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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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여느 소설이든 카타르시스를 느끼길 마련이다. 어떤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감정이 동요되는 그 순간, 혹은 비극적인 순간이 아니더라도 내가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그런 흐름을 보이는 순간들이. 개인적으로 나는 주인공이 잘못된 사실을 깨닫고 서서히 깨어나는 그 과정을 좋아한다. 움츠리고 있던 날개를 서서히 펼쳐 하늘을 나는 듯한 그런 성장을 보는 것이 즐겁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 마음을 주며 책을 읽다 보니 그들이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너무도 대견스럽다.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세상을 받아들이기엔 여전히 무섭고 두려워 웅크리고 있는 내가 동경하는 모습일지도.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처음 알게 된 작가였다. 이름만으로는 작가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떤 문화를 작품 속에 녹여낼지, 그 어떤 것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첫 장편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펼쳤다. 그동안 영미 문학이나 일본문학을 자주 읽었던 나로서는 낯선 문화였다. 나이지리아. 낯선 작가는 낯선 문화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공용어로 영어를, 그리고 500여가지의 토착어를 사용하는 나라.



아버지는 평소에 이보어를 거의 쓰지 않았고 오빠랑 내가 집에서 어머니와 얘기할 때 이보어를 쓰긴 했지만 아버지는 우리가 남들 앞에서 이보어로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우리는 남들한테 교양인으로 보여야 해, 아버지가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영어로 말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예전에 아버지의 동생인 이페오마 고모가 너희 아버지야말로 식민지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 p. 24





나는 내 손을,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바짝 깎아 주던 짧은 손톱을 쳐다봤다. 아버지는 나를 다리 사이에 앉혀 놓고 뺨을 내 뺨에 비비면서,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손톱을 깎아 줬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손톱을 바짝 깎았다. / p. 193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나이지리아의 엄격한 상류 가정 출신 소녀 캄빌리의 정신적인 독립 이야기를 담아낸다. 종교 신념이 강한 아버지 밑에서 캄빌리와 오빠 자자는 모든 일과들을 정해진 대로 수행하며 살아간다. 종교 행사가 있는 날에는 반드시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신념을 기준으로 죄악이라고 생각되는 행동들을 해서는 안 된다. 사춘기 소녀가 짧은 반바지를 입고, 립스틱을 바르는 호기심을 갖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종교가 없던 나로서는 캄빌리 집안의 이야기를 읽는 순간 답답함이 느껴졌다. 캄빌리의 아버지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이유로 그의 가족들을 억압하고 옭아매고 있었으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들을 통제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잘못되어 보였다. 이도교라는 이유로 할아버지와 고모를 배제하도록 만들고, 아이들이 정해진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 방식이라고 생각하기엔 숨이 죄여왔다.



"많이 아팠니? 살갗이 터졌니?" 아버지가 우리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등이 욱신거렸지만 아니라고,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죄악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며 고개를 흔드는 아버지는 마치 뭔가에, 떨쳐 낼 수 없는 뭔가에 짓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 p. 132





아버지에게 대들던 오빠 자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던 캄빌리도 서서히 생각을 바꿔가는 계기가 찾아온다. 집을 떠나 이페오마 고모 집에서 지내는 동안 캄빌리의 생각에 많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동안 아버지가 죄악이라고 여겨왔던 일들이 사실은 그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사촌 아마카가 캄빌리에게 톡 쏘는 말을 할 때마다 우물쭈물 한 마디도 못하던 그녀는 온전한 자신의 생각을 내뱉기 시작한다. 아주 분명하게.



집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나의 머릿속에서 그날 오후가 다시 재생되었다. 나는 미소 짓고, 달리고, 웃었다. 가슴 속이 비누 거품 같은 것으로 가득 찼다. 가벼웠다. 그 가벼움의 달콤함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샛노랗게 농익은 캐슈 열매의 단맛이었다. / p. 223



캄빌리는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를 서서히 만끽한다. 샛노랗게 농익은 캐슈 열매의 단맛처럼 그 달콤한 자유를 느낀 그녀는 서서히 움츠렸던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그 절정의 순간을 독자들이 함께 만끽할 수 있도록 만든다. 중간중간 낯선 단어들이 등장하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음식 이름들이 등장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도록 만든다. 당신이 온 마음을 다해 캄빌리의 이야기를 사랑하게 된다면, 당신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도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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