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코의 지름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3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요즘 추리, 미스터리에 빠져있어서 매일같이 읽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장르의 작품도 읽어보는게 좋을 듯 싶어서 선택한 책이 바로 '유코의 지름길'이었다.

선택한 이유는 딱 한가지 비채의 블랙앤화이트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그간 정말 재밌는 작품들을 소개해준 멋진 브랜드이기도 하고, 비채 출판사를 좋아라~ 해서 읽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어릴적에는 정말로 지름길을 많이 알았더랬다. 골목을 요리조리 헤집고 다니고, 남의 집 담벼락을 뛰어 넘고, 귀신같이 개구멍을 찾아 드나들고 하면서 온갖 루트의 지름길을 찾아낸다. 새로운 것을 찾아낸다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근두근 하기도 하고, 나만 아는 길이 생긴다는 사실에 혼자 뿌듯해하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집을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분별력이 생기고, 남의 이목을 의식할 나이가 되면서 자연스레 그런 짓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어느 날, <나>는 유코양에게 이끌려 역에서부터 집까지가는 지름길을 걷는다. 마지못해 따라나서긴 했지만 그 지름길이라는 것이 왠걸 평범한 길이 아니라, 골목을 헤집고 남의 집 부지안에 들어가고, 심지어는 담을 타넘기도 해야한다. 유코는 고등학생씩이나 되었으면서도 자전거를 끌고서 남의 집안에도 척척 들어간다. 주택가 안에서 나타난 왠 대나무숲길을 지나 이리저리 헤맨 끝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면... 

단지 그것 뿐이다. 특별한 사건 같은건 없다. 그런데 지름길을 걸어오면서 유코양과 주고받는 소소한 대화라든지, 지척에 두고도 그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낯선 풍경, 주변의 사물들을 관찰하며 걷는 느긋한 분위기가 뭐라 말할 수 없이 좋다. 어스름한 달밤, 한가하게 강가를 거닐고 있는 것처럼 기분 좋은 평온한 공기가 맡아지는 것 같다.

서양골동품 전문점인 후라코코에서 아르바이트겸 기숙생활을 시작한 <나>는 이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 좋은 점장이나, 건물주인 야기씨, 야기씨의 손녀인 아사코씨와 유코양, 남편과 별거중인 미즈에 아줌마, 프랑스인인 프랑수아즈까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그렇지만 따뜻하면서도 서로에게 연연하지 않는 뭔가 쿨한 느낌의 연결이 마음에 남는 연작 단편집이다. 한번에 다 읽는 것이 아까워서, 홀짝홀짝 한모금씩 읽었다.

7편의 단편들에서는 각각 특정한 사물의 이미지를 연결시켜서 등장인물들을 그려낸다. 예를 들자면 지름길하면 유코, 상자하면 아사코, 오토바이는 미즈에씨 같은 식으로... "나가시마 유"라는 작가는 언제나 그렇듯이 사소한 사물, 움직임, 인물의 행동들까지도 관찰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이미지화 하는데 능숙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저 바라보는것 뿐이지만, 살아가면서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천천히 주위풍경을 돌아보며 걷는 여유를 갖게 해준다. 마치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호기심 많은 아이의 눈과 같다.

담담하게 일상을 말하지만, 그렇다고 단지 흘러가 버리기만 하는건 아니고, 평온하고 느긋한 분위기를 남기면서 지나간다.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한다.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초조해 하지도 않는다. 역시 느긋함이 느껴진다. 유머러스한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포복절도보다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오르게 한다. <나>와 미즈에씨의 만담과도 같은 대화들, 특히 화장품의 명칭에서 연상되는 것들을 말하는 장면은 정말 기발하다 싶을 정도지만, 그것 조차도 담담하게 지나간다. 마치 그랬니? 음 그렇구나, 하듯이. 그게 또 오히려 묘하게 친숙한 장면이라서 웃음이 나온다. 그런 일상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의 여유를 맛보는 것이, 이 책의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지금에 와서 지름길을 찾아보겠다고 남의 집 담을 넘었다간 곧바로 경찰서행이다.)

처음에는 낯설어 헤메던 파리의 거리도 다음날이면 어제 보았던 친숙한 광경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억지로 뿌리칠 필요도 없지만 관계에 너무 연연하고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 초조하게 살아갈 이유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차분한 분위기에서 느긋하게 읽기에 끝내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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