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월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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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순간 낮과 밤, 새벽, 황혼, 일몰과 월출 등 하루 안의 시간만 알 뿐,

몇 월 며칠인지는 전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셴 할아버지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을 느꼈다.

《연월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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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에 살기 시작했다. 도시에 태어나 자랐기에 농촌 생활은 마치 먼 곳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문학은 당대의 시대를 반영한다.'는 누구나 아는 사실은 최근 문학에서 보이는 배경들이 더이상 농촌이 아님을 더욱 절실히 보여준다. 도시를 배경으로, 그 속에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고립감과 외로움 등.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닥칠 미래, 특히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농촌에서 벗어난 독자들에게 농촌 배경은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자아낸다.


중국 소설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아마 그 때문이리라. 농촌보다 도시 생활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농촌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공감하기 어려운 탓이 아닐까. 《연 월 일》은 우리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농촌을 배경으로 한 4개의 단편 소설들을 묶은 책이다. 오랫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며, 중국 당대 최고의 소설가로 불리는 옌렌커는 자신의 작품들을 하나로 주제로 모아낸다. '가난과 굶주림, 그 속에서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 도시 배경 속에서 비춰지는 탐욕 속에서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주제로.



만년달력이 없이는 몇 월 며칠인지 알 수가 없을 것이고 날짜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옥수수가 언제 다 여무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가을 수확까지 한 달이 남았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40일 정도 남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천리만리 먼 세월까지 매일 무얼 먹고 산단 말인가? 밭에 뿌려진 종자들은 이미 쥐들이 깡그리 먹어치운 터였다.



<연 월 일>, <골수>, <천궁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 총 4편의 단편 소설들의 주인공들은 어디하나 부유하지 않다.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은 일상일뿐더러 그들의 삶이 어디 하나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생각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갈 뿐이다. 옌롄커는 오로지 이들의 행적에 집중한다. 그 특유만의 묘사로.



골목 끄트머리에 이르러 넓은 황톳길을 건너자 밝고 깨끗한 햇빛이 보였다. 햇빛 속에 먼지가 흩날리는 금성과 진홍빛 하늘 끝, 비취빛 숲과 파란 농작물드이 보이자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알고 보니 죽음이라는 것도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등불이 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죽음이 어찌 꼭 좋은 일이 아니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옌롄커의 작품을 처음 읽는 순간, 60~70년대에 쓰여진 한국 농촌 소설들이 절로 생각났다. 특히 김동인의 《감자》,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같은 지극히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농촌의 정취가 물씬 풍겨져 왔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 느낌은 《연월일》의 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기도록 만들었다. 오래 전 한국 문학에서 보았던 익숙한 분위기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중국식 표현의 조화는 독특한 끌림을 자아낸다. 우리나라와의 해학, 풍자와는 사뭇 다른 색이랄까.



어망을 거둘 때 나는 청백색 물방울 튀는 소리가 났다. 셴 할아버지는 이 소리가 물소리도 아니고 나무 소리도 아니고 풀 속의 벌레 소리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이는 광활하고 허무한 밤이 극도의 정적 속에서 응집해내는 적막의 소리였다. 할아버지는 계속 손가락으로 개의 머리털을 어루만지면서 등줄기를 따라 꼬리까지 갔다가 다시 머리로 돌아왔다. 개는 이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사실 그리 많은 중국 문학을 읽지 않은 터라 중국에서는 어떤 분위기의 소설들이 한 주류를 이루고 있는지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서서히 달라져가고 있는 그곳의 정서를 생각하면 이러한 농촌소설에서 조금씩 탈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마치 산업화가 시작되고 서서히 도시로 모인 우리가 이제는 농촌보다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을, 더이상 가난과 굶주림보다는 탐욕과 외로움, 고독함을 앓고 있는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는 문학들을 써내는 것처럼.


문학은 당대의 시대를 반영한다는 특성은 우리가 현재 놓인 상황과 마주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과거의 우리가 직면한 문제도 다시 돌아보게끔 만든다. 그러기에 문학이 지나온 발자취는 너무도 특별하다. 우리와 인접한 중국이라는 나라의 문학을 통해 한국 문학을 다시 되돌아 보게 되다니,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의 한국 문학, 그리고 더불어 중국 문학이 걸어갈 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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