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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담아줘 ㅣ 새소설 2
박사랑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5월
평점 :

방 정리를 하다 서랍을 여니 그곳에는 나의 학창시절을 빛낸 오빠들이 있었다. 앨범이며, 메인 모델을 선 잡지며, 스크랩 해놓은 신문 기사까지. 엄마식 표현으로 재미도 없는 음악 방송을 보기 위해 일요일 오후마다 리모컨을 사수하고, MP3 플레이리스트는 항상 오빠들 노래로 가득했다. 용돈을 탈탈 털어 팬클럽에 가입했지만 한 번도 콘서트는 가보지 못한 성공하지 못한 덕후였다. 그럼에도 그 시절에는 오로지 오빠들만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박사랑 작가의 《우주를 담아줘》는 일명 '빠순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포도알', '이선좌' 등 콘서트 티켓팅으로 골머리를 앓아봤던 팬들에겐 덧없이 친숙한 단어는 물론 굿즈 이야기와 오빠가 나오는 유튜브 영상으로 하루 마무리를 하는 덕질 라이프를 그려낸다. '덕통사고'를 당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소재로, 박사랑 작가는 팬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할 정도니.
우리는 찍힌 사진을 다시 찍었다. 그는 대체 몇 개의 렌즈를 거쳐야 나에게 오는 건지. 지난 사진들을 보고 또 찍으며 그때의 그를 떠올리고 그를 보던 나를 떠올리고 그러는 동안 그리워졌다. 왜 지나고 나면 모든 시간이 아쉽고 그리운지 모를 일이었다. / P. 57
독특하게도 《우주를 담아줘》의 주인공들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10대 소녀들이 아닌 세 명의 30대 여성이다. '누나'를 넘어서 '이모'라고 불려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의 그녀들은 '우리는 티켓팅에 실패하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티켓을 살 수 있는 자금력을 갖췄고 국내 공연에 실패하면 해외 공연에 갈 수 있는 행동력까지 갖춘 삼십대 빠순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학창 시절을 빛냈던 구 오빠와 삼십대의 자신을 살아가게 만드는 현 오빠라는 표현까지. 박사랑 작가는 자신의 팬활동을 바탕으로 진솔한 이야기를 꾸며 나간다. 가명을 쓰고 있지만 《우주를 담아줘》를 읽다 보면 괜히 몇 아이돌들이 짐작되기도 한다.
스치는 눈빛 모두에 설렘과 환희가 서려 있었다. 그저 맹목적인 애정만으로 가득 찬 공간의 힘은 우리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적고 우리는 많아서 성립되지 않는 함수 같았으나 무대에서는 '너와 나'만 남아서 일대일 대응을 이루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맘껏 착각해도 좋았다. / P. 66
학창 시절에는 항상 TV 속에 오빠들이 출연했다. 이 오빠도 좋고, 저 오빠도 좋고, 그 오빠도 좋고. 그러나 어느새 오빠라고 부르기에 머쓱한, 나보다 어린 소년들이 아이돌로 데뷔하기 시작하자 아이돌 덕질을 그만두게 되었다. '잘생기면 다 오빠야'라고 하기에도 좀 그래서. 물론 덕질 라이프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매주 V앱을 챙겨보며, 콘서트 갈 날을 기다리기도 하는 또 새로운 오빠가 생겼기 때문에. 삶의 낙을 쉽게 끊을 수는 없지 않나.
사실 그들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까웠다. 내 일상을 흔들고 현실을 뒤엎으며 생활을 조이는. 나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들을 보고 싶었고 더 가까이로 가고 싶었다. 그들은 별이고 꿈이었다. 꿈 없이 일상에만 갇혀 살아가는 내게 그들은 우주를 건네주었다. 나는 늘 꿈 언저리를 맴돌고 맴도는 행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내 우주에 불을 켜주었다. 나는 그 흔들리는, 흐릿한 불빛에 의지한 채 걷는다. 사랑하는, 그들에게로. / P. 267
오늘도 누군가에게 덕통사고를 당했을, 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 싶은 덕질을 하고 있는, 전국의 덕후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그대들이 있기에 또 한 명의 덕후는 소중하고 즐거운 기억들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그렇지만 때로 눈쌀을 찌푸릴 만한 지나친 사랑은 자제해주시길. 《우주를 담아줘》를 통해 오랜만에 추억을 꺼내 보았다. 당신에게도 꺼내 보고 싶은 오빠들과의 추억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