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갈 수 있는 배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윤희 옮김 / 살림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다 제각각이잖아. 여기도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고,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딱 좋은 곳이지. (p. 42)

  《편의점 인간》으로 사회의 문제를 꼭 집어낸 무라타 사야카의 신작 《멀리 갈 수 있는 배》의 첫 장을 넘겼을 때, 이 작품이 결코 쉽게 읽힐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섹슈얼리티(Sexuality)'를 다루고 있었기에 이 거대하고도 묵직한 주제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무라타 사야카는 세 여성을 통해 이 거대하고도 묵직한 이야기를 여러 측면에서 바라본다.
  섹슈얼리티는 성행위에 대한 인간의 성적 욕망과 성적 행위,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회제도와 규범들을 뜻한다. 무라타 사야카는 리호, 치카코, 그리고 츠바키라는 세 여성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적 욕망, 그리고 그녀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제도와 규범들을 풀어낸다. 어쩌면 나와 당신이 당연하게 여겼을 '여성'이라는 성별이 사회제도에 의해서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해서 무라타 사야카는 세 여성의 이야기로 그려낸다.

  잠시 넋을 놓고 거울을 쳐다보고 있던 리호는 왠지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생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와 여자가 피부 위에서 뒤섞여 있는 지금 이 상태라면 2차 성징을 다시 회복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신체 발달에 따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다시 한번 2차 성징을 찾아서 좋아하는 성별을 골라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P. 26)

  열아홉의 리호는 남자들과 잘 어울릴 정도로 털털하고 시원한 성격을 가진 여성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이 좋아하는 남성들과의 섹스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리호는 뒤늦게 사춘기를 겪는 소녀처럼 자신의 2차 성징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자신이 여성을 좋아하는지 혹은 남자를 좋아하는지 혼란스러워하던 그녀는 남장을 시도하고 성 정체성을 찾기 위한 은밀하면서 동시에 개방적인 장소인 독서실을 선택한다. 무라타 사야카는 리호를 통해 사회제도와 규범이 정한 '성별'에 대한 문제를 짚어낸다. 남성과 여성, 이분적인 개념에 집착하며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리호는 독서실에서 서른한 살의 치카코와 츠바키를 만나게 된다.
  치카코는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서 우주의 영원성에 집착하며 육체적인 관계에 대해서 그저 모든 것을 냉철하게 바라본다. 치카코는 스킨십을 비롯한 육체적 접촉은 그저 물질의 접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인간이 되는 순간으로 느끼길 바란다. 한편, 츠바키는 한밤중에도 선크림을 바를 정도로 자신의 여성성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여성에 대한 오랜 사회적 관념들에 사로잡혀 자신의 젊음과 미모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저 독서실에서, 배에서, 어딘가 멀리 자유로운 곳으로 나가고 싶었어요. 나에게는 노아의 방주였거든요. (p.168)

  독서실에서 저마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이 성취하는 바를 원하기 위해 독서실로 모여들었다. 리호는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성별'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치카코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이라고 느낄 수 있는 감정 교류를 느끼고 싶었으며, 츠바키는 오랜 사회적 관념에 자신을 가두면서도 리호의 제안에 흔들린다. 각자만의 세계 속 노아의 방주를 탄 그녀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항해한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만약 치카코 씨가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저와 헤어지려고 하는 거라면 이것만큼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그곳과 억지로 융합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요. 제가 살고 있는 세계도 조금은 특별할지 모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무리하지 말고 각자의 호흡을 유지하면서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거죠. (p. 238)

  무라타 사야카는 이 세 여성으로 하여금 짚어낸 섹슈얼리티에 관한 고민들을 츠바키가 관심을 보였던 이세자키라는 남성의 대사를 통해서 감싸 안는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호흡을 유지한 채 함께 있는 것 그 자체로, 무라타 사야카는 《멀리 갈 수 있는 배》 속 세상에서 벗어나 현실에서도 그 수많은 고민들을 감싸 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우리는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판단하기란 어렵다. 그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 어쩌면 이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우리 사회의 수많은 리호, 치카코, 그리고 츠바키들이 그들만의 방주를 더 멀리 항해할 수 있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