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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 여행 갑니다
김비.박조건형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평점 :

순리를 거슬러 앞뒤가 뒤바뀐,
우리의 여행을 그렇게 시작되었다.
바쁘고 힘든 일상에서 지쳐버릴 때,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솟아난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먼 해외까지,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보기 시작한다. 어쩌면 나의 여행은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행지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그곳에 있을 나를 상상하는 그 순간부터.
모든 여행 이야기가 각기 다른 색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로 부부만의 일상을 그리고 쓰며 기록한 일상 드로잉 작가 박조건형과 소설가 김비의 여행 이야기도 다른 색으로 시작된다. 우울증, 뇌종양, 비자발적 퇴직…. 어는 것 하나 지독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지만, 그 여느 때보다 평온했던 두 부부는 유럽으로 떠나기로 결정한다. 무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가벼운 삶을 살았으니, 가벼운 여행을 선택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42일 후 현실로 되돌아갔을 때, 어떤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다시 또 그곳에서 그렇게 일상이라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테니까.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에서 보여줬던 그대로 박조건형 작가는 그림으로, 김비 작가는 글로 여행을 담아낸다. 같은 여행을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길을 잃어 여행 갑니다》 책 한 권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함께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상에서 보여주었던 사랑은 낯선 여행지에 놓인 두 부부에게 더 애틋하고 서로가 소중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더 커져만 간다.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서로를 다독이고 이끌어가는 두 사람의 여행은 보는 사람도 부럽게 만든다.
여행하는 시간 자체가 온통 선물이구나. 파리는 우리 두 사람을 설레게 하고, 놀라게 하고, 사랑에 빠지게 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든, 어떤 궁지로부터 도망쳐 왔든 상관없었다. 서로 다른 빛깔과 무게로 우리를 감싸고 있던 그 모든 시간의 숨결 하나하나가 우리를 축복하는 것만 같았다. 여행의 포근한 품속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여행에 언제가 즐겁고 행복한 순간만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장기간의 여행이 계속될수록 '집'은 꽤나 그리운 장소가 되어간다. 친구와 떠난 일주일 간의 베트남 여행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이곳에 오면 행복하고 재밌는 순간만 가득할 것만 같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쁜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편안한 마음보다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으니. 여행도 하나의 일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으로.
《길을 잃어 여행 갑니다》 을 읽으면서 좋았던 것은 그런 '집'에 대한 그리움을 감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꼭 좋았던 순간만 남기는 것이 여행기의 전부가 아니란 듯이, 두 부부는 그들이 도망치듯 떠나왔던 일상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친다. 여행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누구나 지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두 부부의 이야기는 가감 없이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래, 여행의 모든 순간이 낭만적인 것은 아니지."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또, 조금은 웃긴 게 그마저도 여행이니까 떠나고 싶도록 만들기도 한다.
떠날 수 없을 때 떠나지 못하는 마음은 돌아갈 수 없을 때 돌아가지 못하는 마음과 어쩌면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도착점과 출발점은 정반대의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똑같은 곳을 의미하는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여행은 시작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일상을 떠나는 설렘과 더불어 돌아오는 길엔 또 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기를. 두 부부가 보여줬던 것처럼. 그리고 머지않은 시간에, 나 역시 그러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소소하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