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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세븐틴
최형아 지음 / 새움 / 201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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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방 안의 술래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2017년 10월 미국에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및 성희롱 행위에 대한 비난에서 시작된 미투(#METOO)운동이, 대한민국에서도 시작되었다. 문학계를 시작으로 연예계와 정치계에서, 성폭행 및 성추행을 피해 사실들이 SNS를 통해 퍼지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with_you 라는 해시태그로 지지하기도 했다. 닫힌 방 안의 술래들이 문을 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을까.
자기 안의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심희진, 그 여자만의 언어가 아니었다. _P.113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은 올리메이드 여성 병원. 마치 고급스러운 호텔을 연상케하는 이 곳은 유방과 얼굴, 각선미에서 음부까지 여성들의 신체를 성형만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다. 이 곳에서 동업자이지만 페이닥터 같이 일하고 있는 윤영은 환자들의 각선미와 음부를 새로이 만들어주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틀에 박힌 말투로, 환자들을 상담해주고 있던 윤영에게 심희진이라는 환자가 찾아오게 된다. 다른 환자들과 비슷했던 심희진은 윤영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툭- 내비쳤고, 윤영은 그녀의 말에 자신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아니,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기억을.
열일곱.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있던 윤영은 떨어진 성적을 보완하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한 뒤 하교하고 있었다. 비가 오는 그 날 밤, 윤영은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주던 남학생들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된다. 이후 그녀는 그 기억을 잊어버리기 위해 감정이 없는 듯 살아오게 된다. 윤영은 가해자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주동자였던 D는 찾지 못한 상태였다. 같은 고통을 겪었던 심희진의 고백으로 윤영은 다시금 그 날의 악몽을 떠올리고 다시 D를 찾아 나선다.
처녀막을 재생하러 오는 환자들이나 다른 사람과의 성적 체험을 지금 상대에게 들킬까 봐 수술을 감행하는 여자들한테 과연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지? 남자들? 웃기지 말라 그래. 그자들이야말로 여자들이 느끼는 신체적 고통 따윈 아랑곳없이 자신의 쾌락에만 충실한 존재들이니까. _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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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 사회는 성(姓)적인 부분에서 많은 부분을 쉬쉬해왔다. 초등학교 성교육 시간은 굉장히 부끄러운 시간처럼 여겨져 왔고, 혹시라도 성과 관련된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놀림을 받기도 했다. 당당한 것과는 거리가 먼, 부끄럽고 감춰야 할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니 닫힌 방 안의 술래들은 쉽게 말을 꺼낼 수 있었을까. 사회의 수많은 눈동자들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향해 있었다. 그 눈동자가 무서워 피해자들은 방문을 꼭꼭 걸어 잠글 수 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까봐 문고리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다만 저는, 이 세상 어딘가에, 끝까지 놈을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다는 걸 분명히 알려주고 싶었던 것뿐이었으니까요. _p.299
가해자들은 어땠는가. 그들은 자신의 잘못이 부끄러운지도 모른 채, 그 방문을 활짝 열고 돌아다니지 않았는가. 그래서 윤영의 행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끝내 그녀는 지난 날의 자신을 그렇게 만든 그에게 복수한다. 윤영처럼, 모든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에게 느꼈던 것들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싶겠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른 아침 문을 연 인터네스이 바다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다닌다. 그러나 언제나 시끄러운 것만은 아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그 속엔 언제나 '남의 일'들만 가득 차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것들은 윤영의 마음속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무관심의 눈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일은 나와 별 상관 없는 타인들의 아우성일 뿐, 그 어떤 인간적인 메아리나 감탄사도 기대할 필요가 없는 난장판 같기도 하다. _p.61
≪굿바이,세븐틴≫을 읽으면서 나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많이 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닫힌 방 안의 술래였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알지 못하게 사회가 강요한 여성성에 대해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미투 운동의 열기로 세상에 나온 피해자들의 심정은 '남의 일'처럼 여기고 있던 것 같았다. 다행스럽지않게도 그것들은 내 마음속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들의 외침에 공감하는 것처럼 행동 하면서도, 어느새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무관심의 눈으로 타인들의 아우성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더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말해야 한다. 그저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잊어버려도 되는 체험따윈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한 개인의 체험은 우리 모두의 체험이기도 하다. 내가 곧 타인이고 타인이 곧 나다.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연결해줄 것이다. _'작가의 말' 중에서
미투 운동의 열기가 쉽게 사그라져서는 안된다. 여전히 용기 내지 못한 닫힌 방 안의 술래들은 많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닫힌 방 안의 술래였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도 그랬고, 너도 그랬고, 우리 모두가 그랬다. 오늘도 문고리를 잡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많은 닫힌 방 안의 술래들에게 함께한다고 말하고 싶다. Me too, with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