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 - 삶의 모든 마디에 자리했던 음식에 관하여
정동현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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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생각한다. 혀끝이 기억하는 맛을 찾아 기억을 더듬다 보면 괜히 멈칫하게 되는 음식들이 있다. 추억을 함께 먹은 음식들. 할머니와 서울 가는 길에 지하철의 작은 가판대에서 쪼그려 앉아 먹었던 묵 한 사발, 주말 오후 적당히 신김치를 쫑쫑 썰어 조물조물 비빈 엄마표 비빔국수, 늦은 시간 학원이 끝난 후 출출한 허기를 달래며 먹었던 4천 원짜리 우동, 토요 자율학습일마다 배달 시켜 친구들과 나눠먹었던 참치비빔마요 도시락 등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었던 그 맛이 담긴 음식들 말이다.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들이 그리워졌다》는 독자들이 가진 다양한 추억의 맛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 사표를 던지고 요리사로 시간을 보냈던 정동현 셰프는 자신의 삶 속에 녹아있는 음식들을 하나씩 이야기한다. 삶 속에 음식이 있고, 음식 속에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은 담담하지만 솔직한 글에서 묻어 나온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이야기는 마음 한구석을 콕 건드려 내 추억의 일부가 조금씩 흘러나오도록 만든다, 마치 반숙 계란의 노른자가 슬며시 흐르는 것처럼.



책에 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 맛이 있고 없다는 비평이 아니다. 그보다 음식에 담긴 추억과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만들기 위해 견디고 버텨야 했던 시간을 쓰고 싶었다. 왜 우리가 때로 국수 한 그릇에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북받쳐 오르는지 작은 실마리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 p. 12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들이 그리워졌다》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먹는 음식들을 말한다. 김밥, 칼국수, 양념치킨, 돈가스 등 어제 먹었던 점심 메뉴가 될 수도 있었던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 대수롭지 않은 음식들 말이다. 정동현 셰프는 그 음식들 속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넣고, 아버지의 고독과 어머니의 사랑도 넣는다. 양념 같은 이 이야기들은 독자들의 기억 한 편에도 비슷하게 자리 잡고 있어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하고 뭉클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때가 아니면 다시 느낄 수 없는 맛, 그래서 더욱 혀끝을 자꾸 맴도는 그 맛이 떠오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다시 그 열차를 탄다 해도 그 맛이 날까?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철없이 조르기만 해도 먹을 것이 끊임없이 나왔고, 졸리면 그저 부모님 어깨에 기대 자기만 하면 되었던 맘 편한 시절. 아쉬운 마음만 남기지 말고 언제 한번 기차를 타야겠다. 맥주도 한잔 하겠지. 동해를 보며. 저 계곡 위에서, 푸르고 높은 산에서. 기차 안에서. 캬아. / p. 24




정동현 셰프는 자신이 요리를 했던 경험을 살려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들이 그리워졌다》 속에 음식을 먹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공존하도록 만든다. 음식을 먹는 사람으로서 그 음식들이 자신에게 어떤 거름이 되었는지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음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음식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말한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레스토랑에서 김치 만들기를 주문받은 에피소드, 음식의 미묘한 맛을 좌우하는 소금에 대한 철학 등 요리사로서의 고민과 격정의 시간들을 섞어낸다. 미트볼을 만들며 흐뭇했던 그의 동료처럼 소박한 음식 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지 그의 글은 잔잔하게 이야기한다.



진득한 토마토 소스와 미트볼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을 때, 모두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작은 선물에 기뻐하고 서로의 얼굴만 봐도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미트볼을 담았던 큰 트레이는 깨끗이 비워져 윤이 났다. 미트볼을 만든 장본인인 엘리스는 정작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고 남은 일을 했다. 나는 그녀가 우리를 계속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옅은 미소가 우리를 향해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 p. 250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들이 그리워졌다》를 덮으며 고픈 배를 움켜쥐었다. 이 헛헛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가까운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배는 채워도 마음은 채우지 못했다.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의 맛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으니.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들이 그리워졌다》 속 그의 글이 유독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음식의 맛을 나눈 사람들과의 사랑이 묻어져 나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그 맛을 떠올릴 때, 함께 떠오르는 사람들. 그 맛에 우리는 오늘도 먹고, 사랑하고, 살아간다. 당신은 오늘 누구와 또 다른 추억의 맛을 나누었나요?



나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았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 것이다. 그토록 지루한 하루를 매일 견디던 형, 죽을 나에게 사다준 그 형은 마침내 고시에 합격해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나는 내가 죽을 만드는 정성과 같은 지루함을 벗 삼고, 흰죽과 같이 하찮은 나의 하루를 감사하길 바란다. 그 뜨거운 한 그릇을 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길 바란다. / p.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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