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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 of Reading
독서의 기술
꼭,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란 없다.

우리의 지적 관심은 나무처럼 자라고 강물처럼 흐르는 까닭이다. 樹液만 제대로 있다면 나무는 어떻게든 자라게 마련이고 샘에서 맑은 물만 솟는다면 물은 흐르게 마련이다. 흐르다가 절벽을 만나면 돌아갈 테고 낮은 계곡을 만나면 잠깐 멈춰 서서 이리저리 서성일 테며 깊은 산속에 팬 못을 만나면 기꺼이 그곳에 머물 테다. 그리고 급류를 만나면 발길을 재촉할 터이다. 이렇게, 미리 목적지를 정하여 애쓰지 않아도 언젠가는 바다에 닿게 마련이다. 세상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란 없다. 그저 특정한 때에 주어진 곳에서, 주어진 환경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주어진 시점에서 읽으면 된다.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의 짝을 만나는 것처럼 운명, 우리 중국식으로는 ‘인연’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성경’처럼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어떤 걸작을 읽을 만한 때가 되지 않았는데 덤빈다면 그 책은 그저 쓴맛만을 남길 터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오십이 되어서야 주역을 읽을 만하다,”고 했는데 그의 말을 따르자면 마흔 다섯 살에도 아직 주역을 읽을 만한 자격이 없는 셈이다. 논어도, 그 은근한 맛과 농익은 슬기를 깨치려면 읽는 사람 자신이 정신적으로 농익은 다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다는 건 두 면으로 이루어진다.

작자와 독자. 쓴 이가 갖고 있는 통찰과 경험에서만큼 읽는 이가 갖고 있는 통찰과 경험에서 책 읽기의 소득은 빚어진다. 송 시대의 대학자였던 정이천은 논어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책을 읽는 이에는 세 종류가 있다. 논어를 읽고 나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멀뚱멀뚱한 사람이 있고 한 두 줄 마음에 들어 미소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도 모르게 팔다리를 떨며 춤추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와 만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지적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혼 사이의 궁합이라는 게 정말로 있다. 옛날이나 지금의 작가 중 자신의 혼과 궁합이 맞는 작가를 찾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지 않고는 책을 아무리 읽어봤자 말짱 도루묵이다. 독립인으로서, 자신의 스승을 찾아 나서야 한다. 누구도, 자기 자신마저도 어떤 작가가 자신의 혼과 궁합이 맞는 인연인지 말해 줄 수 없다. 첫눈에 반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이러이러한 사람을 좋아해라, 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만나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는 소리다. […] 이렇게 만난 작가는 독자의 얼을 빠지게 하고 독자는 기꺼이 자신의 얼을 내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작가의 목소리와 몸짓, 미소 짓는 모습, 말투까지도 독자는 닮아간다. 독자는 자신의 지적 애인에게 흠뻑 빠져서 그 책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에 줄 먹이를 얻는다. 몇 년이 지나면 빠졌던 얼도 차츰 돌아오고 그 지적 애인에게도 조금 실증이 나기 시작해서 다른 애인을 찾아 나서게 되고 이렇게 몇 명쯤 갈고 나면 독자는 비로소 작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저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니기는 하는데 한번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바람둥이처럼 한번도 사랑에 빠지지 못 하는 독자들이 있다. 이들은 설령 세상의 책을 죄다 읽고 고금의 작가들을 섭렵해도 나중에 남는 것은 없는 사람들이다.

- Lin Yu Tang, The Importance of Living, p. 3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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