어 미소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도 모르게 팔다리를 떨며 춤추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와 만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지적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혼 사이의 궁합이라는 게 정말로 있다. 옛날이나 지금의 작가 중 자신의 혼과 궁합이 맞는 작가를 찾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지 않고는 책을 아무리 읽어봤자 말짱 도루묵이다. 독립인으로서, 자신의 스승을 찾아 나서야 한다. 누구도, 자기 자신마저도 어떤 작가가 자신의 혼과 궁합이 맞는 인연인지 말해 줄 수 없다. 첫눈에 반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이러이러한 사람을 좋아해라, 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만나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는 소리다. […] 이렇게 만난 작가는 독자의 얼을 빠지게 하고 독자는 기꺼이 자신의 얼을 내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작가의 목소리와 몸짓, 미소 짓는 모습, 말투까지도 독자는 닮아간다. 독자는 자신의 지적 애인에게 흠뻑 빠져서 그 책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에 줄 먹이를 얻는다. 몇 년이 지나면 빠졌던 얼도 차츰 돌아오고 그 지적 애인에게도 조금 실증이 나기 시작해서 다른 애인을 찾아 나서게 되고 이렇게 몇 명쯤 갈고 나면 독자는 비로소 작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저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니기는 하는데 한번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바람둥이처럼 한번도 사랑에 빠지지 못 하는 독자들이 있다. 이들은 설령 세상의 책을 죄다 읽고 고금의 작가들을 섭렵해도 나중에 남는 것은 없는 사람들이다.

- Lin Yu Tang, The Importance of Living, p. 3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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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hamund.wordpress.com/2008/09/11/artoflearing/ 

배움의 기술

영화 <바비 피셔를 찾아서>의 실재 주인공 조쉬 와이츠킨이 쓴 <배움의 기술(The Art of Learning)>의 발췌. 조쉬 아이츠킨은 체스의 신동 소리를 듣던 사람인데, 영화가 나온 이후로 일종의 연예인이 돼버린다. 한창 사춘기 때 가는 곳마다 여학생들이 난리법석을 피우는 느낌은 어떨까. 물론 모든 사춘기 소년의 꿈이겠지만 막상 당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포스의 독이 되리라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탓에 와이츠킨은 일찌감치 마음 다스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 즈음 접하게 된 것이 태극권이다.

전혀 다를 것 같은 체스와 태극권. 하나는 머리를 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쓰는 일이지만 와이츠킨이 느낀 것은 결국 ‘배움’이라는 줄기에서 뻗어나온 두 개의 다른 가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와이츠킨은 태극권에서도 챔피언의 경지에 오른다.

원래 이런 류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자기계발 류의 책은 한 두권 정도 읽으면 그 얘기가 그 얘기이고, 또한 요즘 나오는 것들은 알맹이 없는 속빈강정인 경우가 흔한 까닭이다. 이런 책을 고르는데는 하나의 원칙을 세웠는데, 그것은 책을 쓴 사람이 실제로 그 책 내용을 체험한 사람이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따위의 책은 빈털털이였던 저자가 ‘부자되는 법’에 대한 책을 써서 부자가 된 가당찮은 경우이다. 이런 류의 책은 책의 내용이 아무리 옳더라도(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사기에 불과하다. 심리학자 등속의 ‘학자’들이 쓴 자기계발서도 죄다 빈 껍데기 언어의 나열에 불과한 경우가 다반사. 실질적 경험에서 나오는 말과 머리에서만 머문 관념적 언어는 천양지차다.

그래서 ‘배움’에 대한 책을 쓴다면 그 저자가 배움에 대해서는 일가를 이룬 사람이어야 하고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와이츠킨은 자격이 있다. 다만 그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이 독이다.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팔딱팔딱 뛰는 아이디어를 관념적 언어로 장식을 하느라,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보석 위에 진흙을 쳐바른 듯한 느낌 때문에 속이 뭉쳐오곤 한다.

원래 따로 떼어서 올린 글들을 하나로 묶어서 다시 올려본다.

배움에 대한 두 가지 접근법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첫째, 정상에 오르는 소수의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둘째, 확률적으로 정상에 오를 가능성이 거의 없는 데, 잘 하려고 노력할(pursuing excellence) 필요가 무에 있나?

이에 대한 답은 다음의 세 가지 요소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 불굴의 정신(resilience), 둘, 우리가 삶에서 벼르는 여러 목표의 연계점을 찾는 것. 그리고 셋, 매일 매일 그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

대개 배움에 대한 접근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발달 심리학자들은 설명한다. 하나는 도 아니면 모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접근이고, 또 하나는 차근차근, 하나 하나 단계를 밟아 정복해 가는 과정으로 ‘배움’을 보는 접근법이다. 전자(前者)는 ‘배움’을 하나의 ‘객체’ 또는 ‘실체’로 보는 것으로, 다 얻지 못하면 하나도 얻지 못한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배움의 ‘실체entity’이론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후자(後者)는 배움을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과정’으로 보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절차적, 단계적 incremental’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실험 하나를 해보면 이 두 가지 접근법의 차이가 또렷이 도드라진다.

우선 아이들에게 아주 쉬운 문제를 내준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문제의 정답을 맞춘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내준다. 이번 문제의 정답을 맞춘 아이는 거의 없다. 이 때 아이들의 반응을 보면, 어떤 아이들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서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흥분하고, 어떤 아이들은 완전히 얼어 붙어 버린다. 결과는 둘 다 정답을 맞추지 못하지만, 서로 접근법이 다른 두 그룹의 아이에게 있어서 다음 문제를 푸는 데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즉, 이번에는 다시 쉬운 문제를 내준다. 당연히 모두 맞추어야 하지만 ‘실체’적 접근법을 취한 아이들은 자신이 충분히 맞출 수 있는 문제인데도 포기해 버린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이러한 류의 문제에 ‘재능이 없는 것’을 발견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물안의 개구리

“  한 번은 아리조나에 내려가서 강의를 하고 지도 체스 ? 동시에 20~50명과 두는 체스(정식 용어는 simultaneous exhibition, 보통은 줄여서 simul이라고 한다)를 둔 적이 있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는데, 행사장으로 가는 길에 아들 자랑 단지에 뿔이 났다. 일 년 넘게 체스 게임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 들으면 대충 상황 유추가 된다.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다.

그 아이를 만나보니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자신의 학교에서는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체스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포석(opening attacks)과 묘수 몇 개를 배워서 다른 아이들을 압도했고, 체스의 기본에 대해서도 감이 있는 아이였다. 이러다 보니 모두가 천재 났다고 띄워주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자기가 이길 수 있는 학교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 외에는 절대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 아이가 가장 자주 게임을 하는 상대는 제 아버지였다. 학교 친구들에게 있어서 이 아이는 체스의 신이었지만, 전국에 좀 한다 하는 아이들에 비해서는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고, 그 아이는 그 상태를 선호했다.

행사 내내 그 아이는 체스를 두려 하지 않았다. 지도 대국에서도 두려 하지 않았고, 내 지도에 따르는 것을 거부한 유일한 아이였다. 완벽한 겉모습에 금이 가는 것을 너무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소라게로부터 배우는 교훈

탁월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길고 긴 과정, 고속도로가 아니라 자갈밭 길로 가는 여정(旅程)을 포용함이다.  ‘웬만큼’ ‘대충’ ‘남들만큼’이라는 껍질 속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깨뜨리고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은 성장통을 동반한다. 탁월함의 추구는 이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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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게(hermit crab)이라는 것이 있다. 이 게는 몸통이 말랑말랑하고 자기자신의 껍질을 가지고 있지 않는 탓에, 빈 소라 류의 껍질을 달고 다니면서 그 속에 숨어 산다. 따라서 성장함에 따라 더 큰 소라 껍질이 필요해지며, 소라게는 지금까지 숨어 지내던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보호막을 찾아 떠나야 한다. 이 여정이 짧은 경우는 괜찮지만 여정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숨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라게는 더 똑똑해지고, 더 현명해지고, 더 강해진다. 껍질과 껍질 사이의 배움의 틈새, 이것만이 성장으로 인도할 수 있다.

***

이런 아이들이 있다. 재능이 있든 주제 자체가 쉽든 간에 자신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조금 어려운 것은 기피하는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은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하든지, 농구에서 골을 넣지 못하면 “진짜로 한 게 아니야( I wasn’t really trying)”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다. 물론 이러한 아이들이 평생  뭔가를 진짜로 하는 법은 없다.

고수와 하수를 가르는 것

맨해튼의 거리는 분주하다. 그리고 무법천지다. 신호를 위반하는 차는 예사고 일방통행을 거슬러 오는 자전거도 흔하다. 혼잡한 보행자들의 흐름을 운전자들은 마치 곡예를 하듯이 빠져 나간다. 뉴요커들은 이러한 환경에 익숙하다. 사이렌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스치듯 지나치는 택시들, 이러한 것들에 무신경하다. 그저 익숙한 일상일 뿐이다. 기적처럼 모든 것들이 별 탈 없이 작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조금만 어긋나도 큰 사고로 이어진다.

그녀는 나로부터 몇 미터 앞에 서 있었다. 정장 차림의 미인이었다. 귀에는 헤드셋을 꽂고 음악에 맞추어 몸을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헤드셋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느닷없이 그녀는 차도로 발을 내디뎠다. 혼란스러운 일방통행 거리에서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차가 오나를 확인해야 할 방향이 틀렸다.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차는 왼쪽에서 오는데 그녀의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려진 채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왼편에서 자전거 한 대가 튀어 나왔다. 자전거를 탄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그녀를 보고 놀랐지만 가까스로 큰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약간의 접촉이 있었지만 그녀는 다치지 않았다.

이 때 그녀는 다시 보도로 되돌아왔어야 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리고 큰 사고가 나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돌아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내빼는 자전거 탄 사람에게 욕을 퍼붓느라 그녀는 계속 차도에 서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 순간 또 하나의 물체가 그녀를 덮쳤다. 이번에 그녀는 전만큼 운이 좋지 않았다. 트럭이었다. 그녀가 트럭에 받쳐 튕겨 나가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나의 눈에 잡혔다. 시간은 그 순간 그대로 정지된 듯했다.

이것은 그녀의 운명이었을까? 이 비극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녀는 틀린 방향을 보고 건너려 했다. 이것이 그녀의 첫 번째 실수였다. 그리고 자전거에 접촉하는 사고가 났을 때 그녀는 첫 번째 실수를 깨닫고 그 실수를 만회해야 했다. 다시 보도로 돌아옴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편안한 살이에 파문을 일으킨 그 괘씸한 자전거에 대한 화가 그녀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이로써 애초에는 별 것 아니었던 실수를 강화하게 된다. 이번의 실수는 치명적이었다.

***

실수를 한 다음 이로부터 즉각 회복하는 것, 다시 집중력을 회복하고 맑은 정신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승부사들과 퍼포머(performer)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첫 번째 실수는 대부분 치명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 첫 번째의 기우뚱거림을 바탕으로 두 번째, 세 번째의 실수가 이어지면 결국 연쇄반응을 일으켜 침몰해 버린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나선형의 하향곡선(downward spiral)이다.

사람들은 여세(餘勢, momentum)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실체인 양 이야기한다. 마치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제 3의 선수인 양 여긴다. 승부의 세계를 어릴 때부터 전전해 온 나로서도 이 여세의 실체성을 믿을 수밖에 없다. 마치 파도를 타는 것처럼 이 여세를 내 편에 놓고 몰아야 한다. 이 파도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고 멍하니 있으면 그대로 빠져버린다. 흐름을 타고 다시 파도에 편승해야 한다. 이를 얼마나 빨리, 그리고 효율적으로 하느냐에 승부는 갈린다.

***

체스나 운동경기와 같은 승부의 세계가 아닌 다른 분야라고 하더라도 톱에 오르는 사람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실수를 흐름 속에 묻어버린다는 점이다. 위대한 배우가 무대 위에서의 실수를 관객이 보기에는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짜여 있는 것처럼 여길 만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수를 승부나 일에서의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지 않고 완벽한 승리나 완벽한 일의 결과에 대한 흠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실수는 두려움을 낳고, 불확실성을 낳으며,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의사결정능력은 흐릿해지고 결국 하향곡선을 타게 되고 만다.

두 천재의 공통점

앞에서 언급했듯이 브루스 스승님은 나에게 마무리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는 대부분의 다른 아이들이 포석(opening variations)부터 배우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스승님은 빈 체스판을 내 앞에 내 놓았다. 단순화된 형태, 그러나 원리 원칙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형(形, positions)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첫 초점은 단 세 개의 말로 구성된 형(形)이었다. 킹과 폰(pawn),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킹.

[▶체스에서 중요한 것 중에 opposition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말로 하면 맞짱 포지션 정도 될까? 킹과 킹 사이의 사각형의 수가 홀수 일 때 두 킹은 맞짱 포지션에 있다(the kings are in opposition), 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킹의 힘과 폰의 섬세한 역할에 대한 직관적 감(感)을 얻게 되었다. <opposition>에 관한 원리를 배웠고 빈 공간이 내포하고 있는 숨겨진 힘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쭈크쯔방(zugzwang, 바둑의 급소 치중(置中)과 비슷)에 대해서도 감을 터득해 나갔다. 스승님과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원리 원칙 자체가 아니었다. 그 원리 원칙들을 나의 창의적 직관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한 겹 한 겹 켜켜이 쌓아 나갔다. 그 후 수 백 시간에 걸쳐 거의 모든 마무리의 형(形)을 연마했다. 루크(rook), 비숍, 나이트 마무리 등등.

이러한 훈련은 나로 하여금 가지가 아니라 줄기와 뿌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배움의 기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내재화(內在化)시키고 있었다. 곧, 지식과 직관, 그리고 창의력 사이의 상호작용이었다. 나의 교육은 밑에서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는 형태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아이들은 포석(布石, opening variations)부터 배웠다. 어떤 식으로 판을 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수 많은 변형과 이론이 존재한다. 이러한 포석의 형(形)을 배움으로써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함정과 지뢰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쉽게 이길 수 있게 된다. 아주 매혹적이다. 조금만 배워도 성과가 바로 나온다.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포석부터 시작하는 아이들은 일종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평생 동안 새로운 포석의 형(形)을 외우는 데 시간을 허비해야 하고 계속 업데이트되는 ECO(Encyclopedia of Chess Openings)를 따라 잡아야 한다. 중독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배움이 가장 나쁜 점은 ‘배움’ 자체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을 터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있어서 체스는 결과다. 승부의 결과다. 성과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다. 배우는 것은 이를 위한 필요악일 뿐이다.

[▶우연히 이창호에 대한 글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부분을 발견했다. 글은 '이창호가 강할 수밖에 없는 세가지 이유'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둘째로 테크닉적인 면인 ‘끝내기’의 완벽도를 들 수 있다. 보통 바둑계의 상식으로, 끝내기 부문은 포석과는 달리 공부로 되는 분야가 아니다. 끊임 없는 경험과 연륜이 쌓여 터득되는게 끝내기인데 이창호는 어린 나이부터 포석과 중반부문에 앞서 이 마무리 부문부터 먼저 도통하는 기현상을 보였다(이것은 바둑계에서조차 불가사의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출처: LeeChangHo.com

배움에 있어 쉬이 빠지는 함정

로버트 퍼직(Robert Pirsig)이 쓴 ‘선(禪)과 모터 사이클 정비(Zen and Motorcycle Maintenance)’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 피두러스가 어느 시골 대학에서 작문 강사로 재직할 당시 학생들에게 그 대학이 있는 동네, 즉 대부분의 학생들이 태어나고 자란 그 자그마한 마을에 대해서 글짓기를 해오라는 숙제를 내준다.

여학생 한 명이 이 숙제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단 한 글자도 쓸 수 가 없었다. 도대체 이 조그만 동네, 아무 것도 없는 동네에 대해 쓸 말이 무에 있을까? 흥미로운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피두러스를 찾아가서 하소연한다.

그녀의 하소연을 다 듣고 난 피두러스는 숙제를 바꾸어준다. 동네에 대해서 쓰지 말고 학교 앞에 있는 조그만 극장에 대해서 쓰라고 말한다. 글의 첫머리는 왼쪽 상단의 벽돌부터 시작하라고 지시한다. 처음에 그녀는 이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그 다음 날 20페이지에 달하는 멋진 작문을 해왔다. 그 동네는 너무 작은 것이 아니라 너무 컸던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이야기는 탁월함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성패를 가르는 교훈을 주고 있다. 테마는 넓이가 아닌 깊이이다. 배움의 원리는 미세하고 신비로운 마이크로 세계를 뛰어들어 매크로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산만의 세상에 살고 있다. 텔레비전, 휴대전화, 비디오 게임, 그리고 인터넷, 이런 것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는 우리를 함몰시키고 있다. 이러한 자극들이 계속되면 우리는 중독될 수 밖에 없고, 좀 더 많은 정보, 좀 더 새로운 정보를 찾아 헤맨다.

금방 싫증이 나고, 금방 다른 데로 정신을 팔고, 금방 현재로부터 분리되어 나간다. 이런 상황에 빠지면 우리는 마치 수면에서만 펄떡이는 작은 물고기 신세가 되어 버린다. 2차원의 세계에 산다. 그 밑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심연(深淵)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이러한 삶의 맥을 끊지 않고 지속한다면 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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