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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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아닌 곳에서 살게 되는 상상을 해본다.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인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한국에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게 되겠지, 흔히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 그러나 20년 넘게 살아온 방식을 버린 채 타국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두렵게 느껴진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지는 불안은 물론이고, 낯선 환경 속에서 이방인처럼 서성일 내 모습이 언뜻 보이는 것 같아서.


《엄마는 페미니스트》,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로 주목받는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아메리카나》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여성 이페멜루의 삶을 통해 미국 이민자의 삶을 그려낸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아닌 비미국인으로서, 백인이 아닌 흑인으로서, 그리고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가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지독히도 아픈 성장통이 결코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세상은 거즈에 싸여 있었다. 그녀는 사물의 형태를 볼 수 있었지만 또렷이는, 절대 또렷이는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오빈제에게 자신이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지만 모르는 것들, 자신의 영역으로 흡수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한 세세한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아메리카나》는 이페멜루와 오빈제의 약 20년에 걸친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각자 꿈을 안고 떠난 미국과 영국에서 어떤 현실과 마주했는지를 말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소설에 매료되는 순간 두 사람의 사랑보다는 그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안게 되는지에 집중하게 된다. 세밀하고 섬세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만의 묘사는 이페멜루가 가진 고민들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도록 만든다. 내가 그녀가 된 것처럼, 어느새 고민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으니.


소위 말하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꿨던 이페멜루는 비자가 붙어 있는 여권을 받는 순간,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라는 승리의 성취감에 부풀게 된다. 그러나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일자리 하나 얻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자 그녀는 점점 자신감을 잃게 된다.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에게 비미국인이며, 흑인인 자신은 그저 수많은 아프리카인 노동자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잉크 한 방울이 옷감에 스며들 듯, 그녀 역시 서서히 그들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물론 자신의 외형이 그들이 거부하지 않을 완전한 소속감을 얻는 데에는 여전히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



이페멜루가 방종한 룸메이크의 따귀를 때리려고 했던 이유는 군침 흘리는 개가 그녀의 베이컨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세상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아침마다 얼굴 없는 적의 무리를 상상하며 멍든 가슴으로 잠에서 깼기 때문이었다. 내일을 마음속에 그릴 수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부모님이 자동 응답기에 남긴 메세지를 저장해 두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듣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것, 언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 채 외국에서 사는 것은 사랑이 불안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들을 블로그에 적어내려가기 시작한다.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로서, 이방인으로서 겪은 모든 감정들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생각들을 확고하게 정리한다. 단단해진 이 생각들을 안고 그녀는 다시 나이지리아로 돌아가기로 한다. 미국에 자신이 쌓아두었던 모든 흔적들을 정리한 채.


이페멜루가 자신을 차곡차곡 성장시킬 동안 오빈제 역시 영국에서 그녀와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된다.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고, 미국에서 사는 것." 오랫동안 품어온 계획은 뜻대로 풀리지 않게 된다. 남들처럼 막연하게 외국에 가고 싶어 했던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확신에 찼었지만 영국으로 간 그는 전혀 다른 자신의 삶에 지쳐가게 된다. "자신이 갖게 되리라 상상했던 삶, 그리고 노동과 독서, 공포와 희망으로 덧칠된 지금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토록 외롭다고 느꼈던 적이 없었다. "



미국에서 자신의 인종을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결정해 준다. 지금 모습과 같은 외모를 가진 버락 오바마는 오십 년 전이었다면 버스 뒷자리에 앉아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 어떤 흑인 남자가 범죄를 저지른다면 버락 오바마는 인상착의가 일치한다는 이유로 불심 검문을 받을 수도 있다. 그 인상착의가 과연 무엇일까? 바로 '흑인 남자'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여성으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각 사회가 만들어놓은 사회적 틀 속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포기하고, 결국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되는지를. 사랑에 모든 것을 울부짖는 고모를 보며 이페멜루가 생각했던 것들, 결혼을 한 뒤 이전의 자신을 상상할 수 없는 형수를 보는 오빈제의 시선에서 아다치에가 여성들의 삶에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지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이페멜루를 통해 그녀는 많은 여성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표현한다.



그녀가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가능성을 아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는 이해되지 않았다. 여자들은 처음부터 그런 자질을 갖고 태어난 걸까? 아니면 개인적인 회한을 숨기고, 자기 인생을 중단하고, 자녀 양육에 온전히 투신하는 법을 후천적으로 배운 걸까?



복합적인 문제들을 하나의 소설에 모두 풀어놓을 수 있다니. 아다치에의 《아메리카나》는 어떤 내용의 소설이라고 집약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페멜루와 오빈제가 경험했던 많은 문제들을 함께 겪은 독자로서, 이 소설이 결코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함께한다면 당신 역시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지고 있던 생각의 일부분이 산산조각나는 경험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메리카나》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그 조각난 부분이 아닌 새로운 부분들이 당신의 생각을 다시 메꿀 것이다,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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