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든 루스 - 제7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이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펼쳐진 페이지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실루엣만 남은 여인이 담배를 들고 있었다. <담배를 든 루스>. 루스는 에이미이거나 로자여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루스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피우고 싶다, 피우고 싶지 않다. 피워도 된다, 피우면 안 된다. 이것은 담배가 아니다. 루스는 사서다. 루스는 은행원이다. 루스는 제인인이다. 제인은 나영이다. 이것은 그림이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그림의 형태를 띤 색과 면과 점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p. 164)

 

익명은 누군가에게 어떤 힘을 빌려주기도 하며, 누군가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기도 한다. 7회 중앙장편 문학상 수상작인 이지 작가의 첫 데뷔작 담배를 든 루스익명으로 하여금 청춘들의 이야기들을 그려나간다. ‘의 시선을 빌려 익명이라는 이름 아래에 가려진 개인 하나하나의 삶을 조명한다. 가난에 허덕이며 한없이 암울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달려가고자 하는 모습을 통해 오늘날의 청춘들을 대표한다. 그래서 담배를 든 루스를 읽다 보면 누가 이렇게 산다, 라는 느낌보다는 어쩌면 네 주변의 누군가는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며, 그것이 네 모습이 아니라고는 부정할 수 없을 거야, 라는 느낌을 안겨주기도 한다.


스물셋의 는 여러 알바를 전전하다 시급이 더 높은 날씨 연구소라는 바에서 일하게 된다. 캐스터라는 직업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어주며, 그들의 감정을 어루만져주는 일을 하는 나는 그곳에서 리즈, 리타, 혹은 유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녀와 함께 일하는 순수언니와 다다 역시 캐스터로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단골손님인 감독에게 연애하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나는 연애하자.’는 그의 말을 신경 쓰게 된다.


날씨 연구소에서 살아가면서 나는 자신의 문제들과 직면하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살 곳을 정하는 것. 나는 웬만한 조건들을 참고 넘어가지만, 자신의 생계가 달린 이유 때문에 무엇보다 집값을 가장 신경 쓰며 집을 구하고자 한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할 때마다 자신이 새롭게 보게 된 세상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꿈은 부사가 아닐까. 낮의 울림을 꾸며주는 밤의 언어. 그러므로 낮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해도 그 의미는 사라져버리게 된다. 하지만 극장 안에서 진짜는 화면 속의 얘기뿐인 것처럼 꿈에서는 꿈만이 진실이다. 그 진짜의 세계는 좀처럼 우리를 놔주지 않는다. (p. 39)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한국 소설을 그렇게 즐겨 읽는 편이 아니다. 가끔씩 현실과도 너무나 닮아있는 소설을 만나게 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오르면서 책장을 넘기기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다른 외국 소설에 비해 주인공이 왜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모두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배경에서 오는 분노는 쉽게 가라앉히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담배를 든 루스는 그런 현실을 굉장히 담담하게 그려낸다. 마치 오랜 친구가 나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것처럼. 더구나 마지막까지 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이름을 밝히는 순간, 그의 문제는 오로지 그에게 국한되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런 것들을 모두 뛰어넘어 이지 작가의 섬세한 문장들은 괜히 마음속에 간직하게끔 만든다. 책을 읽다 보면, 암울한 주인공들의 삶을 지켜보다 우울해지면서도 섬세한 문장들이 콕콕 와 닿으면서 작은 위로를 건네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곱씹으면서 읽어보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믿음은 문장일까. 구조를 가진 하나의 완결체, 끝없는 덧붙임, 그리고 마침표. 하나의 단어에서 시작해 단문으로, 복문으로 그리고 접속사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하나의 문장은 결국 하나의 문장일 뿐이다. 문장은 문장에 끼어들 수 없다. 결합하는 순간 또 다시 하나의 문장이 될 뿐이니까. 도두암도, 백색 믿음도, 스파게티 교도, 영화 학도들이 믿는 그 영화도 모두 하나의 문장이다. 문장이 우리를 홀리고 위로하고 속이고 쉬게 한다. (p.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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