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챕터
위니 리 지음, 송섬별 옮김 / 한길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모든 사람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기를 쓰고 과거에 있었던 어두운 챕터들을 애써 숨기려 한다. 그러나 그 챕터들이 모두 모이면 책이 되고, 도서관 하나를 가득 메운다. 제 나름의 이야기를 가진 모든 사람은 여전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어떤 곳을 잊으려 애쓴다. (p.532) 

   책을 읽으면서 이토록 화가 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잠시 화를 식히기 위해 한 템포 쉬고 읽은 책은 ≪다크 챕터≫가 처음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토록 화가 난 이유는 ≪다크 챕터≫ 속 이야기가 단순한 픽션이 아니란 사실 때문이었다. ≪다크 챕터≫는 책의 저자 위니 리가 2008년 벨파스트 힐즈를 하이킹하던 중, 15세 범인에 의해 성폭행 당한 사실을 고백하는 자전적인 성격의 장편소설이다. 성폭행 당하기 이전의 생활부터 성폭행 당시의 상황, 그리고 성폭행 이후 열린 재판까지의 과정을 세세히 묘사한다. 그것이 너무나도 자세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다크 챕터≫ 속 비비안의 감정에 쉽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비비안은 어려서부터 여행에 대한 꿈을 꾼다. 혼자 아일랜드 오솔길을 따라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걷는 상상에 빠져 있던 소녀는 어느새 자라 하버드대에 입학하고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는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1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받은 비비안은 가이드북에 소개된 벨파스트 외곽에 있는 하이킹 코스에 가보기로 마음먹는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벨파스트 힐즈의 공원에서 그녀는 하얀색 점퍼를 입은 15세 소년을 마주치게 된다. 소년으로 인해 자신의 하이킹을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편했던 비비안은 소년에게서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소년은 눈빛이 달라져 비비안에게 달려든다.

  강간을 당한 여자들이 있다. 뉴스에 나오는 여자들, 친구의 친구의 친구 같은, 이름 없는 존재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니다. 이런 일은 그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일어나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강간을 당한 사람이다.
  (p.168)

-

  작가 위니 리는 비비안을 통해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다크 챕터≫에 모두 쏟아낸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녀가 느낀 감정의 반의반이라도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어렵다. 그녀가 차마 글로 담아내지 못했던 감정들도 있을 테니 말이다. 비비안이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내게,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가해자 조니의 감정 상태이다. ≪다크 챕터≫는 피해자의 시선만을 전달하지 않는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시선을 동시에 전달하여,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니에게도 불행한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로 인해 불안정한 성장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덧붙여준다. 실제로 범죄자들 중에서는 불행한 어린 시절로 인해 그것이 잘못된 성향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조니도 폭력의 피해자였고, 결국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았음을 이야기한다. 작가 위니 리는 그렇게 가해자의 상처까지 끌어안으면서 우리 사회에서의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한편, ≪다크 챕터≫에서 피해자에 대한 2차적 피해와 약한 사법 체계에 대한 문제도 두드러진다. 아마 가장 화났던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비비안이 성폭행을 당한 이후에 경찰은 사건 조사를 위해 그녀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마치 감정 없는 인형처럼 대해진다. 또, 혹시라도 모를 에이즈를 예방하기 위해 약을 처방받기 위한 과정을 비비안 혼자서 처리해야 된다. 피해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한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해서 꾸어야 된다.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는 피해자에게 그 상처를 소독한답시고 소독약을 들이붓는 행위는 너무나도 쓰라리고 아프다.

  망설임. 어젯밤 그녀가 결국 사건을 설명했을 때 스테판이 보였던 태도처럼. 이제 모든 사람이 그녀를 대할 때 망설이는 것만 같다. 경찰만 빼고. 최소한 경찰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것 같다. 그들은 망설이지 않는다. (p.250)

  그 순간 그녀는 이 모든 사법체계가 얼마나 우스운지 생각한다. 혼자 걷다가 그에게 그런 행위를 당한 건 그녀다. 그런데 거의 일 년을 기다려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법정 안에 앉아서 수치스러운 진실을 털어놓고, 자신에게 추악한 유혹녀 이미지를 덧씌우는 추잡하기 짝이 없는 변호사들 앞에 섰다가 이번에는 저 아이가 나에 대한 쓰레기 같은 이야기를 꾸며내는 걸 들어줘야 하다니. (p.446)

-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성폭행은 훨씬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것은 수많은 여성들의 삶을 바꿔 놓고, 그녀들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사회의 그 무엇도 그녀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한다. 사건 조사를 위해 감정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경찰의 조사과정은 수치심과 공포심으로 가득하다는 말도,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진행한 심리 치료는 오히려 더 큰 아픔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맡았다는 말도 자주 들려온다. 그런 사회 속에서 작가 위니 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꺼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에 빠진 여성들에게 결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주기 위해서.

  여러분은 회복할 수 있습니다. 금방 회복하기는 어렵지만, 훗날 언젠가 여러분의 삶은 더 나아집니다. 저는 이 소설을 통해 피해자의 경험을 제대로 다루는 소설을 쓰려 했습니다. 과거가 존재했고, 반드시 미래가 존재하는 우리 이웃의 삶을 그려내려 했습니다. 성폭행으로 상처를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저도 해냈고 수많은 다른 피해자들도 해냈습니다. (p.13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中)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활발히 나타나고 있다. 용기 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녀들의 모습은 멋지고 아름답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사회적으로 남아 있을 그녀들에 대한 2차적 피해가 우려되기도 한다. SNS를 통한 그녀들에 대한 비난적인 댓글들을 볼 때마다 가슴 아프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결코 그것이 그들의 문제가 아니란 사실이다. 타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함께 용기 내고, 함께 바꿔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