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스마트폰을 찾는다. 밤사이 온 연락은 없는지 확인한다. 토스트기를 이용해 빵을 굽는다. 컴퓨터를 켜 이메일을 주고 받고 필요한 업무들을 해결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길을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먼 지역으로 움직인다. 똑같이 대량으로 생산된 물건들을 값싸게 구매한다. 집으로 들어와 TV를 보며 하루를 마감한다. 이 모든 것들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계'들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기계들이다.
  증기기관의 등장으로 시작된 산업혁명(1차)은 전기 에너지(2차),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3차)을 거쳐 IoT(사물인터넷),AI(인공지능)까지 이르게 되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을 통해 눈 앞에서 확인한 AI의 힘은 매우 컸다. 이미 시작된 4차 산업혁명 이전에 우리는 '의식을 가진 기계'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말로 인간만큼의 의식을 가진 기계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의식을 가진 기계들은 인간들의 삶을 잠식시킬까?

  기계는 인간보다 더 고등한 생명체로 발전하지 않는 대신 인간의 수요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따라 존재 여부와 진보가 이루어지며, 따라서 언제나 인간보다 하위이다.
  지금까지는 모두 좋다. 그런데 하인은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주인의 생활을 잠식하며, 인간은 기계가 주는 혜택을 금하는 순간 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_≪에레혼≫ p.256~257

 

 

  ≪에레혼≫은 1872년 새뮤얼 버틀러가 쓴 풍자소설이다. 버틀러는 다윈의 <진화론>을 색다르게 받아들여 영국의 산업화로 인해 등장하게 된 기계를 바라보고 있다. ≪에레혼≫은 nowhere(어디에도 없는)을 거꾸로 쓴 제목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라인 에레혼은 우리가 아는 사고방식은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선생이 나간 다음 좀 전의 대화를 곰곰이 돌이켜보았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이 내 예상을 뛰어넘게 왜곡되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곤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니 참담했다. _≪에레혼≫ p.99

  에레혼은 유토피아를 역으로 상징하는 곳이었다. 신체적 질병은 죄악이자 비도덕한 것으로 여겼는데 약하고 병든 이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만이 약함과 병의 확산을 막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신체적 결함의 불운 역시 죄가 되었다. 그러나 횡령 등의 범죄에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단순한 정신 질병에 걸린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 정신 질병은 교정관의 교육에 따라 해결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세상 어디에서도 사용할 수 없는 돈을 통용시키는 음악 은행과 세상의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가성학과 가설언어를 가르치는 비이성의 대학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레혼은 지구의 생물들이 진화를 통해 지금의 모습에 이른 것처럼 기계 역시 진화를 할 것이며, 의식을 가진 기계가 나와 인간들의 삶을 잠식시킬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반기계파들에 의해 모든 기계들이 멸종한 상태였다.

   그 때 가장 학식 있는 가설학 교수가 기계는 궁극적으로 인류를 대체하게 되며, 식물에 비해 동물이 우세하듯이 기계는 동물보다 우월하고 동물과는 다른 생명력을 지닌 약동하는 존재가 될 것임을 입증하는 뛰어난 저서를 발표했다. _≪에레혼≫ p.104

 

 

 

 

영국의 산업화로 인해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함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노동시간이 짧아진 사람들은 여가를 즐기기 시작했고 다양한 매체가 등장함에 따라 대중 문화가 발달했다. 또, 기계를 다뤄야 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교육을 받으면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향상했다. 그러나 버틀러는 기계로 인해 편해진 사람들의 삶을 조금은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인간 사회는 증기에 의존하면서 계속 팽창하고 확장하고 있다. 갑자기 증기의 힘이 철회되더라도 인간이 증기가 도입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란 힘들 것이다. _≪에레혼≫ p.275 

  그렇다. 우리의 삶은 이미 다양한 기계에 익숙해져 있고 만약 그 기계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들은 불편함을 호소하며 기계 등장 이전의 삶에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우리는 더욱 기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어진다. 스마트폰을 통해 필요한 것들을 이루어 내는 것도 모자라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이나 기기를 이용하여 삶 전체를 이루어 내려고 할 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벌써 그런 생활에 도달했다. 스마트 기능을 가진 냉장고는 요리하는 우리에게 레시피를 불러주고, "지니야~ 음악 틀어줘!"라고 이야기하면 어느새 내 취향에 맞는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버틀러는 ≪에레혼≫을 통해서 당시 영국의 산업화에 대해서 풍자하고 있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과연 기계의 발달이 우리에게 이익만을 가져다 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더해서 우리에게 기계에 의존하는 삶에 대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에레혼≫을 읽으면서 조지 오웰의 ≪1984≫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빅데이터 시대, 많은 정보들로 인한 사생활 침해가 가능한 현재를 예견했던 ≪1984≫처럼 ≪에레혼≫은 AI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레혼≫이 ≪1984≫보다 먼저 쓰여졌다.) 그러기에 지금이 ≪에레혼≫을 읽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1872년에 상상했다기엔 너무나도 지금과 닮아 있는 모습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에레혼≫을 읽다보면, 그 곳의 상황에 미루어 현실을 되돌아 볼 수 있다. 우리는 AI의 등장에 열광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