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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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를, 그것이 우리 집단 안에 정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지 그 단어 자체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껴서였을까? 손을 잡지 말라고, 또는 껴안지 말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어디까지가 동성애이고, 어디서부터 아닌지 가려낼 능력이 없었다. 그 점 때문에 그들은 혼란을 겪었다.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 다녔다. 모두들 끌어안고 있었고, 서로의 품에 기대어 5분 또는 10분간 짧은 잠을 잤다. 사이좋은 원숭이들처럼 긴 머리를 빗겼고, 둘씩 셋씩 넷씩 주렁주렁 허리를 껴안고 붙어 다녔다. / p. 27



사랑과 우정 사이에 놓였던 그때 그 시절, 함께 붙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그때에 여자친구들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존재들이었다. 혹여나 이 아이가 내가 아닌 다른 아이들과 놀까 봐 불안하기도 했고, 학년이 바뀌어 우리 사이가 이전 같지 못해 서먹해질까 걱정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 사이엔 비밀이 없길 바랐고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너도 나를 좋아해 주길 바랐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던 우리는, 그렇게 그 시절 서로의 기억 속에 강하게 자리 잡았었다.


《항구의 사랑》은 아이돌 문화가 유행하던 2000년대 초반의 고등학생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좋아하는 아이돌 오빠들을 주인공으로 팬픽을 쓰고 읽으며 동성 간의 사랑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던 그때, 교내에서는 짧게 자른 머리 커트 머리를 한 여자아이들이 인기 있었다. 호기심이었는지, 첫사랑이었는지 알 수 없는 관계를 맺는 아이들을, 레즈비언이라는 단어 대신 '이반'이라고 불렀다. 김세희 작가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목포, 그리고 자신이 보냈던 학창시절의 기억들을 《항구의 사랑》에 담아 독자들에게 전한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데미안』을 읽었을 때 난 인희를 떠올렸다. 어느 날 불쑥 곁에 나타나 나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 주었던 성숙한 친구. 나를 유년의 불안에서 끌어내 주었던, 친구라기보다는 스승 같았던 인물. 그러면서도 비칠 듯 말 듯한 베일에 감싸인 것처럼 어쩐지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었던 수수께끼 같은 존재. / p. 16



'나'인 준희는 친구 인희에게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깊은 감정에 놓여 있었던 존재. 그것을 정확히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을 정도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인희를 바라본다. 인희의 존재가 조금 흐려졌을 때, 준희는 친구 규인의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민선 선배를 좋아하게 된다. 선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고, 가슴 설레는 이 감정을 쉽게 감추지 못한다. 《항구의 사랑》은 이 사랑과 우정 사이의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랑이 어쩌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팬픽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물론 팬픽에는 동성 커플이 등장했다. 그러나 내게 팬픽은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가수가 등장하는 허구의 로맨스를 의미했던 것 같다. 10대 시절 내내 나의 가수는 조성모였다.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열여섯 살 때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길고 복잡한 중세 궁정풍 로맨스를 쓰기도 했다. / p. 36



중학생. 이성에 대한 관심이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인터넷 소설이었다. 지금 읽어보면 터무니없는 전개에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겠지만 당시에 나는 인터넷 소설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고, 팬픽을 읽게 되었다. 팬픽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오빠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여느 인터넷 소설과 다르지 않게 그 속의 오빠들은 사랑에 아프고, 힘들고, 웃고, 즐거워했다. 동성, 이성을 떠나서 그저 어떤 로맨스로 바라봤다.


딱 그 정도였다. 중학교 2학년, 흔히 말하는 중2병이 지나가자 나의 관심도 시들했다. 친구들과 아이돌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팬픽을 읽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실, 《항구의 사랑》 속 그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돌아보아도 그저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여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내게도 소중한 친구였기에 그 친구도 같은 마음이길 바랄 뿐이었다. 그 시절의 욕심이라고 할까.



그런데 내가 그것을 선택했을까?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 강물의 표면에 붙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무토막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도 없는 심오한 물살에 고통스럽게 휩쓸려 다녔던 것만 같다. 그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붙들려 실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 p. 103



이 혼란스러운 감정은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해소되어 버린다. 마치 그전까지 있었던 모든 것들이 낮잠을 자며 꾸었던 꿈과 같았던 것처럼. 그저 나른하게 자고 일어나 내가 어떤 꿈을 꾸었던 걸까, 떠올려봐도 기억이 잘나지 않아 금세 자리 털고 일어나 다른 일을 하며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김세희 작가는 그 꿈의 일부를 떠올려 《항구의 사랑》을 써 낸다. 그 일부를 기억하고, 이렇게 표현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시절이 그리워 그 감정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서툰 감정을 확신할 수도 없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항구의 사랑》을 읽는 여성 독자들에게 기억 한구석에 미뤄두었던 어떤 친구를 떠올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냥 오랜만에 연락해봤어.'라며 연락해보고 싶은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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